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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렬 / 적멸(寂滅)의 세계를 찾아서 II

김영호

적멸(寂滅)의 세계를 찾아서 II

김영호 (미술평론, 중앙대교수)


1. 프롤로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적멸의 화가, 정영렬>(2014)은 정영렬 화백의 미술사적 위상을 재조명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1988년 1월, 지천명(知天命)의 삶을 누려야 할 나이인 53세로 아쉽게 생을 마감한 이후 정영렬 화백을 기리는 회고전은 두 차례가 있었다. 워커힐미술관의 <정영렬 유작전>(1995)과 타계 10주년을 맞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정영렬-침묵의 빛>(1998)이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회고전은 화백이 작고한 시점으로 헤아리면 26년만의 일이 된다. 시간이 세속의 거품을 털어 버리고 작가의 본성을 각인해 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지나온 사반세기의 세월은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성과를 새롭게 발굴하고 재정립하는데 적절한 시간일 것이다. 

전후 한국 추상화단의 흐름에서 정영렬 화백이 차지하는 위상을 규명해 보는 일은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모더니즘 미술의 핵심적 경향으로 추상회화가 이 땅에 유입된 이래 자성(自省)과 비판(批判)의 과정을 거치며 전개되어 온 일련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과 함께 불어닥친 평면회화에 대한 도전과 예술의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본령으로서 추상미술이 오늘날까지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살아남아 굳건히 생명력을 이어가는 이유를 미술사적 맥락에서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대감은 21세기에 들어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추상회화의 창작과 비평 원리로서 ‘평면에 대한 인식과 페인팅 자체의 프로세스 그리고 질료의 물성’에 대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온 것이다.  

필자는 1998년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정영렬-침묵의 빛>의 서문을 통해 정영렬 화백의 작품세계를 나름대로 정리한 바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정영렬 화백이 남긴 발자취를 다섯 개의 항목으로 요약한 후, 작품의 연대기적 분류와 더불어 작품의 비평적 특성에 대해 서술했다. 정영렬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의 도입(導入)과 모색(摸索) 그리고 정착(定着)의 시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30여년의 기간 동안 화단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미술계의 변화와 단절의 마디를 형성하는데 기여했고 그 뿌리를 동양사상에 연계시킴으로서 독자적인 위상을 정립했다는 내용이 글의 요지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비평적 특성을 형식의 문제로서 ‘점의 조형’과 그에 따른 내용적 결과로서 ‘종교적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살펴보았다. 

그로부터 다시 16년이 흐른 지금, 정영렬 화백의 예술세계에 대한 필자의 비평적 견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조건이 변화된 지금 작가의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의 기준은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의 작가론에서 제시한 내용을 토대로 삼아 한국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추상회화가 지닌 생명성과 그 생명성을 유지해 온 내적 동원에 대해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논지의 초점을 정영렬 화백 예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적멸(寂滅)> 시리즈에 맞출 것이다.  


