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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김영호

김영호(미술평론가)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p.17)


I.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1924-2013)가 1984년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고 미술계가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지 30여년이 지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주장한 예술의 종말이란 예술자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예술개념의 종식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가 진행되면서부터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을 규정해 온 비평원리나 미학이론이 더 이상 동시대 미술을 진단하는 잣대가 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술의 종말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의 예술이 새롭고 전위적인 활동이며 순수하고 철학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오늘의 예술은 현실과 일상의 온갖 것들을 차용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융합하며 다양한 장르를 혼성적으로 받아드리는 활동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그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이다. 
    
  예술의 종말은 비단 예술개념 자체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산시켜왔다. 예술개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미술관, 미술시장, 미술제를 변화시켰고 나아가 예술을 해석하고 감상하는 비평가와 대중들의 시선도 변화시켰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제도와 정책의 주체들도 변화하는 현실에 부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일탈의 상황은 예술계를 위기로 몰아갔다. 현대미술관은 산업폐기물이나 생경한 자연물을 수집하고 미술시장에서는 포르말린에 담긴 절단된 동물의 사체나 인쇄 복제물들이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남성용 소변기나 슈퍼마켓의 포장박스가 예술작품으로 둔갑해 세계 각국의 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사례는 이미 고전이 되었다. 어디 그 뿐이랴. 자신의 몸에 면도칼로 상처를 내거나 수술적 변형을 시도하는 신체미술에 이르면 혐오감이 치밀어 오른다. 오늘날 예술은 과연 총체적 혼돈의 상황을 맞고 있다.    
 
  예술의 종말은 가치의 종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담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인간을 지탱해 오던 진과 선과 미의 가치들은 예술에서 멀어져 가고 그 자리에 위와 악과 추의 이미지들이 대체되고 있다. 그들은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들로 부터 이론적 양분을 공급받으며 욕망과 충동 그리고 본능이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계로 모험을 실천한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라캉의 ‘부정적 숭고’, 들뢰즈의 ‘욕망’, 푸코의 ‘광기’, 데리다의 ‘해체’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지닌 모순과 역설의 구조를 대변해 주는 용어들로 대학가에 자리 잡았다. 예술의 종말이 주는 위기상황에서 오늘날 청년 예술가들은 질문한다. 예술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예술의 종말은 창조의 제로지점이며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II. 단토가 예술종말론 내놓고 세대가 바뀐 지금 우리의 미술계가 처해 있는 해방과 자유의 상황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해방과 자유의지가 심화되는 현실이 청년예술가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자들의 고백처럼 자유는 불안과 고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종말 시대를 사는 예술가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과 고독이라는 값을 치루는 자유다. 오늘의 청년예술가들은 예술종말의 논점으로써 ‘해방’과 ‘자유’의 개념에 숨겨져 있는 사회심리학적 의미에 대해 숙고해야 할 과제를 떠안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미술주간 학술행사를 계기로 적어본 단상으로 청년예술가들과 토론을 위한 발제적 성격의 내용으로 제시되었다.

