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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언 / 화산섬의 바람소리를 그리다

김영호





김영호(미술평론가, 미술사가)



제주 미술사에는 추사 김정희가 등장한다. 조선말기의 실학자로서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서화가로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이다. 추사가 바람의 땅에서 탄생시킨 추사체와 세한도는 한국 미술계의 귀한 결실로 공인되어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추사의 서화에서 제주 자연의 배면에 존재하는 어떤 법식(法式)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다고 여긴다. 서투른듯 하면서도 맑고 고아한 졸박청고(拙樸淸高)의 미감은 추사가 타고난 천품이 유배지의 거친 바람에 의해 숙성되며 도달한 경지였다는 것. 나아가 그것은 자연에 대응하며 겪은 인고의 세월이 이념미로 표출된 성취라는 주장이다. 일정한 법도에 구애되지 않는 법도를 지닌 추사의 서화양식이 제주 자연이 남긴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추사 이래 제주화단에서의 문인화 전통은 오랫동안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대상의 외형보다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남종화의 화풍이 대체로 관념과 추상의 세계로 안주하여 현실과 역사를 외면하는 경향으로 치부되어 온 탓이다. 유배 선비가 보인 엘리트적 화풍이 척박한 제주의 문화적 토양에 수용되기까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최근 제주의 자연환경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이 증대되면서 이 화산섬의 풍광과 역사를 심의적 표현의 어법으로 구현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 이는 문인화의 화론이 동시대의 미술문화 맥락을 연계하며 미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강부언은 기법보다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화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추사의 맥을 잇는 작가의 한사람이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을 소재로 삼아 그 풍경을 화폭에 드러내면서도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성을 드러내는데 관심을 보인다. 이 때 화폭 위에 구현된 형상들은 제주 풍광을 구성하는 뼈대와 그 안에 담긴 기운이며, 나아가 졸박청고의 미감은 독자적인 차원의 양식으로 정착되고 있다. 이른바 강부언의 그림이라 말할 수 있는 그만의 화풍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20년 넘게 제주에 터를 정해 섬의 오름을 탐방하고 해안에 산재해 있는 해송 군락과 돌담을 답사하며 끌어올린 치열한 탐사의 결실이다. 아울러 삼다와 삼무로 대변되는 제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과거의 풍경을 이미지로 복원하는 역사화 작업에서 얻은 학습의 결실이기도 하다.   


화산섬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미술수업을 받고 다시 전격 귀향해 작가로서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그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에 제주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지면서 내려와 줄곧 제주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의 활동반경은 제주의 울타리를 넘어 일본, 중국, 터키, 독일 등 국제무대로 확대되고 있으나 그의 작품에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일관되게 제주의 자연이다. 최근 자신의 작업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을 수줍게 자부하는 강부언은 깐깐하나 강직한 선비적 기질로 인해 도전을 계속하려 한다. 이번 공화랑에서의 개인전은 독일 중부의 도시 라이프치히에 작업실을 구해 체류를 위한 도독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2009년 개인전의 서문을 통해 나는 강부언의 화력이 제주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힘주어 밝힌바 있다. 작가는 제주의 거친 풍광과 그 안을 살아가는 미물들의 존재를 그림으로 표상해 왔다는 것이다. 







강부언은 자연의 소리를 감지하고 그 소리를 화면에 표상한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소리가 이미지로 드러난 것이다. 그 소리란 한라산 오백장군의 바위절벽을 거쳐 화산섬 전체에 퍼진 오름의 골골을 흩어 쓸어내린 바람의 소리이며, 파도를 키워 세우는 바람의 소리다. 바람의 길목에 자리한 돌담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천개의 공명대를 지닌 관악기가 되며 해송의 가지에 켜켜히 세워진 솔잎들은 천개의 선율을 발산하는 현악기가 되어 자연의 음율을 토해낸다. 이러한 바람은 강부언의 화폭에 가시화 되면서 새로운 의미로 변주되고 있다. 화폭의 표면을 지나는 거친 싸리 붓은 오선을 남기고 그가 뿌린 먹점들은 다양한 높이를 지닌 음표가 되어 자연의 장대한 선율을 드러낸다. 강부언이 표상하는 바람 소리는 생명의 소리이자 영겁의 시간 속에 형성된 역사의 소리가 되기를 지향한다. 관념이 실존이 되는 순간이 강부언이 서있는 지점이다.      

        

나는 작가의 그림에서 서리가 내려앉은 마당을 쓰는 도승의 비질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를 빌자면 그 소리는 싸리로 조형된 그의 붓이 광목의 표면에 스치는 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20년 이상을 바쳐온 수련의 소리이며 방황과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세워진 정신의 소리다. 강부언의 화폭에 저장된 소리를 사의(寫意) 혹은 전신(傳神)의 소리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상의 외관을 모사하는 일에 국한하지 않고 자연을 관조하고 심상으로 전치시켜 표현하는 행위는 추사 김정희가 160여년 전에 일구었던 화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주관적인 감흥의 체험은 화산섬에 동거해 온 민초들의 역사와 조우함으로서 새로운 비평안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지닌다.     


강부언의 작품에는 자연과 자연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주거공간으로서 초가와 돌담이 있다. 바다와 오름 그리고 석양에 물들은 하늘 역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환경으로서 별개의 대상이 아니다. 작가는 제주의 풍광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곳을 터로 삼아 뿌리를 이어온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외형에서 벗어나 화폭에 조형되는 과정에서 이미지는 다시 순수형태로 환원되고 관념의 영역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결국 강부언이 표상하는 세계는 자연의 외형을 넘어서 존재하는 원형의 세계이자 그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다. 


강부언의 예술은 추사의 정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강부언은 남종화 계열의 화가들이 빠지기 쉬운 관념의 덫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시대에 대한 치열한 성찰의 태도를 동시에 견지하고 있다. 우리가 강부언의 작품을 과연 추사 양식의 현대적 발현이라 부를 수 있을지 좀 더 숙고해 볼 일이다.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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