2. 정영렬은 누구인가

전후 한국 추상미술의 영역에서 정영렬 화백이 차지하는 위상은 그가 남긴 예술적 성과와 국제전 참가 경력 그리고 전위적 그룹 활동을 통해 확인된다. 한국 현대미술 평단의 대부 역할을 담당해 온 이일은 자신의 미술평론집에서 정영렬 화백을 한국현대회화 12인의 한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일이 선정한 한국현대회화 12인이란 김창렬, 권영우,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영렬, 정창섭, 정상화, 하종현, 윤명로, 서승원, 최명영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위적 예술가로서 정영렬 화백의 작품세계가 확고한 조형적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동시대 평단을 주도했던 평론가 유준상, 김인환 등과 미술사가 정병관 교수 역시 현대미술을 둘러싼 단절과 지속의 관계항 속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온 정영렬 화백의 노정에 대해 합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들 비평가와 미술사가의 논지에 따르면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성과는 정신현상으로서 <적멸>과 그 실천적 구현행위로서 작품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적멸> 시리즈는 정영렬 화백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어법을 탄생시킨 원천이자 그의 작품세계를 동양적 사상, 즉 불교의 사상과 연계시키는 가운데 얻어낸 결실이었다. 시각을 달리하면 <적멸>을 주제로 한 작품 시리즈의 형식논리는 한 작가의 개별적 성과인 동시에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과 같은 미술사의 보편적 경향에 합류해 추상회화의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영렬 화백의 국제전 참가 경력은 추상화가로서 그의 활동반경이 국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로 열려 있었음을 반증한다. 또한 격변하는 1960년대 국내외 문화적 상황에 부응하여 한국미술이 국제화단으로 진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화가의 한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정영렬 화백은 전후 구미 추상미술의 대명사로 불리던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를 국내에 유입하는데 남다른 열정을 보였으며, 나아가 유입에 따른 문화적 충돌과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형식논리를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유럽과 남미 그리고 인도와 일본 등에서 개최되는 유수 비엔날레와 국제미술제에 연속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적 네트워크로 접속시키는데 나름의 역할을 담당했다. 1965년에 열린 <제4회 파리비엔날레>를 서두로 1967년의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 그리고 1970, 1975, 1977년에 열린 <제2회, 제7회, 제9회 카뉴국제회화전>에 출품했으며, 1975년에 열린 <제3회 인도트리엔날레>의 참여와 더불어 정영렬 화백에 있어 국제전 참가는 열린 시각과 독자적인 조형관을 태동시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파리비엔날레>는 만 35세 미만의 작가로 나이를 제한해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선보이는 국제미술제로서 1959년 창설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제2회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제4회 파리비엔날레의 출품작가는 정상화, 김종학, 최만린, 이양노, 정영렬, 하종현, 박종배 등 7명이었다. 제9회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출품작가인 남관, 문학보, 박래현, 박석호, 유경채, 윤명로, 이준, 정상화, 정영렬, 조용익, 하종현, 김정숙, 김영학, 송영주, 학종배 등 15명과, 제3회 인도트리엔날레에 출품한 김창렬, 정창섭, 정영렬, 이우환, 조용익, 하종현, 최명영, 안동숙, 이규선, 최기원, 심문섭, 박석원 등 12명의 명단을 보면 한국작가들의 국제전 참여는 국전 중심의 국내 화단 풍토와는 대조적으로 전위적인 작품의 집결지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0-1970년대의 국제전은 각국의 실험적 예술의지를 세계무대로 관철시키는 일종의 실험실이었고 이들 출전자 대부분은 후에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국내 화단의 방향을 크게 선회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전후 한국미술의 전위적 그룹 활동에서 정영렬이 차지했던 위상은 1962년에 창립된 미술단체 <악튀엘>을 통해 확인된다. 악튀엘은 <현대미협>과 <60년미협>의 발전적 해체와 더불어 구성되었는데 새로운 조형이념에 주목하며 한국 앵포르멜 미학의 태동과 전개에 일역을 담당했다. 박서보, 윤명로, 김창열, 정영렬, 정상화, 김봉태 등이 창립멤버였던 점에 비추어 이 그룹의 위상은 주목할 만 한 것이었다. 정영렬은 이 그룹의 창립에서 해체기에 이르기 까지 총무로 활동하면서 문화전사(文化戰士)로서 현대미술 운동에 실무를 담당했다. 전후 한국의 현대미술운동이 단체를 통해 집단적 성향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악튀엘 총무로서의 경력은 결코 소홀히 지나칠 대목이 아니다. 정영렬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9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을 통해 화단에 데뷔한 이래 1969년까지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1974년에서 1979년까지 참가했던 <앙데팡당>전, 1975년에서 1982년까지 참가했던 <서울현대미술제>, 그리고 1977년에서 1982년까지 참가했던 <에콜 드 서울>과 같은 단체는 한국 현대미술의 경향성을 세워 일으킨 대표적인 그룹이자 정영렬 화백 개인에게 자신의 예술적 산실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 정영렬 화백의 위상과 예술적 성과는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전개양상과 발걸음을 같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이 사망한 후 그의 존재감이 동료들에 비해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한국의 단색화>전에 정영렬 화백이 빠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세속과 타협하기를 싫어했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정영렬 화백에 있어 작품이란 그저 삶을 둘러싼 존재의 조건과 투쟁의 방식 그 자체였다. 작품의 자율성이나 경제적 가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는 생전에 개인전에 대해 무심했다. 1969년 화백의 고향인 광주에서의 첫 개인전에 즈음해 가진 일간지와의 대담에서 그는 개인전 자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한바 있다 : “아마 내 개인전은 이것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그의 발언은 그 후 10여년간 유효했고 1980년에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까지 지속되었다. 공공미술관이 아닌 국내 화랑에서의 개인전은 1983년 동산방 화랑의 전시가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 유일한 것이었다. 작품을 상품으로 여기지 않았던 외곬의 성격 탓에 화백의 작품이 화랑이나 미술시장의 네트워크를 통해 소통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작품 제작에 있어 치밀하면서도 열정적인 화가였고 많은 양의 작품을 생산했으며 편집광적인 작업의 결실들은 고스란히 유족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유족은 고인의 뜻을 따라 작품을 미술시장에 내놓기를 삼가 했고 급기야 국립현대술관에 대부분의 대표작품을 온전히 기증하기에 이른 것이다.   


