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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의 극사실 회화

김영호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


I. 프롤로그 

T.S. 엘리엇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라는 글에서 비평의 원칙으로 제시한 ‘대조와 비교의 방식’은 비단 작가연구를 넘어 특정 미술경향의 연구를 위한 방법론으로 유효한 것 같다.  서로 다르거나 비슷한 어떤 현상을 둘 이상 맞대어 보는 대조와 비교의 방식은 대상의 동질성을 찾는 일이자 동시에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며 이 차이는 역사서술의 중요한 제재가 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며 주변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속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미술의 역사가 대조와 비교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의미생산의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런 발견이 아니다. 다만 새로움과 순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강령 속에서 관계방식의 유효성이 잠시 소홀히 다루어져 왔을 뿐이다. 과거와의 관계를 통해 현재의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 그것을 미래로 연결시키는 엘리엇의 역사의식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나타나는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1970년대 한국화단에 등장한 새로운 미술경향으로써 극사실 회화에 대한 연구를 위해 대조와 비교의 방식을 택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구미술의 수용과 극복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 온 한국 근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을 고려할 때 이는 낯선 방식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대조와 비교의 방식이 과연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한 연구방법론으로 정착했는지를 따져 본다면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계와 맥락의 유기적 구조화’라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평론가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해 온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1998년에 출판한 <관계의 미학>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그는 오늘날의 예술이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양상을 지속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예술과 사회, 역사, 문화와 맺는 관계를 탐구할 것을 권고하며, 이를 통해 열려 있고 상호 인간적인 교류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예술을 제안하고 있다. 예술이 사회적 맥락과 인간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하는 관계의 예술은 고정 불변의 가치가 아닌 유동적인 의미를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수성은 동시대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양한 문화현상과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때 복잡성은 시간(역사)과 공간(지역)에서 진행되는 특수한 관계의 구조 속에서도 하나의 특수한 의미와 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극사실 회화를 둘러싼 의미와 가치는 항구적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실체가 될 것이다. 자크 데리다가 ‘차연’의 개념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관계와 융합에서의 차이란 늘 현재 진행형이며 완결된 의미는 영원히 불가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미학의 차원에서 비평의 목적이 하나의 규정된 이념을 생산하는 차원을 넘어서 있다면 가능태로 생장하는 유기적 의미와 가치들은 그 자체로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극사실 회화가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노력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한국 극사실 회화가 하나의 집단적 경향으로 정착하던 1980년대 초반 이 경향의 주체들은 “우리는 하이퍼 아류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역으로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발생한 하이퍼 리얼리즘과의 적극적 비교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한편 국전에서의 새로운 형상미술 계보와의 동질성 또는 차별성을 발견하기 위한 시도는 대체로 예술에 대한 인식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모더니즘 운동의 측면에 서서 형식과 개념상의 전위성을 강조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의 미술 기류를 새로운 형상성의 탐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신문사 주최 민전의 역할도 괄목할 만 한 것이었다.   

이 글의 목표는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단순히 1970년대에 발현한 집단적 현상으로써 경향성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양식으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 극사실 회화가 새로운 형상미술로서의 독자성을 지니기 위한 보편적 형식 논리를 개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기법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맥락과 인간사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하는 보편적 양식으로서 리얼리즘의 범주에서 다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따져 볼 것이다.  
         

