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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미술문화 기반시설의 현상과 비전

김영호

제주 미술문화 기반시설의 현상과 비전



I. 제주의 보물로서 자연재와 문화재 


21세기의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 추진을 위한 특별법(2002년)이 공포되고 화산섬과 용암동굴계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2007년)된 이래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제주도는 정부의 4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된 ‘문화융성’에 부응해 구체적인 사업 사업방향과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제주도에는 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등의 정부기관과 도 행정부의 문화관련 부서 외에도 제주국제협의회, 제주문화서포터즈와 같은 민간 법인을 구성해 제주의 자연과 생태 분야에 초점을 둔 사업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부적인 사업 대상을 보면 한라산 일대의 오름, 동굴, 곶자왈 등의 자연재와 그 안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생태계, 그리고 신화, 언어, 민속, 예술 등의 문화재를 총괄한 콘텐츠의 개발이 주목된다. 

제주도가 추진하는 자연과 생태 분야의 사업대상은 한편 지나치게 광범위해 보인다. 하지만 제주의 문화는 그 문화를 배태시킨 환경의 산물이며 따라서 환경으로서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은 학술, 문화, 관광, 생태의 각각 뿐만 아니라 분야간의 융합적 연구가 불가피한 것이다. 제주 문화형성의 원천으로서 다루어지는 바람과 돌과 오름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바람과 돌과 오름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돌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람과 돌이 문화로 재생산된 것이 바로 신화, 언어, 민속 그리고 예술이다. 신화, 언어, 민속, 예술에는 제주의 자연과 생태의 구조적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자연과 생태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함께 스며있다. 제주도 문화정책과 행정 그리고 문화관련 단체들이 다루어야 할 과제는 바로 이 자연과 생태가 어떻게 복잡한 문화적 구조로 수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숙고하는 일이다. 

제주도의 문화에 대한 숙고가 중요한 이유는 명백하다. 문화란 정신의 산물이자 이데올로기 생산의 원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만들어낸 공동체를 결속하고 문화적 자존감을 높이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주인이 제주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자연과 생태를’-‘문화와 예술로’-‘이데올로기화해’-‘한단계 높은 차원의 자연과 생태로’라는 선순환 구조가 튼실해야 한다. 그래야 제주인이 제주도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필자에게 제주인은 제주출신 뿐만 아니라 제주의 문화형성에 동참하는 도내외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최근 우리가 목격하듯이 국제자유도시의 열린 문으로 쏟아져 유입되는 외래문화와 외래자본 그리고 외국교육시설을 관리하려면 제주의 이데올로기는 강성해져야 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제주의 문화로부터 그리고 그 문화는 제주의 자연과 생태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제주뿐만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다듬어져야 국제자유도시의 주인 자리를 당당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후손들이 외래자본의 노예로 혹은 아메리카 인디언들 처럼 ‘보호받으며’ 살아가게 방치할 순 없다.    


II.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미술문화

    

이 글의 중심화두는 바로 제주문화, 좀 더 구체적으로 제주미술문화이다. 제주문화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을 다루는 기반시설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제주문화는 제주의 자연으로서 오름과 동굴 그리고 바람과 돌에서 온 것이라 했다. 그러나 기생화산이나 화산동굴 그리고 태풍이나 기암절벽이 그대로 문화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천혜의 경관을 지닌 자연이라 해도 그대로 문화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연을 보면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가치 면에서도 예술의 아름다움과 차이가 있다. 이를 밝힌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었다. 일찍이 헤겔은 우리가 체험하는 미의 대상은 자연미와 예술미가 있지만 가치는 예술미에 더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예술미는 정신으로 빚어낸 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오름을 그린 그림이나 사진에서 느껴지는 일반인들의 감흥은 오름을 직접 대하며 바라볼 때 느끼는 감흥과는 차이가 있다. 자연 자체에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로 번안되었을 때 이념으로 전환될 수 있다. 오름의 정신화란 문학이나 그림 같은 예술의 형식과 구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강요배와 고영훈의 그림 도판) 물론 오름을 그린 그림이 모두가 정신화 즉 예술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뛰어난 예술성이란 오름에 대한 개인의 독자적인 성찰의 결과이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정신성을 드러내는 형식구조와 내용이 합치될 때 최상의 예술작품이 탄생된다고 헤겔은 말한다. 보편적 정신을 드러내는 형식과 구조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며 체계화될 때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역으로 인간들의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거나 개인에게 자존감으로 다져진 삶에 지표를 제공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제주문화는 제주인의 자연과 생태에 대응하며 형성된 정신, 즉 이데올로기가 빗어낸 결실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언급한 이상 이 말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부언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종교, 교육, 예술이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의 유명한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국가의 통치를 위한 핵심적 요소가 바로 이데올로기이고 그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기구가 이른바 교회와 학교 그리고 미술관 등의 문화시설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대비되는 것이 ‘억압적 국가장치’로서 경찰, 군대, 감옥, 국회, 법원 등을 들고 있는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비해 억압적 국가장치는 단기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며 표피적인 힘으로 나타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밝히고, 예술과 종교와 교육의 중요성에 손을 들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근본적이며 영속적인 장치가 바로 문화라는 점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증하고 있다. 