3. 시대별 작품 분류  

정영렬 화백의 작품은 매체적 측면에서 분류하자면 캔버스와 종이작업으로 구분된다. 시대별로 전개되는 표현방식의 차이로 작품세계를 정리하면 ‘비정형적 추상의 시기’(1959-1974),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1974-1978), ‘종이조형의 시기’(1978-1988)로 나눌 수 있다. 전기했듯이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9년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한 것을 데뷔시점으로 삼는다면 이후 전개되는 작가로서의 화력 30여년간의 노정은 외래미술의 수용(受容)과 정착(定着) 그리고 극복(克復)이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비정형적 추상의 시기’에 정영렬 화백이 작품경향은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로 불리우는 구미지역의 미술경향과 맥을 같이한다. ‘질료의 물성이 강조되는 평면과 격렬한 행위의 터로서 캔버스’는 정영렬 화백을 포함한 동시대의 전위적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형식이었다. 이른바 전후 한국미술계의 집단적 경향으로 수용되었던 비정형적 추상은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쌓여있던 청년세대의 불안한 심리의 발현이자 새로운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요구되는 작가의 투쟁적 본능을 대변하는 언어로 쉽게 채택되었다. 정영렬 화백은 그 현장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캔버스 위에 얹혀진 질료덩어리는 마치 용암처럼 표면으로 돌출되는 에너지를 품고 있으며 이는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욕망의 단편을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표현적 기운과 상징적 개념을 동시에 품고 있는 비정형적 추상미술의 수용은 전후 국내사회의 현실과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미지역의 문화적 환경에서 생겨난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집단적 수용은 철지난 서구 모더니즘의 맹목적 수용이라는 비판의 날을 피할 수 없었다. 1960년대 구미지역의 현대미술 경향은 이미 모더니즘의 형식과 논리에 대한 도전과 부정의 차원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은 국내 화단의 청년세대 사이에 불길처럼 번졌으나 그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도전은 자성(自省)의 결과였다. 수용과 극복의 간극을 좁히는데 기여한 주역들은 바로 화단의 현장에 몸담고 있었던 이들이었으며 정영렬 화백은 그 대열에 있었다. 그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불상이나 고려청자 같은 전통적 유물의 형상에 심취하면서 정신적으로 동양적인 불교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추상화가 이면서도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반가좌상(半跏坐像)을 사실적으로 그려 넣으면서 독특한 실험과 모색의 시기를 거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라토기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수집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1971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프랑스현대유화전>을 계기로 대학신문과 가진 특집대담에서 서구미술의 모방에 대한 경계를 힘주어 말하고 있다 : “무턱대고 외국작가의 화풍을 모방한다거나 넘보고 덤비는것은 정말 근절해야 하네. 너무 민족성이나 현실성에 집착하는 것도 안되고….”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는 1970년대에 와서 시작된 경향으로서 화면구조와 명상체험이 연합된 지적 체계를 갖추게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전환(轉換)과 모색의 시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정영렬 화백의 실험적 작품은 외래미술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지가 작용한 결과로 평가되기도 한다. 관점을 달리하면 이 시기의 한국 추상작품 경향을 둘러싼 변화의 필요성은 국전(國展)의 체제정비와 연관해 야기된 부작용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1974년 국전은 내부적 체제를 개편하면서 비구상회화를 독립된 파트로 전폭 수용했다. 이에 따라 추상미술의 범주에서 활동하던 재야작가들이 국전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추상미술이 시대적 유행의 양상을 띠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평론가 오광수는 유력 일간지의 논평을 통해 “개성 없는 화필과 유행만이 범람”하고 있다고 1974년 국전의 비구상 부문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정영렬 화백은 이미 비정형적 추상에서 벗어나 기하학적 화면구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실험과 모색의 작품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수평과 수직의 색면을 유동적인 형태로 변주시켜 착시효과와 기하학적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정영렬의 작품에 대해 평론가들의 해석은 다양한 각도에서 내려졌다. 윤우학은 ‘정신적 요소를 품은 일루전의 문제’로 나름의 접근을 시도했고, 김인환은 ‘동양적 관조관에 근거한 무념무상의 허허로운 세계’라는 차원에서 작가적 태도에 대해 평가를 시도했다. 이일은 이 시기 정영렬 화백의 작품에 나타나는 형식이 옵티컬 아트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자연에의 순응과 극기의 세계’로의 전환을 보이면서 동양적 사유의 원천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했다. 정영렬 화백은 이 시기에 제작된 시리즈에 <작품>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1978년경부터 <적멸>이라는 제명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어법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정영렬 화백의 <적멸> 시리즈는 평면공간 안에서 진행되는 안료의 일루전을 넘어선 세계로 진입했으니 이른바 종이조형의 세계였다. 

