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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희 / 비워낸 새벽풍경의 메타포

김영호





김영호 (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강승희의 판화는 빈 배, 빈 산, 빈 들녘 그리고 고요히 흐르는 강의 수면위로 찾아오는 새벽의 서정을 담아낸다. 근작 대부분은 자신이 정주해 살고 있는 한강하류의 김포평야 주변 풍경이다. 그의 판화에 담긴 시정(詩情)은 이렇게 투박한 시골길을 거닐며 경험한 여유로운 풍경으로부터 온 것이다. 안개에 쌓인 새벽의 숲과 강에는 인적이 없다. 자작나무 사이로 대지는 아직도 가시지 않는 어둠으로 덮혀 있으나 하늘은 순백의 여백으로 밝아온다. 강승희의 판화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화면위에 순수한 새벽의 서정을 표현하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화면에서 걷어내 버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심상으로 걸러낸 비어있는 풍경이다.  





판화가 강승희가 구현하는 빈 공간에는 에너지가 넘친다. 비어있으나 상념과 환상과 기억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다. 새벽의 풍경에는 지난밤 수로에서 야영하던 낚시꾼들의 웅성거림으로 채워져 있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의해 슬며시 증발해 버릴 물안개로 채워져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강물에 떠 있는 빈 배 한척은 사공이 남긴 노동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 강승희의 판화는 어느덧 시정의 세계를 넘어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선불교의 세계와 줄이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비워진 것은 채워짐을 전제한 개념일 뿐이며 그래서 우리는 비어 있음에서 큰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강승희가 실행하는 비움의 미학은 독자적인 드라이포인트 기법의 수용 이래 한층 심화되고 있다. 동양적 명상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기법이 숙성되고 형식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 작가는 자신이 제작한 판화용 니들을 실험하면서 동판화에 회화성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강철로 만든 새로운 니들은 판면의 고랑을 깊게 일구어 선과 면의 질감을 과거와 달리 특수하게 표현하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찍어낸 화면에 강직하지만 동시에 수묵의 화필이 특성인 번짐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부식판화가 지닌 날카로운 금속성의 선에 부드러움이 더해져 특수한 서정의 세계를 표현할 있게 된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새로운 기법의 발견은 자신의 판화인생을 새롭게 펼치는데 동기를 부여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판화세계는 시적 서정과 명상적 체험의 세계로 안내하는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강승희, 새벽-21230, 2012, 드라이포인트, 60×90cm


강승희의 판화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해 주는 기법은 하나 더 있다. 제판 과정에서 동판위에 직접 질산용액을 칠해 특수효과를 만들게 하는 이른바 노출부식(Spit bite)이 그것이다. 판위에 직접 흘리거나 붓질을 통해 올려진 질산액은 판면에 미세한 요철을 만들어내며 그 결과로 찍어낸 이미지는 마치 화선지 위에 덧칠된 붓자욱 처럼 부드럽고 세밀한 명암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렇듯 강승의의 동판화는 드라이포인트와 노출부식 기법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에 따라 전통 수묵화에서 찾을 수 있는 발묵효과를 드러내며 시적 서정성을 강화하게 되었다. 강승희의 고유한 기법은 25년 이상의 판화인생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를 형식개념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실험의 결과였다. 이후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담보하는 형식논리의 개발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강승희의 예술적 역량은 강렬하고 단순한 구도로 화면을 분할하는 작가의 조형능력에서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순수한 색면추상 회화에서 발견되는 구조적 질서감을 지니고 있다. 이전의 도시풍경 시리즈에서 적용했던 수직과 수평의 구조는 최근의 자연풍경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인 조형요소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강승희의 동판화는 동양의 자연관에 기반을 둔 명상적인 세계와 더불어, 간결한 볼륨과 형태로 구성된 순수조형의 세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강승희의 판화가 전통적인 부식동판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감흥을 보는 이에게 선사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조형 형식이 지닌 독자성은, 세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의 원형적 구조에 대한 탐구의 결과이자 풍경의 너머에 자리한 이상 세계를 표상하려는 작가의 의욕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강승희의 판화에서 주목할 것은 비움의 미학에 담긴 진정성, 즉 리얼리티에 관한 것이다. 그에 있어 판화는 곧 삶이며 주변의 풍경에서 얻은 이미지는 곧바로 자신의 판화세계로 들어와 박힌다. 김포작업실의 사각 창문 너머로 펼쳐진 자연공간은 그의 판화 속 풍경을 닮아 있다. 추수를 마치고 비어있는 벌판, 한적한 하늘, 그리고 자작나무 숲은 변하는 계절을 보여주는 전령사들에 다름 아니다. 강승희의 김포작업실은 세상을 바라보는 전망대이며 그 안에서 그는 파수꾼이 되어 순환하는 계절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원형적 세계을 탐구한다. 그의 판화는 삶의 기록이며 기억의 저장고라 할 수 있다. 


강승희는 천성적으로 고독을 잘 타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데 고독이란 비움의 상태이자 채움을 갈망하는 역설의 감정이라 수 있다면 적당한 고독감이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예술가들에게 고독의 서정은 단순한 욕망 충족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절대 세계에 대한 본능적 향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승희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고독을 아는 사나이라는 점과 그의 예술관이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닌 초월적 세계를 향한 갈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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