  1) 동양사상과 전통의 문제 : 1950년대 후반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들은 서세동점의 근대주의 상황에 대응하면서 노장과 같은 동양의 전통사상에 의존해 방향을 모색했다. 그들은 서구 모노크롬 회화의 형식을 받아들여 그 안에 무념무상이나 무위자연의 자연관을 불어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구미의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과 미니멀을 한국의 단색화로 정착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단색화가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 미술경향으로 자리 잡게 되는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미술사가 권영진은 ‘은둔과 탈속의 선비사상’에 뿌리를 둔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와 산업화 시대의 지배계층인 신흥 중산층의 엘리트적 예술취향, 그리고 한국사회가 갈구했던 세계화와 전통의 융합이라는 다소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과업에 예술계가 부응하며 얻어낸 결실로 보았다. 아울러 단색화는 한국 미술인들에게 비평적 자극과 동양 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했음에도 ‘사회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미술’을 촉진시켰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한국 미술의 특수한 상황은 서구의 비평가들의 눈에 흥미롭게 비추어지는 것 같다. 단토는 위의 책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유럽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동양의 몇몇 국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문화 지역주의적 성격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동양의 전통사상과 윤리적 규범을 따르는 일은 한국의 청년예술가 세대가 당면한 과제의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전통이란 시대와 함께 진화되는 유기적인 사고의 체계이고 시간과 더불어 변화되어야 하는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고 현재화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동양사상과 전통에 대한 논쟁이 서양이 아닌 일본이나 중국을 대립항으로 설정했을 때 발생되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해방과 자유의 맥락에서 전통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2) 부정적 가치의 수용 : 해방과 자유의 시대가 야기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오늘의 청년예술가들이 어떻게 대면해야 할 것인가. 미술사의 영역에서 예술의 지고의 가치인 진·선·미가 위·악·추의 이미지들로 대체되어 표현되는 사례는 종종 발견된다. 보쉬나 브뤼겔의 작품에는 위선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존재했으나 그것은 그 배면에 숨겨놓은 이성과 윤리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알레고리적 언어로 표현되었다. 포스트모던 미술사의 맥락 안에서 혐오스럽고 폭력적인 예술의 행보들은 기성세대에 만연한 권위적 관습과 모순된 사회체계를 거부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건강성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예술에 나타나는 가치의 변화는 예술을 위기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편화된 신체, 자학적인 퍼포먼스, 부패한 사체, 고깃덩어리로 묘사된 몸 따위의 이미지는 고통 없이 바라볼 수 없는 것들이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혐오와 공포의 장면는 이제 대중정보 매체를 통해 현실의 뉴스로 재현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9.11테러나 11.13테러 이미지는 도를 넘어선 폭력의 세계를 현실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청년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동시대의 부정적 현실을 마주하고 대응하며 살아간다. 예술종말의 시대에 자유를 구가하는 예술은 전쟁, 테러, 폭력, 욕망, 권력, 죽음, 마약, 잔혹성 따위의 부정적 문화현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행보하고 있다. 라캉은 이러한 세계를 고통속의 쾌라는 역설적인 정신분석 개념으로 해석하며 주이상스라 명명함으로써 비평의 폭을 넓혀놓았다. 주이상스는 포스트모던적이고 현실의 개념이 모호해진 상태에서 출현하는 쾌이자, ‘상징계’(언어와 언어를 본 떠 구조화된 문화의 모든 영역의 세계)라 불리우는 사회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보존하고 충족시키려는 가운데 나타나는 쾌’로 정의하고 있다. 동시대의 예술은 기존의 모든 규칙을 무시해가면서 일상적 삶과 예술 사이에 있는 경계들을 재검토의 대상에 올려놓거나 혹은 그것을 위반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려 한다. 오늘의 일부 예술가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뒤섞이는 기호들을 공상적이거나 잔혹하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라캉의 ‘부정적 숭고’ 세계는 이러한 심리현상을 숭고라는 역사적 미학의 영역으로 거슬러 소환시키는 개념이며 청년예술가들이 연구할 만 한 주제로 보인다. 


3) 거대담론의 실종 상황 : 예술의 종말이 야기한 해방과 자유의 의지는 청년세대의 삶의 유형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 하나의 현상이 사회적 규약에서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영역으로 자신의 관심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에 대응하는 태도가 소극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넘어 내 집 마련과 취업까지 포기하는 ‘5포 세대’가 증가하고 있다 한다.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는 ‘7포 세대’가 올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청년 취업난과 장기화된 경제 불황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와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보존하고 충족시키려는 정신이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고도의 경제성장과 글로벌화가 계속되면서 경쟁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과 부정의 의식이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청년세대의 삶의 유형은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졸업시즌이 되면 대학에서 보내오는 졸업전 도록의 작품을 보면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개인적 일상과 삶에서 벌어지는 소박한 단상들이 일기처럼 표현된 것들이 많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공론화 하고 집단적 발언을 시도했던 1980년대 미술계 상황과 달리 최근의 청년세대는 개인사의 범주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아련한 몽상의 상황에 탐닉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인 관심과 달리 시대의 담지자로서 청년세대가 수면 아래에서 사고의 보폭을 넓히고 있다는 차원에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개인주의가 21세기형 사고의 모델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러한 현상은 청년예술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담론의 실종은 청년예술가들이 숙고해야 할 또 하나의 화두라 여겨진다.              