‘종이조형의 시기’는 정영렬 화백의 트랜드인 <적멸> 시리즈가 새로운 차원으로 변주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1978년 이후에 캔버스 작업과 병행해 제작되었고 1980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천착한 경향이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려 표상한 일루전의 형상을 넘어 종이라는 재질과 입체(고부조)의 물질 자체로 제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종이조형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얻어낸 성과는 새로운 표현양식의 발견이라는 차원을 넘어 작가가 다루는 매체가 ‘바탕에서 물질로의 변화’라는 형식논리의 측면에서 높게 평가되었다. 그것은 모더니즘 회화가 추구했던 캔버스의 평면성에 대한 환원적 접근을 넘어 종이라는 매체 자체가 작품으로 제시되는 차원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물질로서 질료와 제작행위를 하나로 일치시킴으로서 양자간의 간극을 없애는 성과로 정리되기도 한다. 정영렬 화백의 종이조형은 우선 요철의 무늬를 새긴 원판을 제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후 작가는 원판의 표면에 종이의 원료인 펄프를 얹어 올리고 마른 뒤에 걷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종이의 표면을 긁어내거나 망치로 두드려 고르기도 하고, 끌이나 손가락으로 긁어내면서 종이의 물성을 최대한 드러내고 있다. 일련의 퍼포먼스를 연상케 하는 그의 종이작업은 종이원료와 작업행위가 일체화되는 과정에서 몰아(沒我)의 체험을 선사하는 작업으로 평가되었다. 자신의 작업에 확신을 얻은 작가는 종이조형은 일본과 교류를 통해 국제적 경향으로 확대시켰다. 1983년 일본의 경도시미술관에서 열린 <현대종이조형, 일본과 한국전>은 그 사례이며 한국과 일본의 작가 63명이 참여한 종이조형의 국제전으로 정영렬 화백이 주관한 교류전이었다.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노정 30여년은 명확한 마디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전위적 예술가로서 그의 족적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영렬 화백은 동시대의 동료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으나 결코 전위미술의 주변부에 속해 있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실험적 경향들이 미술시장과 타협하고 새로운 제도권미술로 정착한 이후에도 변방의 첨병역할을 고집했던 그야말로 당대의 진정한 전위미술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4. <적멸> 시리즈의 탄생

정영렬 화백의 예술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는 <적멸>이다. 주지하듯 ‘적멸’이란 니르바나(nirvāna), 즉 ‘열반(涅槃)’을 뜻풀이 문자로 번역한 용어로서 ‘번뇌(煩惱)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좀 더 풀어 정리해 보면 적멸이란 번뇌에 속박된 현상세계인 차안(此岸)에서 벗어나 깨우침의 지혜를 완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놓인 상태를 일컫는다. 그것은 ‘생각이 끊어져 고요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의식은 깨어있어 유리알처럼 아주 선명하고 또렷한 상태’요, ‘우리의 본성이라는 씨앗이 깨어날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라 해석되기도 한다. 불교의 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적멸이 작가의 예술로 수용되는 사연은 어떤 것일까. 

