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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 속의 서귀포 서귀포에 뜬 큰 별들

김영호

김영호 (미술사가, 중앙대교수)

 
I. 오늘의 서귀포는 예전의 서귀포가 아니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과 함께 섬 전체를 남과 북으로 이분해 산남지역은 서귀포시로, 산북지역은 제주시로 행정 통합되었다. 이러한 편재는 조선 초기 이래 설치되어 왔던 대정현과 정의현의 행정단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서귀포 연구는 산남지역 전체의 역사를 회복한다는 차원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과거 서귀포의 행정단위를 되돌아보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한면적의 2%도 채 안되는 섬의 땅을 세분하며 지역의 특성을 살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물론이다. 집안의 경우에도 나름의 가풍이 있고 마을마다 고유한 땅의 기억이 있는 법. 행정과 거버넌스의 편의를 위해 광역화 되었다 하더라도 마을마다 전해오는 땅의 기억과 역사를 기리고 승계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제주만큼 좁은 지역에 다양한 문화자산을 가진 곳도 드물 것이다. 제주의 방언도 각각의 읍·면마다 특색이 있고 차례를 지내는 방식이 제주도처럼 차이가 있는 곳이 더 있을까. 이러한 다양성이 일만 팔천 명의 신들이 살았다는 신화를 탄생시킨 근간이 되었다면 이것을 보존하고 승계하는 것이 후손들의 일일 것이다. 서귀포가 품고 있는 과거의 7개 면들인 대정·안덕·중문·서귀·남원·표선·성산 지역의 기억과 역사는 그대로 제주가 지닌 문화적 자원이다. 우리는 이제 이 모두를 통합해 서귀포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서귀포의 문화적 원형에 대해 연구하고 조사하는 것은 소중한 땅의 기억과 역사를 함께 아우르는 범주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II. 서귀포는 한라산이 거대한 병풍처럼 북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 남방을 향한 기세가 안정된 공간이다. 넉넉한 빛을 받으며 대양을 향해 펼쳐진 주상절리 기암절벽은 섬 안에서도 독특한 수직적 경관을 자랑한다. 앞바다에 떠있는 세 개의 섬들은 시선을 대양으로 멀리 이끄는 수평적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다. 이렇듯 서귀포는 수직과 수평의 지세가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는 지역이다. 시각을 달리하면 국토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탓에 서귀포는 자연의 전령을 가장 처음으로 맞이하는 곳이다. 대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의 길목이자 춘하추동 계절의 소식은 이곳을 통해 육지로 올라간다. 
주지하듯 제주라는 한자어는 건널 제(濟), 고을 주(州)로 되어 있다. 제주의 지명은 지리적으로 육지와는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의 섬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중 서귀포는 물마루 건너 고을 중에서도 육지 사람들이 보기에 한라산 너머의 평온과 안위의 땅이었다. 서귀포는 서쪽의 방위(西)에다 돌아갈 귀(歸) 그리고 물가 포(浦)쓰고 있어 교차로의 의미를 품고 있다. ‘돌아와 깃들인 바다’ 혹은 ‘머물다 떠나는 포구’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이른바 열린 공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일까. 국내의 많은 미술인들이 이곳을 찾고 머물다 돌아갔다. 물론 평생을 정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서귀포를 찾아 들어온 미술인들의 사연이 저마다 다르듯이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고유한 서정과 이상을 품고 있었다.  
서귀포에서 태어나거나 서귀포를 찾은 서귀포 미술인들은 그림으로 자신이 머물던 마을을 그렸다. 그리고 훗날 이들이 남긴 서귀포 풍경은 서귀포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 한 장이 그 인물의 전체를 대변하듯 한 장의 그림은 곧바로 그 지역의 더없는 홍보대사가 되었다. 화
가들이 남긴 그림은 당시의 개인적 삶을 돌아보고 나아가 동시대의 시대상을 추적하는 훌륭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예술이 시대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연구는 서귀포의 환경과 그 환경을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양한 시각의 화풍들은 저마다 서귀포의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자원들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서귀포 미술인이라 부를 수 있는 네 명의 작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이름은 김인지, 변시지, 이중섭, 장리석 이다. 이들은 서귀포를 찾아 서귀포의 풍경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숙성시켰고 이를 그림으로 남김으로써 서귀포의 존재를 널리 알린 분들이다.