II. 극사실 회화의 문제 : 사실과 환영  

미술사의 영역에서 '사실(reality)'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자연이나 현실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의 속성’을 의미한다. 사실의 개념을 현실의 의미로 받아드려 그대로 회화에 적용한 미술사조가 바로 프랑스의 사실주의(realism)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사실주의 미술은 대상의 현존성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재현적 그림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극(hyper)’이 명사 앞에 첨가된 ‘극사실’이란 현존성이 극대화된 경향을 지칭한다. 따라서 극사실 회화는 대상의 형태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기법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에서 형상미술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러나 사실과 극사실의 관계는 단순히 현실적 대상의 현존성을 재현한다는 차원을 넘어 회화의 본성으로서 실재와 환영의 문제 그리고 그 표상에 대한 물음으로 논점을 확장하고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극사실 회화란 ‘시각에 대한 새로운 방법적 접근’이자 모더니즘 미술이 100여년 동안 구축한 미학형식과 비평원리와도 차별화되는 시각언어로서 의미를 갖는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1년, 삼성미술관이 기획한 <사실과 환영: 극사실 회화의 세계>는 한국 극사실 회화의 대표적 작가의 작품과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들의 작품을 한 공간에 대질시킨 중요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의 도록 발간에 즈음하여 평론가 김복영 교수는 한국의 극사실 회화의 기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70-80년대 신형상회화: 극사실 회화의 기원”이라는 제명으로 발표된 이 글에서 그는 한국의 극사실 회화를 기법적 측면이 아니라 형상충동 내지는 구상충동의 시대적 표출과 표명으로 격상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제안은 우리의 미술현상 중에 극사실 회화를 포함한 형상(구상)성을 띤 일련의 경향들을 통섭하고 이를 미술 생산의 본령인 창조충동의 한 문맥에서 다룰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주지하듯이 형상(figure)이란 어떤 대상의 겉모양이나 현상 혹은 형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상을 이루는 재료인 질료(matter)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형상회화는 대상의 생김새나 상태에 특별한 관심을 두어 그려내는 미술이라는 점에서 자연이나 현실적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보다 한층 더 포괄적 의미를 지닌 용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형상회화란 모방과 재현을 넘어 실재와 환영의 문제를 모두 포함하는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접두사 ‘신’자가 추가된 신형상회화란 모방과 재현의 전통적 양식 뿐만 아니라 실재와 환영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하고 표상하는 회화로 이해될 수 있다. 신형상회화의 개념은 관학파를 통해 유지되어 왔던 아카데미즘을 넘어 형식과 물성을 둘러싼 실험장으로서 모더니즘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실재와 환영을 통섭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요소들이 동시에 가미된 경향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신형상 회화는 1970년대 이후 나타나는 다양한 범주의 형상회화의 표현양식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것은 극사실 회화와 국전에서의 실험적 형상미술 그리고 모더니즘적 색채가 가미된 형상미술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형상 미술의 범주 안에 극사실 회화를 포함하자는 김복영 교수의 의견에는 역사기술의 측면에서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신형상 미술이 유럽지역에서 이미 하나의 미술사조로 출현한 용어이기 때문에 제기되는 혼란이다. <신형상 미술(Nouvelle Figuration)>은 1960년대에 시작되고 1980년을 전후해 이미 국제화된 양식으로서 그 형상성이나 내용 그리고 기법상에서 독자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다. 가령 프랑스의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독일의 신표현주의(New Expressionism), 이태리의 트랜스 아방가르드(Trens Avantgard), 미국의 배드페인팅(Bad Painting) 등은 이미 차별적 형식논리를 지닌 신형상 계열의 세부양식으로 정착되어 있다. 상기의 신형상 미술은 현대사회의 폭력과 교란 그리고 정치와 역사에 대한 정보 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동시적 표현과 즉자성이 풍부한 회화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중미술과 연계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추어 한국의 극사실 회화를 형상충동을 충족시키는 신형상 미술의 범주에서 다룰 경우 독자적인 형식과 논리를 지닌 하나의 경향으로서의 특수성을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삼성미술관 기획전 <사실과 환영: 극사실 회화의 세계>와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즘과 한국 극사실 회화 사이의 차별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평면을 본성으로 삼고 있는 회화예술의 영역에서 사실(reality)과 환영(illusion)의 관계란 이원적인 것이 아닌 교합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외부현실을 캔버스 위에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극단적인 환영을 추구하는 것이 극사실 회화라 한다면 극사실 회화의 본질은 극대화된 환영의 추구에 있다할 것이다. 이 경우 그림속의 환영은 외부현실과의 대비적 관계망 속에서 존재성을 인정받게 된다. 결국 극사실 회화는 실재와 환영 사이의 간극을 오가며 보는 이의 시지각적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는데 이는 어쩌면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입된 기법이 사진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의 미국 하이퍼 리얼리스트들은 사진적 프로세스와 기법으로 대상을 실물로 착각할 만큼 정교한 일루전을 손의 기술을 통해 창출했다. 그들에 있어서 극대화된 사실감의 표현이란 결국 극대화된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캔버스라는 화면 위에서 실재와 환영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실물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환영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사진적 프로세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이어서 사진적 실존성을 지향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에 포토 리얼리즘(Photo Realism)이라는 명칭을 추가해 붙였다. 결국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대상의 사진적 재현을 목표로 삼아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환영을 창출하는데 주력했다. 바로 이 지점이 ‘캔버스에 재현된 대상 자체의 본질성과 사실성’을 추구했던 한국의 극사실 회화와 차이점이 발견되는 부분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동시대의 문화 사회적 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등장했다. 이 경향의 탄생과 관련한 시대적 배경을 보면 모더니즘에 대한 의문과 도전의 상황을 들 수 있다. 이차세계대전 전후의 구미지역 미술계는 회화의 기본적 조건에 대한 논쟁에 따라 형식주의 미술이 주도하면서 회화의 순수성과 재료적 물성 그리고 구조에 대한 탐구가 한창인 상태였다. 1960년대가 되면서 시도된 미니멀리즘과 팝아트의 균형적 발전은 미술가들에게 변증법적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른바 실재와 형상 사이의 시각적 체험과 개념적 규정의 문제가 화단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새로운 형상미술에 대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얻게 된 다. 화가들은 추상미술에 대한 저항의식과 함께 실물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재현미술에서 대중 소비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주제를 둘러싼 현실인식이나 비판적 의도를 드러내는데는 소홀했으며 표상된 환영과 실재 사이의 시지각적 현상 자체를 캔버스에 표상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 대목도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한국의 극사실 회화 사이에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III.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 배경 