정영렬 화백은 불교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불교에 입문한 적도 없다. 그가 불상과 고려청자 그리고 신라토기 등에 관심이 무르익을 무렵인 1970년대에 들어와 한 월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불교에 귀의하고 계시냐”는 질문에 그는 “천만에요”라고 잘라 답변하고 있다. 그런 그가 <적멸>을 작품의 주제로 삼아온 것은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동안 품어온 보편적 삶의 태도로서 무작위적 관조를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이른바 동양사상으로서 이어져 내려온 무념(無念)과 무상(無想)의 세계에 대한 관심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불상을 소재로 삼아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이 경우 역시 “단지 불상의 좋은 선이나 형태를 구조요건으로 작품에 도입해 볼 뿐”이었다. 그에 있어 불상은 특정 종교의 심벌이 아니라 조형을 위한 하나의 대상이었다.  

적멸의 세계가 무념과 무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동양사상을 대변하는 용어라 본다면 우리가 이 법어(法語)의 심오한 의미나 그를 둘러싼 설법(說法)의 내용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은 정영렬 화백뿐만 아니라 1970년대의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전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실존주의의 영향 속에서 투철한 현실적 대응의지로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정신적 초월의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의식이 전환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미술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양사상에 대한 집착은 전후에 불어닥친 서구 모더니즘의 물결에 대응해 자신의 문화적 뿌리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보면 전후 한국의 현대미술 영역에서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집단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항거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60년대가 지나면서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형식과 논리는 점차 사라지고 격렬한 제스추어나 질료의 거친 물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고요하고 명상적인 단색의 평면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정영렬 화백이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제작한 <작품> 시리즈는 이러한 동시대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자, 뒤이은 <적멸> 시리즈는 형식에서 종교적 정신세계로 접근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각을 달리하면 한국의 단색평면회화는 구미지역의 미니멀아트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단색평면회화가 한국미술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 배경에 흐르고 있는 집단적 정체성의 덕이라 할 수 있다.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가 구미의 형식과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서 한계상황에 봉착했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의 단색평면회화는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근거한 정신세계 위에 설정된 예술경향이라는 점에서 미니멀 아트와 같은 철학적 속성의 예술 경향과 비교될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영렬 화백의 <작품> 시리즈와 <적멸> 시리즈는 한국 단색평면회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회화예술의 본성인 평면성과 그리기 자체의 프로세스 그리고 물질성에 대한 탐구의 결과였다.   


5. <적멸> 시리즈의 형식논리

조형예술의 영역에 있어서 정신성 혹은 종교성은 그 자체가 본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정신성 혹은 종교성이란 예술가 일반에게 주어진 보편적 지향의 대상이자 모든 예술작품은 개념으로서 정신성과 원초적 의미로서의 종교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성이나 종교성을 표상한 작품이 반드시 훌륭한 예술작품이라 볼 수 없는 이유는 예수나 부처를 소재로 삼은 그림이 반드시 훌륭한 예술작품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정영렬 화백의 경우도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종교성이나 동양사상이란 시각매체와 형식에 의존하여 드러나는 보편적 관념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의 조형세계와 그 형식논리에 대한 분석은 가치평가를 위한 필수적 요소가 된다. 