김인지, <애(崖)>, 캔버스에 유채, 91x60cm, 1935



김인지, <서귀항>, 1936


김인지, <해녀>, 1938


II.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김인지(1907-1967)의 작품들은 서귀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있다. 김인지는 서귀포시 예례동(남제주군 중문면 하예리)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거쳐 전라남도 도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였다. 1934년에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광회도화강습회에서 한달간 수채화를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귀국 후 김인지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 등단했다. 그의 입선이 전라남도(당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의 최초 선전입선자라는 사실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듬해인 1936년과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면서 선배화가들이던 김복진과 김인승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김인지의 선전 출품작들은 모두 서귀포의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첫 번째 입선작은 정방폭포 근방을 그린 것으로 제명이 벼랑을 뜻하는 <애(崖)>라고 되어 있다. 서귀포만이 지닌 독특한 자연과 풍광을 실감나게 표현한 수작이다. 정오의 시간대에 절벽위에서 쏟아지는 청명한 빛이 인상적이며 그 아래로 흐르는 청록수에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들은 장 프랑스와 밀레의 농민화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해안절벽의 압도적인 위용은 위대한 자연에 대한 작가의 심리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숭고미일 것이다. 하늘이 냇물에 잠긴채 도도한 흐름으로 바다를 향할 때 이 하늘을 기둥처럼 떠받치는 주상절리의 절벽은 가히 위압적인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인간을 감싸고 맴도는 대자연의 기운, 그것을 낭만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낭만적 숭고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의 색깔과 대비해 멀리 수평선 위를 거슬러 다가오는 저녁의 석양빛은 시간성을 나타내는 코드로 작용한다. 김인지는 서귀포의 폭포와 주변의 섬 그리고 한라산과 포구를 즐겨 그렸다. 두 번째 입선작 <서귀항>은 화면 상단으로 새섬이 보이고 왼쪽 언덕에는 기와집과 그 언덕 아래 포구에서 배를 기다리는 여인들과 입항하는 작은 배들을 그린 것이다. 세 번째 입선작 <해녀> 역시 새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을 그린 것으로 해안가에서 물질을 마치고 나온 해녀들이 몸을 말리고 있는 장면이 소재가 되었다. 아쉽게도 이 두 점의 작품은 흑백 사진으로만 남아 있어 원화의 색채가 보여주는 서정성을 감상하기에 어렵다. 하지만 전해오는 그의 작품이 지닌 녹갈색 기조의 색상과 견고한 화면구성 그리고 정감 있는 터치로 묘사된 형상들은 김인지 예술이 지닌 특성을 가늠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작업은 일제 이후로 내려오는 고전적인 형상에다 인상주의의 색채와 터치를 절충한 작품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성은 한국 근대미술의 계보에서 그의 작품을 일별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애>에서 보여준 대담한 화면구성은 서귀포의 자연을 자기화시켜 작품으로 표현한 것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식민지에도 사회적 불안을 조성했다. 여기에다 제주도내 젊은이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는 등 전시체제의 상황은 자유로운 창조활동을 제한하였을 것이다. 해방이후 김인지는 교직과 행정을 아우르는 지식인으로 삶을 살았다. 중문공립초등학교 교장과 제주도 총무국 학무과장을 거쳐 후일 제주시장과 제주 KBS 국장을 지내게 된다. 김인지는 1948년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제주풍경화 30여점을 모아 개인전을 개최했으니 화가로써 그의 선구적 태도와 열정은 후학들에게 값진 것이었다. 그의 미술계 형성을 위한 노력은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활동한 사실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변시지, <폭풍의 바다1>, 캔버스에 유채, 80.3x116.8cm, 1991




시지



변시지, <태풍>, 캔버스에 유채, 182x228cm, 1982



IV. 변시지(1926-2013)는 서귀포의 풍광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일으켜 세워 독자적인 화풍을 일군 화가였다. 그리고 그 독자성은 제주의 보편적 서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서귀포시 서흥동에서 태어나 6세때 부친을 따라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했다. 변시지의 일본행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와 재산으로 한량의 삶을 살았던 부친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내린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변시지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유년 시절은 평탄하지 않았다. 소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교내 씨름 시합을 하다 대퇴부 관절이 부서지면서 평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식민통치하의 일본에서 이방인이었던 그에게 던져지는 차거운 시선은 그가 끌어안고 극복해야 할 현실이었다. 변시지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서귀포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장엄하고 신비스런 서귀포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있는 것들에 대한 관찰의 기억들이 변시지의 독자적인 그림으로 표현되기까지는 인생의 반을 필요로 했다.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동경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조직된 광풍회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을 때 까지도 그의 노정은 실험과 모색의 과정일 뿐이었다. 31세의 나이에 귀국해서도 계속되었던 방황의 노정은 그가 일본으로 떠난 이후 44년만의 귀향에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오사카와 동경 그리고 서울을 순회해 돌아온 그는 서귀포 자연에서 황갈색 톤의 빛을 발견한다. 황토빛 대지와 바다 그리고 광휘의 바람은 새로울 것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귀포의 자연은 자신에게 새로운 예술형식과 논리의 보고로 다가왔다. 초가집이며 돌담, 정주석, 소나무, 조랑말 그리고 까마귀와 같은 제주의 풍물들은 변시지의 화폭에서 새로운 의미로 번안되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 ‘빛과 바람과 실존의 메타포’라는 칭송이 뒤따르게 된다. 

