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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우 / 중첩 이미지의 문화코드 : 향불 회화

김영호

이길우 / 중첩 이미지의 문화코드 : 향불 회화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하나의 화면에 두 개 이상의 이미지를 겹치는 영상기법은 일상에서 낯설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 광고에서 사용하는 오버랩(overlap) 기법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중첩 이미지는 복수의 공간을 드러내거나 다중적 시간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으로 쓰인다. 이미지를 겹쳐내는 기법은 영화뿐만 아니라 스틸사진의 영역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두 개의 화상을 겹쳐 인화하여 새로운 화면을 만드는 이중인화(superimpose) 기법이 그것이다. 오버랩이나 이중인화 기법은 특정 사물이나 사건을 복합적 시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로 인정되면서 시각언어의 의미구조를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화가 이길우는 2003년부터 중첩 이미지의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회화사에 있어서도 중첩 이미지 기법은 20세기 전반부터 몇몇 화가들에 의해 시도되어 왔다. 하지만 순수이념과 단일형식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길우의 화면형식이 최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시대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업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현실인식에 기반한 대중적 문화코드에 부응하고 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의 작업은 한국화의 향방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전통적 재료로서 한지와 수묵채색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차용과 혼성 그리고 다중성으로 대변되는 동시대의 시대감각을 반영하는 방법론의 개발이라는 점에서 국내외 미술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길우의 중첩 이미지 회화는 빛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성한 나뭇잎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빛의 경험은 작품에 다차원적 공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백색의 화선지를 태워 안과 밖의 공간을 서로 통하게 하는 그의 독자적인 조형방식은 흥미로운 문화코드를 만들어 내었다. 종이에 물감을 올리는 대신에 종이를 태우며 얻어낸 사멸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렇다. 화선지 앞에서 불을 머금은 향을 쥐고 한지 태우기에 집중하는 작가의 모습은 그린다는 행위를 넘어 구도자를 연상케 한다. 작은 불꽃을 일으키며 타버린 자리에는 빈 공간이 자리 잡고 이 작은 구멍들의 집합은 인쇄된 망점을 대신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미지는 어느덧 인물이 되고 풍경이 된다. 향불이 만들어낸 구멍과 그을린 둘레의 표정은 모니터의 픽셀처럼 화면에 형상을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라지게 함으로써 얻어내는 이미지의 역설적 원리는 이길우의 향불작업이 태동시킨 새로운 문화코드라 할 수 있다. 


이길우의 작품을 둘러싼 문화코드는 중첩의 구조에서 실체가 드러난다. 인물과 산수풍경이라는 소재의 중첩뿐만이 아니라 시간대와 공간대가 다른 두 개의 요소가 만들어내는 중첩의 구조가 그것이다. 신윤복의 민속화와 햄버거 아이콘인 맥도널드 이미지, 혹은 한복 차림을 한 조선 여인의 모습과 팝문화의 아이콘으로써 마릴린 이미지의 중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길우의 문화코드가 차용과 혼성 그리고 다중성의 미학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는 사연이다. 그의 작품 안에서 두 개의 이미지는 충돌의 차원을 넘어 공생한다. 향불로 생겨난 구멍의 집합은 안과 밖을 연결하며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움이 채움이 되고 공이 색이 되는 이치를 조형적 언어로써 증명해 보이는 것이 이길우가 시도하는 중첩의 구조다. 향불로 태워낸 점이 선이되며 이윽고 형상이 되는 작가의 화면위에서 비워진 점들은 배접된 화면의 안과 밖을 서로 통하게 하여 바탕의 색을 드러내거나 형상을 숨기면서 제삼의 시선을 만들어 낸다. 그의 향불작업은 시간과 공간의 다중성으로, 그리고 동과 서의 융합으로,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으로 보는 이들을 이끌고 있다. 




이길우, 들리는풍경01503, 2015, 순지에향불, 장지에채색, 배접, 코팅, 45X88cm


이번 개인전에서 이길우는 문자를 배열한 노란 색면 위에 향불로 묘사한 풍경 이미지를 오버랩 시킨 작품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들리는 풍경>으로 제명을 붙인 이 작품 시리즈에는 “ㅁ ㅓ ㅁ ㅊ ㅜ ㅇ ㅓ ㅅ ㅓ ㄴ ㅈ ㅏ ㄹ ㅣ ㅂ ㅏ ㄹ ㅏ ㅁ ㅂ ㅜ ㄹ ㅇ ㅓ ㅍ ㅜ ㅇ ㄱ ㅕ ㅇ ㅇ ㅡ ㄹ ㄷ ㅡ ㄹ ㄹ l ㄱ ㅔ ㅎ ㅏ ㄴ ㄷ ㅏ”라는 한글 자음과 모음이 화면전체를 덮고 있다. “멈추어 선 자리 바람 불어 풍경을 들리게 한다” 라는 자신의 시어를 반복해 적은 것이다. 이 문장 외에도 “사라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유용한 존재이고 그것은 자연이다”라는 글귀를 읽어낼 수 있다. 2014년에 처음 시도한 이래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는 문자와 풍경 이미지의 조합은 그의 오버랩 작업을 또 다른 기호의 체계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색을 던지다>는 얼굴을 배경으로 삼아 화려한 색채의 나비떼를 오버랩 시킨 작품이다. 화면을 비행하는 형형색색의 나비들은 장자의 꿈을 나타내는 환상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정작 이 시리즈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형언어로써 색채에 대한 유희적 관심이다. 장지의 바탕에 자리한 추상적 패턴의 색면은 구멍이 뚫린 순지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솟아올라 채도의 대비를 일으킨다. 최소화된 얼굴의 형상이나 다양한 운율을 머금은 선적 리듬의 나비들은 작가의 순수형태로 환원된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 작품이 미적 무관심성의 서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화면에 내러티브의 맥락을 최소화 시키고 있는 작가의 의도가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서사구조가 사라진 화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색을 머금은 색점들이다. 거기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의 절묘한 융합이 존재한다.        




이길우, 소멸된생성1501, 2015, 순지에향불, 장지에채색, 배접, 코팅, 55X150cm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또 하나의 파격은 구겨진 잡지와 풍경 이미지의 이중화면을 이루고 있는 <소멸된 생성>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의 조형형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면 위에 겹쳐진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 맺어진 유기적 관계성은 제목처럼 역설적이다. 인공으로 만들어 낸 종이의 구김은 배경에 자리한 바위산의 주름과 동일화 되면서 절묘한 미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작가는 소멸과 생성의 경계에 서서 구겨진 종이와 자연풍경의 역설적 결합을 시도하려는 것일까. 향불미학을 도구로 삼아 중첩 이미지의 화면을 일구어 온 지 10여년. 이길우의 작품은 이제 무념 무상한 중도의 세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과 내용이 파격적이면서도 상호 균형을 이루는 지점, 서사구조와 순수조형이 아이러니하게 일치되는 세계로의 진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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