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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 시각의 환영을 넘어 사유의 전환으로

김영호

시각의 환영을 넘어 사유의 전환으로 

 : 고영훈의 「있음에의 경의」전에 부쳐


Generation 1-The Father, 2014, Acrylic on Plaster, Canvas, 135x200cm


1. 보이는 것 이상을 보다

 

섬의 방파제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면 거대한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수평선으로 나누어진 하늘과 바다의 공간이다. 시간이 흐르고, 망막에 비추어진 장대한 풍경은 점차 환상의 세계로 변주된다. 그 세계에는 수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에 대한 이름 모를 향수가 깃들여있다. 해가 기울어 대양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환상의 조건은 증대되고 마치 어느 초현실주의자의 작품 앞에 선 관객처럼 사색의 유희가 심화된다. 보는이의 눈은 현실을 향해 있지만 현실을 넘어선 세계를 보고 있다. 출렁이는 금빛 바다의 표면, 그 아래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검은 화산암 돌맹이들, 그리고 노을을 머금은 새털구름 따위는 수평선 위로 점차 사라져가는 화물선과 더불어 환영의 세계로 안내하는 사물로 다가온다.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된 사색의 시간은 섬 소년에게 일상의 하나였고 형상과 질료 너머에 존재하는 소우주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고영훈의 예술세계는 해질 무렵 대양을 바라보며 누렸던 소년시절의 시지각적 경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바다 풍경에서 바위와 돌과 책 등으로 바뀌었을 뿐,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그로부터 연유된 그림은 소년시절에 경험했던 바다를 바라보는 지각방식과 연계되어 있다. 해질녘의 일상에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이로운 환상의 경험은 실재가 환영이 되고 사물이 역사의 기호로 변주되는 지각의 능력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화가로서 그 지각능력은 화면 위에 새로운 차원의 공간과 시간을 표상하는 독자적 형식을 창안하는 차원으로 이어져 왔다. 공중에 부유하는 돌멩이 형상을 그리며 고영훈은 자신의 캔버스가 공간과 시간을 품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 “나는 내 앞에 놓여진 돌과 내 손가락 사이의 싸늘한 공간을 느끼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돌멩이에서 시간을 느낀다” 

신비의 섬 제주 출신인 고영훈의 돌과 항아리 그림은 이미지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그림 앞에서 관객들은 환영과 실재의 관계를 따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작가가 그려낸 돌과 항아리는 이미지일 뿐이므로 그것은 결국 돌이 아니라 돌의 일루전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또 다른 이는 화면에 그려진 것이 돌과 항아리의 일루전이지만 그 이미지는 캔버스라는 사물의 일부로서 현존하기 때문에 실재라는 입장으로 맞선다. 작가는 이 두 개의 상황, 즉 실재와 환영의 간극에 대해 성찰하며 자신만의 회화 형식과 관념을 세우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1970년대의「이것은 돌입니다」시리즈를 서두로 1980년의  책갈피 위에 트롱프 뢰이유(trompe l'oeil) 기법을 쓴 「돌-책」시리즈,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자연물 시리즈인「자연법」과 항아리 그림에 이르는 고영훈의 작업은 입체물로서 오브제가 평면위의 일루전으로 표현되고 다시 회화적 실재(현실)로 환원되는 순환의 사이클을 체감하는 인간의 시지각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시해 왔다. 고영훈의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평론가 김복영 교수는 1998년 개인전 이후 ‘기존의 사물들을 미지의 초월적 세계를 위해 탈실재화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고영훈의 작업사를 일괄하면서 ‘일루전이 허구가 아니라 거꾸로 실재하는 사물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뜻이 있다’고 하여 작가의 작품세계가 존재물을 둘러싼 현실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축복, 2013, Acrylic on Paper, 93x172cm


2. 트롱프 뢰이(trompe l'oeil)를 넘어 트롱프 레스프리(tromp l'esprit)로


실재와 환영 사이의 관계항이 전과 다르게 지각되는 체험에 대한 이론은 1980년대 이후 지식사회를 지배해 온 하나의 담론이었다. 그 중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이론은 고영훈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일루전이 실재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 여겼던 과거의 생각에서 벗어나 일루전과 실재의 경계가 해체되고 나아가 일루전이 새로운 실재로 인식되는 과정에서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고영훈의 돌그림에서 항아리에 이르는 작품의 과정을 보면 실제 대상을 모사하는 방식에서 시작되었지만, 모방된 이미지 자체가 실재와 충돌하는(혼돈하는) 차원을 넘어, 드디어 이미지가 현실을 넘어선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선언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현실을 넘어선 세계란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단계를 넘어선 세계이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새롭게 품은 세계가 된다. 