자연의 빛과 바람이 화면의 색과 선으로 변주되어 태어난 것이 변시지의 ‘제주화’라면 그 바탕에는 서귀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변시지의 그림이 세간에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이 서귀포 풍경일 뿐만 아니라 은둔자의 고독감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기다림의 심사를 암시적으로 상징하는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정은 현실을 사는 실존자의 근원적 고통과 불안을 동시에 품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서정은 일종의 숭고가 된다. 그것은 폭풍의 바다나 별들이 채워진 무한공간을 바라볼 때 생기는 두려움을 동반하는 쾌의 감정이다. 변시지 예술의 씨앗은 서귀포의 자연에서 발아되어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성장했고 서울을 거쳐 다시 서귀포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세계인 제주화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변시지는 자신을 제주도를 대변하는 화가라는 말을 부정한다. 그가 진정 꿈꾸는 것은 제주도라는 형식을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의 고독감, 이상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따라서 변시지의 제주화는 서귀포로부터 온 것이나 지역의 차원을 넘어 인류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러한 화백의 정신은 서귀포를 넘어 세계인들이 서귀포를 사랑하게 만드는 소중한 원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중섭, <섶섬이 있는 풍경>, 나무판에 유채, 1951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나무(합판)에 유채. 56×92㎝ 1951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종이에 유채, 18.2x28cm, 제작년대 미정



V. 이중섭의 경우 외래인으로서 서귀포의 신화적 풍토와 만인의 고향으로서 이미지를 세간에 알리는데 기여한 경우다.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이중섭이 제주로 피난 내려온 것은 1951년 1월이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월남한 뒤 다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그해 12월 이중섭은 서귀포를 떠나 부산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광폭한 전쟁의 위협과 지독한 가난을 견디지 못해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이후 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을 만났지만 이별과 그리움의 삶은 1956년 서울의 어느 정신병동에서 외롭게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인생은 시인 구상의 펜을 통해 하나의 소설처럼 엮어졌다. 격변의 시대를 안고 살았던 가난한 화가로서, 일본인 아내를 둔 조선인 남편으로서, 그 사랑의 결실인 자식의 아버지로서,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매는 피난민으로서, 현해탄을 사이에 둔 생이별의 주인공으로서 등장하며 이중섭은 근대기를 살았던 신화적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중섭은 서귀포에 일년 남짓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등 서귀포 시대의 명작을 남겼다. <서귀포의 환상>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감귤나무와 새 그리고 아이들의 한데 어우러진 이상세계를 그린 것이다. 화면을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분하고 화면을 다시 근경과 원경으로 나누어 열린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근경에 자리한 세 마리의 거대한 새와, 바다 너머로 사라지듯 점차 작게 묘사한 새의 무리에서 화면공간의 확장을 바다 너머로 연장시키려는 작가의 조형의도가 엿보인다. 화면의 주인공인 여덟명 어린이들의 다양한 몸짓에서도 이중섭의 드로잉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무에 오르고 새에 올라타고 드러눕고 일을 거드는 아이들의 다양한 제스추어를 표현하려는 진솔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이중섭이 거주했던 알자리 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면은 여전히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분되어 있으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다에 멋스럽게 떠있는 섬과 초가지붕 그리고 팽나무이다. 화면 중심에 놓인 오솔길은 바다로 향하는 시선을 정답게 만들고 있다. 이중섭의 눈에 들어온 서귀포는 전쟁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평화롭다. 오른쪽 중앙에 점을 찍어놓은 듯 배치한 돗단배는 적막감 속에서도 기다림의 상징처럼 그림에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보인다. 

이중섭의 작품에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물고기와 게, 벌거벗은 아이들은 서귀포를 떠난 이후 나타난다. 이들 주제는 서귀포라는 공간에서 잉태된 것들이다. 서귀포를 떠나 부산과 통영과 서울을 유랑하면서 이중섭에게 점차 각인되었던 소재들이 마침내 이중섭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거기에는 ‘가족과 더불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녹아 있으며 서귀포를 떠난 후 다시 부딪치게 될 현실적 고뇌와 그리움을 극복하려는 가운데 건져 올린 형상들로 다가온다. 이중섭의 유화나 은지화에 자주 등장하면서 그의 작품의 대표적인 캐릭터가 된 섬과 게, 물고기, 아이들은 서귀포가 잉태하고 낳은 것들이다. 이중섭 특유의 해학성과 상징성은 이 캐릭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능력에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장리석, <해조음>, 캔버스에 유채, 176x226cm, 1957