정영렬 화백의 <적멸> 시리즈는 시각적 환영(幻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평면위에 반복적으로 펼쳐지는 구조화된 점과 선은 시각적 환영의 세계를 드러내는 도구들이다. 평론가 윤우학의 분석에 따르면 반복적인 점과 선적 요소로 짜여진 화면은 ‘일루전이 탈일루전적 체험으로 전치되면서 급기야 정신적 차원으로 보는이의 시선을 유입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정신으로의 전치효과는 화면위에 구조화된 다양한 조형적 장치 때문이다. 반복해 찍힌 점들이 만들어내는 빛과 어둠의 패턴은 끝없이 펼쳐지는 공간에 대한 체험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종교적 차원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단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적멸> 시리즈를 지배하는 기본적 조형언어는 점(點)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점의 조형과 그 형식논리를 근간으로 <적멸>의 세계는 시각화 된다. 정영렬 화백의 예술적 노정은 점의 조형이 종교적 상상력의 차원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름의 의미를 품게 되는 것이다. 1960년대의 비정형적 추상에서 1970년대의 기하학적 추상을 거쳐 1980년대에 본격화 되는 종이조형에 이르는 작업 전반에는 언제나 점이 자리잡고 있다. 초기의 작업에서 점의 형상은 비정형적이고 추상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른바 미완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마치 화산의 용암을 밀어내는 분출구처럼 원의 형상은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심연에 잠재된 무의식이 표피를 뚫고 밖으로 유출되듯 의식의 표면으로 분출되어 응고된 반점들은 작가의 심상을 반영하며 캔버스의 표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영렬 화백이 표상하는 점의 조형은 하나의 형식적 패턴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른바 흔적으로서 점들이 캔버스 표면에서 유동적인 흐름을 이루며 전율하고 있는 형국이다. 화면에 얹혀진 점들은 연속적 흐름을 유지하며 에너지로 변주되는 가운데 캔버스의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다.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점들의 흐름은 창문위에 부딪쳐 흐르는 물방울의 행렬처럼 시각적 파문을 일으키며 정신영역으로 보는이들의 시선을 안내한다. 1978년 이후의 <적멸> 시리즈에 이르면 점들은 온전한 기하학적 구조를 띠게 된다. 마치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이나 격자무의의 창틀을 연상시키는 점의 조형은 이제 다변화를 거치며 화면위에 고유한 질서와 규칙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일루전은 이제 자연적 대상의 차원을 벗어나 순수 시각적 체험의 범주로 접어들며 화면에 독특한 운율과 내밀한 생명감을 발생 시키고 있다. 무수한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내리면서 접어들게 되는 무념과 무상의 상태, 결국 작가가 이르게 된 이러한 체험적 세계가 바로 종교적 상상력의 세계로서 <적멸> 이었다. 