4) 예술과 돈의 경계에서 : 청년예술가들에게 예외 없이 엄습하는 것이 직업과 돈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보수적 교육을 받은 일부 청년세대는 예술과 돈을 연관시켜 말하는 것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훌륭한 예술가는 상업주의와 결탁하지 않고 순수한 예술을 하기 위해 돈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고 믿으며 아르바이트 조차도 멀리한 채 작업실을 지킨다. 한편 ‘예술가도 하나의 직업이다’라 말하는 또 다른 일부 청년세대에게는 돈을 창의적 작업을 위한 필수적 요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예술가들에게 작업을 지원하는 스폰서가 필요하고 스폰서를 얻기 위해 작가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기업이나 재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 당연시한다. 예술과 돈의 관계는 이렇듯 어느 편에서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21세기의 청년예술가들이 예술과 돈 사이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인다. 하지만 예술과 돈의 경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화상은 예술과 돈 사이의 경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다. 미술평론가 김우정의 말처럼 화상은 예술과 돈 사이의 경계인으로서 이 둘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해 창조적 모색을 시도해 온 사람이다. 그들은 중간자가 아닌 또 하나의 삼자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나 워홀과 같은 유명 예술가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천문학적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사례는 미술의 경제적 가치를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예들이다. 김우정은 조이메디슨대학교의 경제학교수 타일러 코웬의 말을 빌어 “가장 예술적인 것이야말로 상업화되고 대중화되어야 하며, 예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그의 주장은 예술작품의 값을 말하는 차원을 넘어 예술을 통해 발생하는 예술문화사업의 창구효과에 주목하고 예술을 산업화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술이 가진 고유한 아우라를 상품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산업의 현실 앞에서 청년예술가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예술과 돈의 중계자들인 화상이나 기획사들과 결탁해야 할 것인가? 예술가들이 필요한 것은 중계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해 중계자들이 예술산업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훌륭한 예술가들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무목적적 목적이며 무가치의 가치 정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질은 성공적인 예술 산업의 절대 조건이기 때문이며 좋은 예술가들의 주변에는 훌륭한 중계자들이 모이게 마련이다.  


5) 예술정책에 대한 관심 : 정책이란 어떤 공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결정한 행동방침을 말한다. 어떤 목표와 그 목표의 실행을 위한 행동으로 구성되는 정책은 집단간의 타협과 조정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정책은 보통 법과 제도의 범주에서 다양한 행정 조직을 통해 수립하고 진행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술정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도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편제는 문화예술정책실 중심으로 재편되었는데 예술관련 업무는 문화예술정책실 산하의 예술정책과와 시각예술디자인과가 담당한다. 예술정책과의 주요업무는 문화예술위원회의 운영관리와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사업 등이 있다. 시각예술디자인과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지도감독과 미술은행 업무,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관련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예술가 지원정책과 연관된 미술은행, 대안공간, 미술시장, 레지던시, 미술관 건립, 미술제 등의 업무 대부분은 이곳의 소관이다. 예술정책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예술가가 그들의 예술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만한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른바 현대미술 지원정책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있다. 이러한 목표는 예술정책의 또 다른 주요 목표인 국민들의 문화향수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과 연동된다고 할 수 있다. 청년예술가 지원정책은 창작활동 뿐만 아니라 국제전과 레지던시 참가, 미술은행, 대안공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예술육성에 대한 국가적 책임이 증대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작가들이 국가정책과 예술지원에 대한 관심은 필수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III. 이상에서 우리는 예술종말론이 열어놓은 해방과 자유의 문턱에서 청년예술가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두서없이 살펴보았다. 이러한 단상은 이번 미술주간 학술행사의 주제인 명작은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토론을 위한 발제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경향과 태도는 이러한 논의를 위한 하나의 기준을 제공하였다. 아울러 최근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미술제 참여작가들의 작품경향과 미술관이 운영하는 레지던시 참여작가들의 작품경향 그리고 대안공간에서 기획한 전시회의 작품성향 등도 한국의 청년예술가 세대의 작품을 진단하는 대상으로 염두에 두었다. 작금에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취업과 실업을 둘러싼 위기상황이 청년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듯 예술의 위기상황은 청년예술가들에게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청년예술가들의 위기상황은  예술계 일반의 현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실일 뿐이다. 예술의 종말과 그에 따른 해방과 자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위기상황을 총체적 시각에서 설명하는 것을 넘어 다각적인 관점에서 검토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전통의 문제에서 미술정책에 이르는 논제들은 검토해야 할 다양한 주제들 중의 일부가 될 것이다. 예술가의 ‘행동’ 개념에 예술비평의 방점을 두는 해롤드 로젠버그의 주장처럼 좋은 예술은 개인의 사상과 행동의 혁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예술가의 독립적 행동들은 예술의 개념을 확장하고 문화의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거나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사회변혁의 단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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