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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현 / 물의 유희와 정신

김영호




김영호 (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문승현은 한국 수채화의 영역에서 하나의 정점에 서 있다. 최근 국내의 대표적 미술대전들이 그에게 연속해 안겨준 대상과 최고상은 지나온 인고의 삶에 대한 보상이자 공모전의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라는 졸업장으로 생각된다. 이제 작가로서 문승현은 기존의 성과를 뒤로하고 다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예술의 제로지점에 서 있다. 작가가 자신이 처한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음은 그의 결연한 작업태도에서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번 개인전은 최근 2년간의 결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으로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도 전과 다른 성과를 보여준다.   


문승현이 첫 개인전 이후 10년 넘게 천착해온 매체로써 수채는 작가에게 체화된 물질로 여겨진다. 그에 있어 수채화는 더 이상 특수한 재료도 기법도 아니며 오래된 망치나 드라이버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문승현에게 나타나는 작업태도의 변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도구로써 수채의 물성 자체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 태도도 유희적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재료나 기법의 차원을 넘어 물질로서의 수채를 대하고 그 성질과 물성을 몸과 머리로 즐기고 있다. 문승현에 있어 수채의 물성이 유희적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곁에 두고 사용하고 경험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체화해 온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승현의 작품에서 수채가 지닌 물성 자체의 유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물과 색에 대한 사유이자 물감이 지닌 빛깔과 윤기 그리고 광택이나 질감을 즐기는 일이다. 수채화의 비밀이란 물감의 물성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미디엄으로서 물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수채물감은 물을 만남으로써 빛깔을 드러내며 종이와 다채로운 어울림 속에 다양한 무늬를 지닌 형상으로 표현된다. 문승현은 수채화에서 유화나 아크릴화에서 표현할 수 없는 유기적 세계를 즉자적으로 체험하며 그 안에서 우연의 법칙을 따르는 자신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 나간다. 종이위에 고착되어 굳어버린 물감은 물의 침입으로 다시 용해된다. 물성에 대한 유희의 과정을 통해 화면에서 발견되는 시간은 중첩된 시간이 아니라 해체된 시간이다.  


문승현은 수채의 물성과 유희를 위해 시냇가 풍경 이미지를 화폭에 도입하고 있다. 최근의 작업에는 그동안 고수해 오던 풍경의 사실적 묘사가 평면적 추상적 이미지로 점차 대체되고 있으며, 바닥에 펼쳐놓은 거대한 화면은 시냇가의 현상을 드러내지만 이제 물에 잠긴 바위나 수면의 묘사를 위한 노력은 최소화되었다. 그 대신 작가는 화면의 주변을 맴돌면서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물의 표면의 굴곡을 조절하면서 일련의 퍼포먼스를 벌이며 몸짓이 만들어내는 물감의 미세한 자취를 즐긴다. 시각을 달리해 보면 문승현이 고수하고 있는 것은 시냇가 풍경의 외관이 아니라 물과 바위의 표정이며 그것의 물성이며 행위가 남긴 흔적들이다.     

문승현에 있어 수채의 물성에 대한 유희는 물에 관한 체험적 사유로 이어진다. 수채라는 재료와 시냇물이라는 풍경의 만남은 화면을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재료와 소재의 융합이랄까. 형식과 내용사이의 균형이 그의 작업을 모더니즘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요인이다. 수채물감이 드러내는 빛깔과 윤기 그리고 광택이나 질감은 바위가 있는 시냇물의 표정과 오버랩 되면서 자연의 배후에 숨겨진 어떤 비밀을 찾아 나서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물의 유기적 속성은 수채의 물성을 통해 최적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작가는 이 놀라운 현상을 돕는 최소한의 조력자가 된다. 녹이고 이동하고 뒤섞이고 변태하는 수채물감의 속성은 물의 이름으로 바위 표면에 뚫린 동공과 그 표면에 덮힌 이끼와 둥글게 깎인 형상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전해준다.




       
문승현의 수채화는 물의 정신을 드러낸다. 수채물감이라는 질료의 물성이 제공하는 유희와 체감적 사유의 결과로 태어난 정신이다. 그리고 물의 정신을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자연과 물질의 현상 세계를 벗어나 화폭이라는 또 하나의 물화된 현실이 된다. 캔버스를 지지체로 삼아 덧붙여진 종이위의 리얼리티 세계다. 작가의 작업실 바닥에서 완성된 시냇물 풍경은 전시장으로 옮겨지면서 관람객의 시각을 일루전의 영역으로 전환시킨다. 수평의 세계에서 완성된 그림이 수직의 벽면에 걸리면서 나타나는 신비로운 세계. 문승현의 근작들은 물의 유희와 정신을 품은 또 하나의 현실을 지향하고 있다.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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