고영훈은 이러한 실재로서 환영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극대화하기 위해 사물이 캔버스 공간의 앞으로 돌출되어 튀어나오도록 연출한다. 그의 작품이 입체영상을 보는 듯한 3차원성을 띠게 되는 것은 바로 오브제 이미지를 허공에 부유하게 보이도록 장치한 그림자 효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책이나 신문의 페이지를 배경으로 콜라주해 배치함으로서 착시현상을 심화시켜 왔다. 작가의 조형 탐구는 여기서 중단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발전 된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다수의 캔버스에 항아리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서 항아리에 가해진 시각의 복수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초점에 의해 흐려진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배치해 그림으로써 항아리 그림에 시간성을 함께 표상하려 한다. 고영훈의 항아리 그림은 이 단계에서 3차원적 공간을 넘어 시간을 더한 4차원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4차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고영훈의 예술은 두 가지의 형식을 덧붙여 시도한다. 첫 번째는 배경의 공간을 텅 빈 상태로 남겨두는 방식이다. 이는 캔버스의 내부의 공간을 캔버스의 전면과 후면으로 확장시키면서 착시효과를 통해 평면의 일루전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연계 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두 번째의 시도는 복수시점에서 포착한 항아리의 특성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종합하거나, 점차 사라져가는 항아리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배열하는 다면화의 방식이다. 한편, 자신의 초상화와 아들의 초상화 사이에 초점이 흐려진 인물상을 배치시킨 작품 <제너레이션> 시리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존재의 원형을 가시화 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려는 경우다. 그의 이번 개인전 명제인 <있음에의 경의>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유전하는 원형적 존재와 그 순환의 법칙성에 대한 경의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고영훈의 작업은 캔버스에 그려진 일루전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일루전은 2차원적 평면을 벗어나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되며 캔버스의 앞과 뒤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리고 4차원의 시간을 동시에 품음으로서 관념의 영역으로 보는이를 안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그린 항아리와 화초 그리고 인물은 보여지는 것 이상의 세계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착시의 세계를 넘어 정신의 세계를 문제시 삼는 차원으로 전환하려는 작가의 태도의 결과일 것이다. 예술에 거는 기대가 현실의 세계를 재현하는 모방의 시대를 벗어난 지도 오래며, 인간의 내적 감정의 세계를 드러내던 표현의 시대도 마감된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의 가치가 인간의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면 가상 혹은 환영이 실재로부터 연유되었다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환영과 실재가 융합되는 세상, 나아가 환영이 실재를 지배하는 세상을 회피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사발, 2013, Acrylic on Plaster, Canvas, 90.5x221cm


3. 창조의 소명에서 소요하는 삶으로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가진 작가와의 대담에서 고영훈은 자신의 예술적 노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20대에 나는 신이되고 싶었다. 60이 지난 지금 나는 소요하는 삶을 살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가 1928년에 그린 <불가능의 시도(Attempting the Impossible)>(3차원 공간에 인체를 붓으로 창조하는 화가를 그린 그림)의 경우에서처럼 고영훈의 청년기는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무너트리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해 왔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재와 환영으로 구분되는 르네 마그리트의 이분법적 사고 영역에서 언제나 현실적 실현 불가능의 선고를 받았다. 사물과 이미지의 관계가 구분되는 기존의 지각체계에서는 마땅한 결론이라 할 시도였으며 신적 능력(관념을 실재로 구현시키는 능력)을 취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환상이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에서 작가는 불가능으로 보였던 일을 가능태로 이끌어내려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실재와 환영의 간극을 허물어 버리고 일원론적 세계로 합일하려는 시도의 결과이자 소요하는 삶이 제공한 선물이자 구경꾼의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가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있는 것에 대한 경의>는 눈앞의 풍경이나 사물이 스스로의 존재양태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지닌 시각적 대상으로 변주시키는 것은 바로 소요하는 마음이라는 점을 밝히는 작가의 고백이라 할 것이다.

고영훈의 소요하는 삶의 태도는 혁명적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시지각 방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적 수용의 태도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에서 항아리에 이르는 고영훈의 치열하고도 고난한 작업 노정은 이러한 시지각 방식에 도달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대상의 형상을 과감히 지워버리고 궁극적으로 평평한 색면을 통해 절대성에 도달한 미니멀리즘의 시대에, 고영훈은 대상의 형상을 극사실적 묘사를 통해 대상에 개입되는 실재와 환영의 벽을 혼돈시켰고 이윽고 실재와 환영의 영역을 하나의 지각현상으로 받아드림으로써 현전하는 존재물을 직관으로 바라보는 구경꾼이 된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이 회화를 평면구조를 지닌 하나의 독립된 오브제로 인정하는 순간 회화의 종말을 맞게 되었다면, 고영훈은 극사실적 재현방식의 이미지를 통해 회화를 종말의 벽으로부터 다시 회복시키려 한다. 

고영훈이 캔버스에 그린 이미지는 환영일 뿐 결코 피사체와 동일한 실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캔버스에 그려지기 이전에 두 눈에 포착된 사물의 이미지는 실재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지각적 대상으로써 망막이라는 감관 위에 비추어진 허상 이미지는 실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아가 우리의 지식과 신념과 감각은 모두 이 망막 이미지라는 허상적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면 실재라는 것의 본질은 사고의 체계에서 이미지와 동일시될 가능태로 제시될 수 있다. 

고영훈의 일원적 시지각 태도는 색즉시공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동양적 사고의 메커니즘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의 실험적 노정이 어떠한 예술적 가치로 나타나게 될 것인지는 현대의 사상과 시지각 이론의 변화에 따라 달리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의 관심이 되는 것은 고영훈이 전개해 온 환영적 회화세계의 원천이 소년시절의 바다에 대한 시지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작품은 그 체험의 기억을 동시대의 선구적 경향인 극사실적 조형언어로 펼쳐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 안에서는 돌멩이와 작약과 나비 그리고 달항아리와 각종 오브제들이 노닌다. 그것은 이제 실재와 환영의 벽을 넘어선 세계를 지향하고 있으며 사색과 명상의 정원을 소요하는 작가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2014.4)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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