한국 극사실 회화가 등장하던 1970년대는 일명 ‘모더니즘 미술’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로 대변되는 비정형적 추상이 국내 화단에 유입된 이래 하나의 집단적 경향을 이루었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대 초반의 시기가 지나는 동안 설치, 오브제, 하이퍼 리얼리즘, 팝아트 등의 경향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이르면 행위, 개념, 물성으로 그 미학적 특성이 대변되는 단색평면주의 추상회화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AG(아방가르드협회>(1970), <신체제>(1971), <ST(space와 time의 약자)(1971> 등은 주목할 만한 단체다.

1970년대 중반 극사실 회화는 당대를 풍미하는 미학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 평단의 일반적 입장이다. 하지만 당시 주를 이루고 있던 단색평면주의 회화에 대한 반작용과, 구미지역에서 유입된 새로운 형상미술의 영향으로 일련의 젊은 작가들 사이에 산발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대학에 재학 중이던 고영훈은 미국의 팝아트에 영향을 받아 1973-1974년 드럼통이나 군화, 배낭, 코카콜라병, 코트 등을 그렸고, 역시 대학에 재학중이던 이석주는 1973-1975년 즈음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을 접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던 형상작업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970년대에 극사실 회화의 경향의 작업을 했던 작가로는 김홍주(1945년생), 한만영(1946년생), 변종곤(1948년생), 김강용(1950년생), 고영훈(1952년생), 조상현(1952년생), 이석주(1953년생), 지석철(1953년생), 주태석(1954년생), 이재권(1954년생), 서정찬(1956년생), 정규석(1956년생), 김창영(1957년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팝아트와 하이퍼 리얼리즘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미술의 영향 속에서 각각의 고유한 기법과 논리을 통해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면서 한국 극사실 회화의 1세대 작가군을 형성했다. 

한만영은 특수한 경향이나 화파에 억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노정을 스스로 선택했으나 1972년에 제작한 <무제>는 팝아트의 영향을 받으면서 복제 이미지를 차용하는 한편 부분적으로 극사실 회화의 기법을 채택했다. 후에 <공간의 기원>이라는 시리즈 제명으로 이어질 이 작업의 경향은 자신의 화폭에 명화의 일부를 정교하게 그려 넣으면서 화면공간을 구성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가 서양의 명화를 차용한 것은 ‘장치물의 배치로 조성되는 공간성의 조화를 위한 의도이자, 화면에서 공간에 대한 해석의 방식을 달리하려는 시도일 뿐’이라 설명한다. 작가의 <공간의 기원> 시리즈에서 보여준 시간과 공간,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 평면과 입체를 통합하는 방법론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극사실 회화에 있어 하나의 경향성을 제공했다.  

