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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수 / The Bloom : 빛의 구조와 정신

김영호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화가 박현수가 10년 이상을 천착하고 있는 세계는 빛이다. 화면에 빛을 표현한다는 것은 광휘의 인상을 색이나 명암으로 나타냄을 의미한다. 색은 빛의 자극에 의해 생기는 감각현상, 즉 빛의 반영이기 때문에 빛과 색의 관계는 불가분적이다. 그런데 색을 사용하는 작가 모두가 빛을 구현한다 할 수는 없으므로 박현수가 시도하는 빛의 예술은 나름의 형식개념을 필요로 한다. 그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나는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형식을 빛의 구조와 정신이라는 개념으로 설정한 바 있다. 이른바 캔버스에 칠해진 색면의 층위나 파편화된 형상들의 배열 구조를 통해 빛의 세계를 연출해 내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자연의 빛이 평면의 색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형식과 상징이 곧 빛의 구조와 정신이라 부를 수 있다. 


박현수가 빛 작업을 시작한 이래 그의 작품을 분석하는 평문들은 대개 화면의 구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평론가 오광수 선생은 구조로서의 평면성에 주목하여, 그것이 이중적 대비를 넘어선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그 빛의 구조는 시원과 광휘의 공간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속에 잠겨드는 운하의 깊은 침잠이 있는가하면 화석처럼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이미지의 파편들이 폭발한다.” 평론가 고충환의 경우 역시 뿌리기와 덮기와 캐내기의 프로세스에 주목하여, 그 결과로 구축된 화면위의 다층적 구조에 대해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부유하는 뼛조각 같은 비정형의 얼룩이거나, 우주를 떠도는 운석, 별들이 충돌하면서 생긴 파편, 핵폭발을 통해 최초의 별이 태어나는 순간, 우주가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블랙홀이거나 화이트홀’ 따위의 환상이다.



박현수, 2010, Single-Circle-Y, Oil on Canvas, 122x122cm



이번 우종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지난 10여 년간의 빛 작업을 망라하고 있다. 미술관 측이 전시회의 제명으로 붙인 ‘The Bloom’은 그의 작품 성과를 함축하는 용어로 적절해 보인다. 꽃이 만발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자 빛의 예술 10년을 통해 절정기에 접어든 작가의 예술적 성과를 암시하는 의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동안 우리의 현대추상미술 영역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것이 형상을 위한 손의 기능과 추상의 서사적 해석 가능성이었다면 그의 작업은 이들을 회복하는 차원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물감을 다루는 기술이나 표면이 굳기를 기다려 고무칼로 기호와 같은 형상을 떠내는 순발력 그리고 농익은 칼라에서 오는 환상적 공간감은 거대한 작품의 규모와 더불어 감탄을 부르는 요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박현수의 조형행위는 캔버스에 물감을 드리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번지고, 밀어내고, 섞이고, 뒤덮고, 스며들고, 흐르고, 건조되는 물감의 생리현상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려한 색채의 충돌과 융합이 에너지를 품은 바탕으로 고착되고 완전히 건조되었을 때 다시 캔버스 전면에 물감을 얹힘으로써 복합적인 층위를 만드는 것이다. 폼페이 전체를 뒤덮은 베수비오의 화산재처럼 두꺼운 물감층은 강한 물성과 더불어 어떤 기억을 지닌 평면으로 변모하니 이제 두 번째의 단계가 마무리 된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로 접어들면 작가는 반쯤 건조한 물감의 표층을 고무칼로 걷어내면서 다양한 형상을 만들어 낸다. 집중과 긴장 속에 발굴과 탐험의 시간이 흐르면서 새겨진 이미지의 파편들은 다시 색채로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들은 이내 기호가 되어 역사와 우주와 생명으로 향한 길을 열어준다. 이른바 색으로 전환된 빛의 구조 속에서 달걀형의 청동향로와 그 주변에 피어나는 광휘가 모습을 드러내며 나아가 별빛으로 가득한 우주공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도상의 해석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색면 구조에서 야기된 빛의 환영에서 온 것이다. 박현수의 그림은 평면회화가 할 수 있는 온갖 실험을 거치며 탄생한 것이며 물감의 지층을 통해 정신성이 발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예술세계는 Bloom의 시절을 맞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현수, 2009, Circle-Single01, 73x61, Oil on Canvas



박현수가 10여년에 걸쳐 실험해 온 작업은 몇 개의 시리즈로 구분된다. 초기작업인 <커뮤니케이션>을 서두로 <리듬>, 
<서어클>, <바디>로 이어지는 그의 연작은 방법적인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저마다 고유한 세계를 드러낸다. 우선 대문자 C로 표시되는 <커뮤니케이션> 시리즈는 두 개의 층위와 그 사이에 형성된 관계성에 주목하는 형식개념으로 완성된 것들이다. <리듬>은 원형의 창문 구조를 반복적으로 배열한 가운데 원의 내부에 수평 혹은 수직의 빛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서어클>의 시기로 들어오면 원형이나 타원형의 색면을 배경으로 무중력의 공간을 부유하는 다양한 기호의 파편을 배치한 것이다. 이 모든 평면작업 시리즈 외에도 종이를 이용한 설치작업을 통해 그림자와 빛의 조형을 3차원적 공간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예술의 노정에 어디 완성이 있으랴. 아직도 그에게 남아 있는 과제도 적지 않을 것이다. 대중적 취향에 기인한 장식의 작위성을 훌쩍 벗어버리는 일이 그것이며, 화면을 좀 더 비워냄으로써 시원의 정신성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데 몰입해야 한다는 우호적 비평가들의 기대도 있을 것이다. 박현수에 있어 주변 지인들의 이러한 주문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세계가 아직도 다채로운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태로 남아 있음을 반증한다. 무릇 열린 구조를 지닌 것이 예술의 본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박현수의 작업에 부과된 기대감은 마땅한 것이다. 빛의 예술 10년을 결산하는 이번 우종미술관 전시 이후에 작가가 어느 향방으로 실험의 키를 세울지 사뭇 주목된다.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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