1980년을 전후해 정영렬의 <적멸> 시리즈는 캔버스에서 종이로 매체를 바꾸게 된다. 매체의 변화에 따라 점의 조형 역시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든다. 종이를 표현의 바탕으로 채택한 초기의 작업은 수채물감으로 반복적인 점을 찍어 일정한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나의 점 위에 또 다른 점 하나를 얹힘으로서 두 개의 점 사이에 중첩 공간이 생기고 이러한 단위공간은 구조화를 거쳐 그룹으로 증식하면서 착시의 현상을 만들고 급기야 정신공간으로의 접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이는 적멸의 세계를 체험하고 실천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종이의 표면에 얹혀진 점의 환영은 착시를 통한 공간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종이조형은 한 계단 더 발전된 차원으로 접어든다. 종이의 원료인 닥지를 원판 위에 얹혀 건조시킴으로서 만들어낸 입체적 공간으로의 전환이다. 플라스틱 재질 혹은 목판 위에 음각의 점들을 파내거나 조약돌을 얹혀 고착한 뒤 그 위에 종이 원료를 얹혀 떠내는 것이다. 판화 기법의 일종을 유입한 이후 그의 작업에는 일루전의 단계를 넘어 요철의 기복을 품은 고부조 형식의 표면으로 전환되었고 점들은 자체로서 삼차원적 공간을 확보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허상적 공간에서 실재 공간을 통합한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정영렬 화백의 <적멸> 시리즈의 특징인 색채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색깔은 화려하지 않고 무겁다. 평론가 신항섭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돌부처, 기와, 퇴색한 단청, 바위꽃, 목기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월의 뗏자국”을 연상케 하는 다양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의 색깔이다. 무채색 계통의 단색주의가 집단화 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정영렬 화백의 작품이 동시대 작가들과 차별화되면서 개성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의 한 요소도 색채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색채감은 1975년 유럽 미술계 탐방을 계기로 작가가 추구했던 동양성과 한국성에 대한 끈질긴 표상노력의 결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색채의 중첩에서 오는 점들의 세밀한 볼륨감은 그대로 빛을 머금은 진주알처럼 명료한 느낌을 선사하고 있다. 정영렬 화백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색채의 오묘함이란 장구한 시간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전통의 정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적어도 정영렬 화백이 동양의 선불교 사상의 전통에 관심을 갖게된 이후 얻어낸 결실이자, 전통의 바탕에 흐르는 정신성을 표상하려는 개인적 노력의 소산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영렬 화백의 <적멸> 시리즈에 나타나는 반복적 패턴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복적 패턴은 사각의 캔버스 전체에 조형요소를 균일하게 채워 넣는 형식이다. 연속적인 점의 반복은 동시대의 단색평면주의 작품에 나타나는 하나의 경향이지만 정영렬 화백의 경우 점의 반복적 패턴은 무한증식(無限增殖)의 구조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무수한 점에 의해 구획되고 점이 선으로 확장되며 가로와 세로로 짜여진 사각의 평면은 화면에 경쾌한 리듬감을 생성시킨다. 주제개념이 없는 불명확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사색적인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평면 위에 펼쳐진 점의 반복적 패턴이 구조미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반복적 행위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을 통해 자기소멸(自己消滅)의 과정을 체험하게 되면서 그의 화면은 급기야 그 물리적 제한을 넘어 시각적 무한의 세계로 확대된다. 마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한된 사각의 공간에서 방대한 우주의 세계를 상상하듯 정영렬의 캔버스와 종이는 제한된 사각의 공간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반복적 패턴이 야기하는 무한증식의 효과에 힘입어 정신적 차원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거기서 찾게 되는 정신의 기저라는 것이 이른바 선불교 사상이다. 


6. <적멸> 시리즈의 성과 

정영렬 화백의 <적멸> 시리즈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평자에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 대한 평가의 대개(大槪)는 ‘선불교를 바탕으로 한 동양사상의 표현’이라는 내용으로 모아진다. 그의 회화작업과 종이조형은 동양적 사유와 실천의 장이며 이를 통해 선불교의 최고 경지인 열반세계에 이르려는 고난한 작업이라는 것이 평가의 요지다. 번뇌를 떠나고 괴로움을 멸한 열반의 세계는 끝없는 고행과 수련을 전제로 한 실천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그가 선택한 <적멸>의 화폭은 일종의 구도자적 수행의 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종교와 동일한 지향점을 갖는다 하더라도 표상된 매체를 통해 존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술 행위는 종교적 활동과 차별된다. 정영렬 화백이 예술가로서 종교적 세계를 지향하는 태도는 예술적 행위와 종교적 활동을 융합해 구도자로서의 예술을 실천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 있어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시도는 1970년대 예술가들에게서 발견되는 하나의 집단적 현상이었다. 정영렬 화백에 있어 선불교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사상의 한 흐름으로 수용되었다. 화가로서 민족사상에 대한 관심은 유입된 서구문화의 침잠으로 모호해진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에서 연유된 것이기도 했다.   

평론가 김인환은 정영렬 화백의 작품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형식과 그 안에 내재된 생명의 순수한 유동성에 대해 예찬하고 있다. 그것은 상업주의를 배제한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세계라는 점을 빠트리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 정병관 교수 역시 일간지 미술비평을 통해 “정창섭, 박서보 같은 몇 사람의 만년 전위작가들 처럼 항상 새로운 미학과 새로운 기법의 발견, 실험으로 일관해 온 그의 정열과 추진력은 사줄만 하다”고 평가하면서, “실험정신의 소유자들에게는 그림이란 모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되며, 빵을 버는 수단이 되기는 어려운것”임을 토로하고 있다. 정영렬 화백 자신은 『일요신문』의 컬럼을 통해 “창작물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의 하나라”고 규정하고 “예술가는 그러한 것에 개의함이 없이 자기 창작에만 전념하면 그만인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예술이란 새로운 표현수단을 실험하고 인간성을 발견하는 끊임없는 탐색의 과정으로 알고 있을 뿐이라는 그는 평생 동안 국내 상업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한 차례로 끝냈다.