고영훈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학 2학년 재학시절인 1973년 군화를 그렸고 이듬해에는 배낭, 코카콜라병, 코트 등의 사물을 극명한 이미지로 포착하는 한편 배경 없는 화폭에 사물의 물성을 강조하면서 극사실 경향의 작업을 시작했다. 1974년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돌그림 <이것은 돌입니다>를 제2회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면서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적 색채를 띤 경향으로서 극사실 회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조상현 역시 대학시절부터 국전의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형상미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통 표지판, 포스터, 신발, 옷 등 일상적 소재들을 실재감 있게 표현했고 실물에 가깝게 묘사하면서 새로운 사실주의를 지향했다.  


주태석은 1970년대 후반부터 철도를 소재로 택했는데 그가 그린 <기찻길> 시리즈는 이전의 선배화가들이 그린 동일 제재의 구상화풍의 그림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다. 주태석의 경우 정밀하게 묘사된 철로나 부목은 평면적 시점에서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전체에 깔려있는 조약돌 역시 크기나 묘사방식에 있어 균질한 위상을 지닌 채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는 시각체험을 자극하는 원근감도 배제되어 있으며 거대한 철로의 단면만이 화면에 익명적으로 옮겨져 있다. 그가 그림에 적용한 화면형식은 전면회화의 기법을 따르고 있어 철도 이미지는 풍경의 차원을 넘어 인식적 일루전으로서의 의사자연(擬似自然)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석철의 경우 쿠션이라는 대상을 통해 새로운 방법론을 구축했다. 화면에 확대된 가죽의 표면은 보는이로 하여금 사물의 물성과 시각적 판타지를 동시에 제공해 준다. 이러한 체험은 대상의 부분을 미시적 시각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쿠션의 일루전에서 온 것이다. 지석철의 쿠션 그림이 급기야 물자체가 아니라 정신성을 드러내는 차원으로 전환되는 것은 극대화된 물성의 표현과 시각적 판타지의 연출방식으로 캔버스가 하나의 독립된 오브제가 되는 상황으로 전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림의 제목으로 선택한 <반작용>은 사물을 대하는 작가 자신의 태도이자 현실에 대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반작용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 극사실 회화의 선구자들은 국전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화가로의 공식적 입문을 위한 유일한 관문이었던 국전은 대학에 재학중인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국전 내부에서도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수용할 준비를 갖추었는데 1970년을 전후해 국전은 청년작가들의 예술의욕을 고무시키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1969년 서양화부는 구상과 비구상을 분리 운영했고 그 효과로 이듬해인 1970년부터 구상부에서도 현대적 조형의식이 가미된 형상작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차 한국 극사실 회화의 주역이 될 청년작가들은 국전을 통해 입지를 굳힌 작가들로 부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고영훈의 회고에 따르면 1970년 제19회 국전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김형근의 <과녁>에 고교시절의 자신을 비롯한 고등학생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학에 입학한 후 이끼 낀 비탈과 산을 그려 국회의장상을 수상한 하동균의 <돌아오는 날>, 손수광의 적막한 배경의 인물과 정물, 그리고 구자승 패턴의 정물을 사실적 그림의 계보로 생각했다. 고영훈은 1972년 국전에 처녀 출품했으나 낙선했고 조상현과 이석주는 1973년도 제22회 국전에 입선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부분은 1969년 국전의 서양화 분야가 구상과 비구상으로 분리된 이후에도 극사실적 경향은 1979년까지 ‘비구상 부문’으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김강용은 1979년 제28회 국전의 ‘비구상 부문’에 자신의 벽돌 그림을 출품해 특선을 받은 경우다. 1981년 마지막으로 개최된 제30회 국전에서 이석주는 <벽>으로 ‘추상 부문’에서 특선을 수상한다. 

모더니즘 계열과 대립적 긴장 관계에 있던 국전이었지만 국전 내부에서도 아카데믹한 사실주의를 넘어 형상회화의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지나치게 현실과 유리된 재현회화에서 벗어나 일상적 현실과 사물의 표상 그리고 환영의 문제에 눈을 돌린 작가들에 의해 현대적 극사실 회화의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손수광 외에도 1971년에서 1974년 사이에 새로운 형상작업을 시도했던 박동인과 배동환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고영훈, 이석주, 조상현 등의 모더니즘 계열에 속해 있던 작가들에 앞서 1970년대 전반기에 극사실적 경향의 작품을 태동시키는데 영향을 미친 작가군에 속한다. 

