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전미경 / 달빛에 바치는 헌사

김영호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

2005년 첫 개인전 이후 10년 넘게 마른풀과 씨앗 그리고 나무껍질을 매체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가 이번 6회 개인전을 위해 꺼낸 화두는 달빛이다. 달빛은 동서고금의 무수한 시인과 음악가 그리고 화가들의 창조적 영감을 자극해 왔다. 낭만과 환상의 서정을 자아내는 달의 마력은 지역에 따라 수많은 명작을 낳은 원인이기도 했다. 전미경이 꺼낸 화두로서 달빛은 이러한 역사 속에서 신화의 코드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달빛이 작가의 화폭 위에서 신화가 되는 사연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작품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0년간의 작업노정을 보면 전미경의 작품세계는 자연이라는 일관된 영역 위에 세워져  있었다. 자연물을 매개로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자연과 소통하면서 체험한 세계를 조형언어로 번안하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의 재료로서 풀꽃을 채집하고 건조하는데 바친 시간과 열정은 예사롭지가 않다. ‘행복한 일상’으로 자리 잡은 여행과 탐색의 과정에서 그가 쓴 채집일기는 연구서가 되어 세권의 전문서적으로 출간되었다. 계절에 맞추어 피는 다양한 풀꽃들과의 만남이 작가의 예술적 성취로 이어졌으니 일상적 삶이 곧 예술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작가의 작품에서 일련의 문학성이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전미경의 예술이 지닌 개성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된다. 화면 위에 마른풀과 씨앗을 고정시키고 항구적으로 고착시키는 장치로서 ‘공기추출기법’이 그것이다. 화면 위에 콜라주한 자작나무 껍질과 포도넝쿨 그리고 코스모스 씨앗이 서로를 끌어안고 회화적 뉘앙스를 품게되는 것은 바로 공기추출에 의한 재료들 사이의 밀착효과 때문이다. 건조된 자연물은 유리판과 알루미늄 종이사이에 진공상태로 저장되며, 이 공정에 담긴 작가의 정성은 작품의 보존성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풀꽃들이 작가의 화면에서 신화적 기호와 상징으로 전치되는 배경에는 그에 부합하는 독특한 기술적 장치가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지난 개인전 이후 작업한 신작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달빛의 다양한 변주를 시리즈로 표현한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체험한 달빛의 서정을 달빛신화, 달빛사색, 달빛예찬, 달빛유희, 그리고 달빛연서라는 다섯 묶음으로 세분하여 놓았다. 이 모든 연작들은 물론 나무껍질, 씨앗, 덩굴손과 같은 자연물로부터 온 것이다. 빛의 물리적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금박이나 약간의 물감을 추가로 사용한 실험적 작품도 눈에 띈다. 달에 대한 체험이 개인적 감성과 추억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음에 인정한다면 그의 작품은 지극히 주관적 서정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달빛을 표상하는 작가의 조형방식에서 감정이입이나 추상충동과 같은 예술창조의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우선 ‘달빛신화’는 두 개의 시리즈로 되어 있다. 각각의 시리즈는 25개의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두 시리즈 사이의 감흥은 제각기 달리 나타난다. 우선 건조한 포도나무 껍질을 가로로 배열한 작품 시리즈는 재료의 물성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화면에 겹치고 펼쳐진 포도나무 껍질의 질료적 속성은 달빛 아래 펼쳐진 산야 혹은 바다 풍경을 암시한다. 작가는 이러한 바탕 공간의 중심에 덩굴을 얹혀 보름달의 표정을 다양하게 연출해 놓았다. 한편 건조한 자작나무 껍질을 화면의 바탕으로 배열해 놓은 작품 시리즈는 또 다른 서정성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는 구름이 흐르는 창공을 배경으로 떠 있는 달의 양태를 나타낸 것이다. 금박으로 처리된 달은 정확히 화면의 중앙에 배치되어 조형을 위한 작가의 의도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론 작가가 표상하려는 것은 달빛에 비추어진 자연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심상에 투사된 달빛의 서정성이다. 


  



‘달빛사색’ 시리즈는 달에 대한 작가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대형 화면의 중심에 자리잡은 보름달은 시골집 마당에서 올려다보며 명상에 잠기던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온 것이라 한다. 달빛사색 시리즈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코스모스 씨앗이 만들어내는 선율이다. 그것은 차오른 달의 기운이자 세상을 밝히는 달빛의 파장일 것이다. 아니면 초여름 남쪽에서 날아와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시각을 달리하면 그것은 달에 비추어진 나룻배 혹은 의자 하나 혹은 쌍을 이루는 물고기와 학의 형상을 신화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전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빛예찬’은 달의 광휘를 좀 더 구체적인 형상과 색채로 표현한 경우다. 파스텔 톤의 색깔을 사용해 아카데믹하면서도 물성의 서정성을 대비적으로 강조하여 압화 영역에서의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달빛유희’는 이전부터 실험해 왔던 작가 자신의 고유한 패턴을 보여준다. 자작나무 껍질을 배경으로 콜라주하고 그 위에 곤충이나 탑파 따위를 배치해 상상의 풍경을 만드는 것이다. ‘달빛연서’는 말 그대로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에게 보내는 찬미의 메시지이거나 풀벌레 따위의 생명 있는 미물들에 대한 경의의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새의 형상에 자신을 이입시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빛은 스스로 신화가 되지 않는다. 달빛이 신화가 되는 것은 그것에 빛을 제공하는 태양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시인과 음악가와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이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듯이 달빛의 신화는 태양의 역사로부터 온 것이었다. 태양빛 아래에서 노동과 투쟁의 시간을 가져온 인간은 달빛 아래에서 비로소 휴식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전미경의 경우 자신이 구현하려는 유희와 사랑의 신화는 합리와 교양의 삶이 낳은 결실이었다. 그의 달빛 연작에서 해질녘에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 부엉이의 신화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지혜란 역사와 신화가 함께 어우러져 생기는 산물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2015.2)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