장리석, <산정>, 캔버스에 유채, 145.5x112.1cm, 1980




장리석, <제주의 서설>, 캔버스에 유채, 53x41cm, 1992


장리석, <남국의 봄>, 캔버스에 유채, 113x113cm, 1972

VI. 평양 출신인 장리석은 이중섭과 더불어 외래인으로서 제주의 풍광을 외지에 알리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1950년 12월에 해군 정훈부 선무공작대요원으로 입도하였으나 제주에서 정훈부가 해산되면서 피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이후 실향자의 아픔 속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 그림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4년을 보냈다. 피난시절에 대했던 제주의 바다와 해녀 그리고 조랑말은 서울에 정착한 이래 그의 예술에 중심화두로 승화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는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장리석은 제주에 도착한 후 제주시 칠성통에 창고방을 하나 얻어 한동안 머물렀다. 제주민들의 제사용 초상화를 비롯해 대정리 대승사의 벽화를 그렸으며 산방산 석굴의 불상을 제작하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제주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장리석은 인생고락을 함께할 황해도 출신 피난민 여성과 재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는 모슬포에 위치한 군부대 근방에서 도너츠 가게를 열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소재의 그림을 그리면서 심리적 안정을 서서히 되찾게 되었다. 장리석이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제작한 작품의 소재는 주로 한라산과 해변 그리고 해녀와 조랑말 등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작품은 아쉽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51년 종이에 과슈로 그린 <오현중학교 근방>과 1952년 종이에 수채로 제작한 <남해의 여인들>, 그리고 1953년에 그린 유화 <해녀들>을 포함한 일련의 드로잉들이 현재 알려진 전부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한동안 그의 관심은 환경의 영향 때문에 노인과 마부 등 도시 서민들의 삶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1957년에 제주도의 해녀를 소재로 한 기념비적 작품 <해조음(海潮音)>을 그리기도 하지만 작가가 제주의 바다와 해녀를 중심적 소재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서울에서의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귀포의 기억속에서 해녀들은 작가에게 창조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건강하고 원초적 생명력이 깃든 모습의 제주 여성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한편 한라산과 해변을 중심로 작가가 드러내는 자연은 돌의 꽃이 자라는 영원한 시간속의 풍경이며 남국의 신비로운 풍광이 서려있는 세계로 귀착된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남국의 봄>이나 한라산을 그린 <산정>은 실향민으로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화가가 꿈꾸는 영혼의 고향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나타내고 있다. 

<남국의 봄>은 소라나 고동 등의 조개더미가 화면의 중앙에 겹쳐 자리 잡은 두 개의 바위 아래도 쌓여 있는 그림이다. 그 너머로 자리한 바다는 짙은 초록으로 칠해져 신비로운 깊이를 나타내며 원경으로 배치된 언덕은 노을 지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에 부분적으로 노출되며 낭만성을 더해준다. 이상향의 세계로서 자연이 지닌 신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이렇듯 1970년대의 작품에는 기법상의 변화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자연의 신비한 풍광을 녹색과 백색을 근간으로 하여 차분한 터치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전의 작품에서 보이는 명암의 강렬한 대비는 신비하고 온화한 서정성이 한층 강조되는 화풍으로 바뀌는데 이러한 태도는 남국의 풍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남국의 풍경은 곧바로 이상세계를 나타내는 제주의 아이콘이 되었다.

VII. 이상에서 보듯 화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서귀포의 이미지는 저마다 다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의 환경이나 개성에 따라 화풍과 이념이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김인지와 변시지 그리고 이중섭과 장리석의 작품들은 이렇듯 변화하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일제와 해방 그리고 전쟁과 복구의 급변하는 한국 근대사의 시공간 속에서 이들이 남긴 작품은 그 자체가 역사성을 지닌다. 서귀포를 그린 풍경은 이들의 눈에 비친 서귀포의 풍경이자 그들의 바라는 꿈의 세계로서의 서귀포 풍경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들이 마음에 품고 사는 이상향의 풍경으로 확대된다. 
서귀포는 품에 들어온 모두에게 안식의 고향이 되었다.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향수란 특정 공간의 범주를 넘어 인간의 영혼이 쉴 회귀의 본향이다. 서귀포는 이들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지역을 넘어 보편적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잡은 영원한 이상세계로 거듭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깊은 샘이 있고 장엄한 산 아래 학들이 날개짓 하는 신비의 영역이다. 오늘의 서귀포는 예전의 서귀포가 아니지만 그곳에서 미래를 위한 자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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