박동인이 1971년에 제작한 <아침>이나 1972년에 제작한 <바람>, 1973년의 <그리움>, <염원> 등은 철도를 그린 것으로 사의적 풍경이라는 측면에서 자연의 시각적 재현에 충실한 국전의 아카데미즘 계열의 작업들과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신문과 깡통의 등장은 자신의 예술의욕이 당대 현실의 시대상과 연계되어 있음을 나타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그는 1963년부터 1980년까지 국전에 연속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고 그의 동료였던 손수광과 배동환과 더불어 한국의 새로운 경향의 형상 미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1973년 이 세 명의 작가가 명동화랑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명칭이 <신형상전(新形象展)>이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주목해야할 대목으로 생각된다. 박동인은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잡초 시리즈로 소재로 바꿔 다작을 남겼다.  

1974년 <어머니의 방>으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배동환은 이듬해인 1975년부터 ‘치밀한 묘사력과 함께 명상과 절제의 감정을 바탕으로 한’ 자갈밭 그림 <우리들의 성지> 시리즈를 그려 특선을 수상했다. 국전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데 기여한 인물화에서 과감히 일탈해 엄숙하고 정적인 풍경의 서정성을 표상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는 모더니즘의 형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상미술을 추구하는 일련의 청년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실험적 노선으로 다시 변신을 꾀할 때 까지 국전 출신의 작가로서 한국의 신형상 미술의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에서 언급한 손수광과 박동인 그리고 배동환의 작품이 극사실 회화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후배 세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물성과 환영의 문제에 대한 성찰과는 달리 이들의 작품은 여전히 서사와 풍경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1970년대 대통령상을 받은 김형근의 <과녁>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볼 때 한국 극사실 회화의 작품이 지닌 특수성이 현상의 시각적 재현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는 다른 차원, 즉 소재와 상황의 설정에 대한 관심의 흔적을 여전히 드리우고 있다는 차원에 있다면 이 두 그룹 사이의 영향관계는 동질성의 차원에서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태동에 대해 언급할 때 ‘모더니즘’과 ‘국전’에 이어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이 언론기관이 주최했던 ‘민전’이다. 주지하듯이 민전은 1970년대 보수적인 국전의 권위에 대한 비판적 대응의 양상을 띠며 등장했다.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동아미술제’, 그리고 중앙일보사가 주최한 ‘중앙미술대전’은 언론사로서 기존의 가치에 대한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표방하면서 화단의 질서를 재편하는데 기여했다. 민전의 등장은 국전 주도의 공모전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계열과 새로운 형상성을 띤 회화의 확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미술대상전은 국내 미술계에 모더니즘을 적극 수용하면서 국전과의 차별화를 꾀했고, 동아미술제는 신형상성을, 중앙미술대전은 당시 유행한 미니멀리즘과 함께 신구상풍의 작품을 적극 받아들였다. 

한국미술대상전은 1970년에 1회전을 개최해 김환기를 대상작가로 선정한 이래 배동환(1976년 3회전에 은상), 김홍주(1978년 5회전에 최우수프론티어상) 등의 작가를 배출했다. 동아미술제는 1978년 1회전에서 변종곤의 작품 <1978년 1월 28일>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국전과 대비되는 신형상 회화의 에너지를 화단에 일으켰다. 1980년 2회전의 대상작품 역시 한운성의 사실적 묘사기법을 내세운 동판화 <문>에게 돌아갔고, 안병석의 유화 <바람결>이 동아미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새로운 형상성을 지향하는 공모전의 성격을 분명하게 세워나갔다. 중앙미술대전에서는 1978년 1회전에서 대상 수상작 없이 지석철의 <반작용>, 이호철의 <차창>에 각각 장려상을 배정했고 1979년 2회전에서도 김창영의 극사실적 작업 <무한>이 대상없는 장려상을 시상함으로써 한국 화단에 새로운 변화를 선도했다.         
     