정영렬 화백의 업적은 평면회화에 대한 신뢰감의 측면에서도 인정될 수 있다. 그는 평생 평면회화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의 전위적 물결이 퍼포먼스, 이벤트, 해프닝 따위의 행위미술로 전개되고 설치, 오브제, 비디오 따위의 매체미술로 향방을 잡고 있을 때도 회화의 범주에 머무르면서 회화예술의 순수성을 고집했다. 평면회화에서 구도적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는 치밀하면서도 우직한 화백의 천성 탓일 것이다. 국내에서 미술수업을 받은 첫 세대의 청년화가로서 그에 있어 회화는 아직도 미지(未知)의 영역이었고 탐구의 대상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작가로 활동하면서 몰입했던 서구의 비정형적 추상미술은 예술의 본성과 본질을 삶의 철학과 연계해야 하는 동시대 청년세대에게 던져진 과제였고 극복해야 할 산이었던 것일까. 평면회화 안에서 정영렬이 시도했던 예술적 실험의 과정은 오늘날 평면회화를 고수하는 청년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영렬 화백의 <적멸> 시리즈가 주는 의미는 무엇보다 순수 추상회화가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무엇을 찾아나서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평론가 윤우학이 지적처럼 그의 작품은 명확한 이미지가 배제된 채 단색조의 요철이 일정한 패턴을 따라 배열된 지루한 공간에서 예사롭지 않은 깊이에로의 내음을 맛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적멸> 시리즈는 과거의 착시공간에서 벗어나 평면적인 공간의 깊이를 의미하며 마치 ‘수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호수의 수면’처럼 평면적인 성격과 동시에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을 지닌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영렬 화백의 일루전은 과거의 구태한 일루전이 아니며 관념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그 관념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7. 에필로그

정영렬 화백이 타계한 지 26년이 되는 오늘날 그의 작품이 우리화단에 주는 의미란 어떤 것일까. 1959년 <한국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을 시발점으로 삼아 격변의 1960년대에는 ‘전위미술운동의 핵심체’였던 악튀엘 그룹의 총무로서 구미지역의 새로운 조형이념을 유입하는데 기여했고, 국제전에 연속적인 참여를 통해 견문과 시각을 확장하면서 <적멸>의 세계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일구었던 그가 새천년을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미술시장과 거대자본이 미술이념을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작품을 상품과 명백히 구분해 미술시장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켰던 치열한 작가정신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또한 어떤 것일까.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정영렬 회고전의 의미는 우선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로 대변되는 전후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의 추상회화의 발아와 성장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 흔적으로서 현대미술의 모색과 정착의 시기로 불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는 그의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사의 맥락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회고전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가의 극명한 예술의지와 선명한 작가정신을 발견하고, 추상회화가 지닌 항구적인 가치가 아직도 우리 화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형식논리로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영렬 화백은 지적인 풍모와 보스적 기질이 넘치는 화단의 리더였다. 한국적 형상과 빛깔에 대한 탐구와 동양사상의 전통을 예술의 언어로 담아내기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제작에 헌신했던 치열한 정신의 작가였다.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가진 대규모 개인전인 <정영렬 20년전>에 즈음해 어느 주간지와 가진 인터뷰 내용은 정영렬 화백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산사(山寺)에 찾아들었을 때 느꼈던 갑작스런 적멸, 불타의 미소가운데 갖춰진 그 정일한 평화로움, 온갖 번뇌를 초극한 열반의 세계까지는 못들어간다 하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해 나는 불타에 기대고 싶다. 적멸, 미망(迷妄)을 자르는 칼날, 그래서 얻고 싶은 정신의 안식처, 이것이 내 작품의 주제이며 작업의 과정이다.” 정영렬 화백은 역사속으로 들어갔지만 그가 남긴 작품과 독백은 오늘을 사는 청년 화가들에게 아직도 미지로 남아 있는 예술세계를 향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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