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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준 / ‘정처 없는 여정’ 25년의 결실

김영호

양규준 / ‘정처 없는 여정’ 25년의 결실 


김영호 (미술평론가)


60 간지(干支)의 인생 노정을 한 바퀴 돌아 자연 앞에 선 화가는 말한다. '나의 회화세계는 다른 것 아우르는 혼성의 드러냄이다'.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자라고 서울에서 그림공부를 했으며 남태평양의 섬 뉴질랜드를 거쳐 경기도 안성 미리내의 빛 좋은 언덕에 둥지를 틀기 까지의 60 성상(星霜)을 결산하는 말이다. 학업을 마치고 첫 개인전을 연 1990년을 시점으로 삼는다면 화가로서 25년의 화업이 구축한 예술세계일 것이다. 


양규준의 혼성적 회화세계에 깊이 공감하는 것은 그의 사변적 성품과 삶의 치열함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세계는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이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돌이켜 보면 1990년 이전의 한국미술은 크게 모더니즘 계열과 신형상 계열로 양분되어 있었다. 소위 회화의 순수성과 실험성에 무게를 둔 모더니즘과 이에 맞서 세계적으로 등장한 신형상 미술이 화단의 주류로 부상하던 시절. 그는 이 두 개의 현실에 대응하며 청년화가로서 제3의 미술을 찾아 새로운 모색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양규준이 첫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품경향은 작가의 최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그는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동화되지 않았고 현실 탐구의 집단과도 멀리한 채 평면회화의 실험에 몰두했다. 당시 그가 찾은 세계는 '심상이 가미된 자연 풍경'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운무에 쌓인 산봉우리가 원경으로 펼쳐진 장대한 공간을 배경삼아 홀로 서있는 한그루의 노송을 그린 연작이었다. 갑골처럼 거친 노송의 껍질과 부채모양으로 펼쳐진 잎사귀는 신비의 광휘로 물들고 그 주변에는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환상적 풍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심산 송월도를 연상케 하는 유화 시리즈에 작가는 ‘대지로 부터’라는 제명을 붙였다. 

양규준이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는 신형상 미술이 다양한 양상들로 정착되기를 기대해 볼 만한 시기였다. 국전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형상성을 내세우는 민전시대가 나름의 성과를 거두면서 서구의 영향을 받은 극사실주의 경향이 집단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양규준의 조형실험은 단색화나 민중미술 그리고 하이퍼 리얼리즘과도 거리를 둔 채 대지와 자연에 자신의 존재를 투영한 독자적인 환영적 풍경을 일구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집단적 이념과 파벌로 짜여 있던 국내 화단은 자신의 개성을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생각한 것일까. 그는 1997년 뉴질랜드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남태평양의 섬나라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제공해 주었다.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이방인의 삶 15년은 자신의 내면을 찾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생각들이 뒤범벅이 된 터널’을 걷던 혼돈의 시기는 그에게 치열한 예술적 성찰의 시기이기도 했다. 뉴질랜드 북쪽의 어느 숲속에서 한 여름을 보내면서 얻은 경험은 평범한 것이면서도 자신의 노정에 소중한 지표를 제공했다. 작은 존재자로서 자아의 발견이었다. 새들의 지저귐, 물에 투영된 숲의 그림자, 바람에 이는 잔잔한 물결과 숲의 속삭임들은 그에게 자연을 느끼게 하고 자아의 실존적 존재감을 허락해 주었다. 


“남태평양 섬 북단의 외부와 단절된 숲 속은 고요하다. 이곳은 헨리 루소의 원시림인가? 폴 고갱이 이상적인 삶을 꿈꾸며 찾았던 타이티섬의 풍경이 이러 했을까? 이따금씩 산비둘기의 빈 날갯짓이 숲의 정적을 깨뜨린다. 여기가 어디 인가 (…) 시간과 공간의 벽은 이미 허물어지고, 여러 생각들이 뒤범벅이 되어 간다.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사라지는 기억들의 잔해에 문득 알 수 없는 슬픔이 왈깍 몰려온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어슴푸레 어둠을 뚫고 숲을 빠져나올 때 나는 느꼈다. 자연의 생명감으로 가득한 신비로운 숲을 가로지르고 있는 나의 작은 존재를.”


방황과 사색의 긴 시간을 돌아 화가가 찾은 세계는 1990년대 첫 개인전에서 보여준 환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나무, 산, 강, 해, 달과 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다시 화폭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가가 다시 찾은 세계는 전과 다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구체적 형상에 이입되었던 시선은 어느덧 추상적 형상으로 바뀌고 대상의 사실적 묘사는 그린다는 행위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하여 찾은 세계가 바로 칼리그래피다. 





캔버스는 산과 강 그리고 해와 달의 에너지로 채워지고 은하수 혹은 우주의 빛줄기는 일필의 획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연과 자아 두 개의 세계가 융합된 화가의 캔버스에는 시간과 공간이 녹아있으며 좌와 우가 융합하고 음과 양이 서로 통하는 풍경이 등장하게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중용(moderation)'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나'라는 작은 존재의 발견은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예술적 노정에 확신을 주었고 뉴질랜드 화단은 그의 작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2년 양규준은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정처 없는 여정이 ‘형상의 굴레를 벗어나 순수정신이 농축된 의식의 집적'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면서 이제 정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양규준의 칼리그래피 근작에서 유기적 형태의 노송을 본다. 아니면 신비의 에너지를 품은 흑룡의 모습이거나 태양에 바래고 월광에 물들며 오랜 시간을 지켜온 매화고목도 보인다. 그도 아니면 작가의 말대로 자신의 미리내 작업실을 찾아와 마주보며 담소를 나누는 벗들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캔버스 화폭에 자리잡은 칼리그래피의 추상 이미지는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들이다. 60 간지의 인생 노정을 한바퀴 돌아 자연 앞에 선 화가는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하다. 존재하는 것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것들 사이의 관계를 혼성으로 드러내는 그의 작업은 이제 미래를 위한 설래임으로 가득 차 있다.(2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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