민전이 1970년대 한국 극사실 회화의 형성에 미친 영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관계미학의 차원에서 보면 민전의 등장으로 극사실 회화의 경향은 신형상 미술의 차원과 융합되면서 보다 풍부한 조형적 언어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신형상 미술이 리얼리즘 논쟁으로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을 확보하게 된 것도 민전이 모습을 드러내는 1970년대 후반의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IV. 한국 극사실 회화의 형식논리 

한국화단에서 극사실 회화는 1970년대 후반에 와서 집단적 움직임을 통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78년 3월에 일주일 간격으로 미술회관에서 열렸던 <사실과 현실> 그룹의 창립전과 <전후세대의 사실회화란>전은 극사실 회화의 세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전시회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같은 해에 <형상78>전 등이 개최되면서 연합적 움직임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형상78>전은 홍익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선후배들이 인맥과 나이 제한 없이 함께 참여하고 그 이후에는 그룹으로 나뉘지 않고 통합적으로 나갔다”는 이석주의 회고는 극사실 회화의 경향이 통합적 성격을 띤 집단적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이후 1981년 결성된 <시각의 메시지>는 극사실 회화의 집단적 움직임을 주도한 또 하나의 그룹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기한 언론사의 공모전인 <동아미술제>와 <중앙미술대전>과 더불어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이들 그룹과 전시들은 앵포르멜과 모노크롬회화의 관념적 추상회화를 극복하는 한편 전통적 사실주의 회화와도 차별화된 새로운 경향의 형상미술을 전개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화단에 새로운 활기를 주었다.

1981년에 들어 한국화단의 지형도를 재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전이 제30회 행사를 마지막으로 전격 폐지된 것이다. 이러한 화단의 변화 속에서 부각된 또 하나의 세력이 신형상 계열의 집단이었으며 1979년에 결성되고 이듬해에 창립전을 개최한 <현실과 발언>은 국전의 아카데미즘의 해체에 따른 형상미술의 집단적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1980년대 초반의 신형상 미술은 극사실 회화의 경향과 민중미술의 경향으로 대별될 수 있으며 이들은 상호 대비와 비교의 차원으로 얽히며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상에 대응하는 방법상의 해법들을 각각 찾아 나섰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발현과 연관해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수용과 반성의 대상으로 작용했음은 전기한 바와 같다. 그러나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수성은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에 대한 반작용만으로 진단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데로 당대의 화단을 이끌었던 모더니즘 경향들과 국전 내부의 새로운 구상 작업의 경향들, 그리고 민전을 통해 제시되었던 신형상 미술의 경향들은 극사실 회화의 태동과 전개양상에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970년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청년작가들에게 안겨준 저항의식과 비판정신은 극사실 회화의 주체들에게 비켜가지 않았다.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라는 공통분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소재나 내용 면에서 작가들의 주관적 감성이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상의 기계적 재현에 충실한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차이를 보인다. 예술의 진정성은 작가가 속해있는 환경적 요인과 관계지어질 때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면 극사실 회화에 담겨있는 사회심리적 문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팝아트 혹은 미국의 전후 대중문화와 연계성을 지니면서 도시풍경으로서 광고와 네온사인(로버트 커팅햄), 카페, 슈퍼마켓 그리고 기술적 생산물로서 오토바이(탐 블랙웰), 자동차(로버트 벡틀), 트럭(랠프 고잉스) 등을 주제로 삼았다. 인물(척 클로스)과 정물(찰스 벨)의 경우에도 대중 소비사회가 야기한 익명적 존재로서 표현되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하이퍼 리얼리즘의 제작방식 역시 산업사회의 특성으로서 차갑고 기계적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테크닉 역시 에어브러시를 사용하거나 감광유제를 바른 캔버스 위에 사진전사 기법을 채택함으로써 매끄럽고도 물감의 물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표면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성은 소재나 내용 면에서 하이퍼 리얼리즘과 차별성을 지닌다. 우선 소재는 돌(고영훈), 벽돌(김강용), 벽(이석주), 자갈(배동환), 물방울(김창열), 모래(김창영), 흙(서정찬), 들풀(박동인) 등의 자연(가공)물이거나, 쿠션(지석철), 계단(변종곤), 철로(주태석) 등의 ‘사회적 이용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산업 소비사회의 산물들을 다룬 경우는 표지판(조상현)과 깡통(차대덕) 정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인간적인 체감이 배어 있는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의 체감이 흠뻑 배인 것들” 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김복영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극사실 회화는 “해석적인 면을 심층적으로 설정 하면서 특히 표면형상 만은 차가운 물상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일견 모순된 두 얼굴이 존재한다.” 

이러한 특성은 극사실 회화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국전파의 형상작업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배동환의 <성지>는 ‘시대상황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징’으로 해석되며, 박동인의 화면에는 인간의 모습이 부재하지만 인간의 흔적은 기억처럼 숨겨져 있다. ‘황량한 가을의 들녘에 고무풍선, 낫자욱이 선명한 벼포기’ 등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동인의 작품에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세계인식이 맞물려 있다. 1970년대 초반, 철로와 신호기가 있는 자연풍경으로 화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후 1980년대에 중반에 이르는 그의 작업은 “조형공간 안에서 미디엄 효과를 주로하여 자연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한국 극사실 회화는 소재나 내용 그리고 기법면에서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 회화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우리의 구상세대들은 구미지역에서 유입된 사조들을 모방하지 않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신형상 회화의 전통적 기법과 모더니즘의 감각을 상호 융합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영훈의 초기작업에 등장하는 군화를 비롯한 군용 장비들은 해방 이후 전쟁과 분단 그리고 미군정과 재건의 여파로 남아있는 정치적 모순과 혼란의 상황을 반영하는 기호들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방식은 이석주의 <벽>이나 지석철의 <반작용>, 김강용의 <현실+장>, 주태석의 <기찻질>, 그리고 변종곤의 <1978년 1월 28일> 같은 작업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1980년대 이전의 사회적 상황에서 이들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예술은 사회적 발언의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독재정권 하에서 이들의 메시지는 기호나 은유로 숨겨져 있었고 작가 스스로가 자신이 표상하는 기호의 의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V. 에필로그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70년대에 등장한 한국 극사실 회화의 작품경향은 외부의 영향과 내부적 당위성이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탄생된 것이었다. 외래사조에 대한 수용과 극복의 과정은 물론이고 국내의 문화적 상황과 정치사회적 문맥에 대응하는 작가 개인의 태도가 서로 맞물리면서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조와 비교의 성찰 방식인 관계미학의 측면에서 보면 국전의 아카데미즘과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그리고 제3공화국이 구축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이 미국과는 다른 역사와 문화적 상황의 결과임을 선언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다행스런 일은 최근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지닌 특수성이 신형상 미술, 나아가 리얼리즘의 문맥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본령으로서 형상에 대한 충동의 산물이자 현실에 대응하는 예술로서 보편성의 맥락에서 한국 극사실 회화가 양식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 일이다.  

다시 시점을 1970년대로 돌려보면 극사실 회화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섹터(집단적 경향)로서 주목을 끌었으나 양식으로 정착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당시 화단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현실에 대한 참여와 발언을 작가의 소명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민중미술에 의해 미술계가 양분되는 현상을 보임으로서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경향들은 한국현대미술사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다시 흘러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사실 회화에 대한 미술시장과 미술관 차원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의 하나로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사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한층 더 필요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에 대한 기존 연구의 내용들을 반복 나열하는 일을 가능한 줄이고 극사실 회화의 주변 혹은 신형상 미술의 영역에서 개성적인 작업을 전개해 왔던 작가들에 지면을 대부분 할애했다. 여기서 얻은 성과는 서두에서 제시한 방법론으로 ‘대조와 비교의 방식’ 그리고 ‘관계의 미학’에 의해 한국 극사실 회화의 정체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한국 극사실 회화를 포함한 한국 신형상미술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비평의 지평을 확대하고 열린 시각으로 앞으로도 더 많은 작가들의 개별적 성과들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양식규정 문제와 보편의 가치인 리얼리즘 양식으로 편재 가능성 연구도 향후의 과제로 남겨 두겠다. (2014.8)  


* 이글은 졸고 <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들>(미술평단, 제93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9)을 수정 보완한 것이며, 추가 참고문헌으로는 졸고 <한국 극사실 회화의 미술사적 규정 문제>(현대미술학 논문집, 제13호, 현대미술학회, 2009)와 <한국 극사실 회화의 현주소>(미술평단, 제96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1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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