III. 제주도의 미술문화 기반시설의 강점과 약점 


이 글의 주제인 ‘제주 미술문화’로 초점을 좁히도록 하자. 제주도 내 미술문화 기반시설의 현황과 실태를 조사하는 일의 중요성은 유형문화유산의 관리 실태를 조사하는 일 만큼 중요하다. 문화예술진흥법이 규정하고 있는 문화기반시설에는 도서관, 박물관 및 미술관, 문예회관, 지방문화원이 있다. 이 문화기반시설들은 모두 문화관광체육부 소관법률인 「도서관법」, 「문화예술진흥법」,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지방문화원진흥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시설들이다. 이 중에 이 글의 주제가 되는 ‘미술문화 기반시설’은 제주의 경우 다양한 유형의 박물관과 미술관, 제주문예회관, 제주문화원을 꼽을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2013 전국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2012년 31일 현재 제주도에는 등록 박물관과 미술관이 총 76개소, 문예회관이 2개소, 문화원이 2개소가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박물관이 58개소(국공립 16, 사립 41, 대학 1), 미술관이 18개소(국공립 6, 사립 12)의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우리나라 전체를 두고 볼 때 인구 대비 박물관과 미술관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과연 관광지 다운 숫자다. 이러한 숫자는 상대적으로 제주도의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연구조사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제주도 내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문화관광체육부의 정책과 소관법률에 의해 직접적으로 감독을 받는 시설인데다 비영리 기관으로 분류가 되어 있어 수익사업을 중점적으로 실행하기에는 제약을 받게 된다. 하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이 지역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정부는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에 대해 학예인력과 해설사 그리고 인턴 등의 인력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일년에 한 차례 특변전시 프로그램 지원사업도 실행하고 있다. 제주도가 박물관 천국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음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한 흥미와 볼거리 위주의 박물관이 난립으로 이미지를 흐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제주도의 역사나 문화 정체성과는 무관한 소장품을 내세우는 종합백화점식 전시관들도 문제다. 문화관광 패러다임이 바뀌는 오늘의 상황에서 제주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제주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상품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제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제주는 조선과 일제 그리고 근현대사를 거치며 한국의 역사가 집약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유배와 훈련소 그리고 침략전쟁의 유적들을 품고 있어 자체가 역사박물관의 기능을 가진 지역이다. 그리고 제주의 신화, 생태, 민속, 무속, 언어 그리고 예술 등의 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지역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IV. 제주도립미술관과 돌문화공원에 거는 기대  


이상과 같이 제주도에는 미술문화 기반시설들이 상대적 우위에 자리 잡고 있고 이를 통해 제주도의 고유한 문화적 이데올로기 생산의 재원으로서 활용될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들의 가치를 드러낼 전문인력과 조직을 살펴보면 아직도 적지않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제주도는 최근 도내의 박물관 및 미술관에 대한 운영 실태 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것을 알려져 있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개선방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두 시설의 사례만을 들어 보겠다. 

제주도가 타지역과 차별화되는 우수한 미술문화 기반시설을 확보하고 있으나 하드웨어에 비해 아직도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첫 번째 사례가 제주도립미술관의 경우다. 제주도미술계의 숙원사업이었던 미술관이 개관된 시기가 2009년 6월이니 벌써 4년이 지났다. 천혜의 자연과 어우러진 미술관 건물은 제주도의 명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4년간의 미술관 사업과 운영 실태를 보면 아쉽기 짝이 없다. 제주도가 세계의 이목을 끌며 평화와 생명의 섬으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환태평양의 눈으르 자처하고 동북아시아의 문화발전소 역할을 선언하며 출범한 미술관이 이러한 환경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도내외의 미술관 전문인들은 언론과 특강을 통해 제주도립미술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유로서 미술관의 조직과 운영체제를 들고 있다. 미술관사업의 기획과 연구를 담당하는 학예실의 부재가 문제의 핵심이다. 현재 제주도립미술관에는 학예기능과 행정기능이 통합된 운영팀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운영팀장이 순환직 공무원으로 보직처리가 되어 있는 구조다. 이러한 구조와 결제라인으로는 국내외의 타 미술관들과 네트워크를 운용한 프로젝트와 마케팅을 실천하기란 어렵다. 국내의 국공립미술관 중에서 학예실이 없는 유일한 미술관이 제주도립미술관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국제자유도시의 정신문화와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일을 담당하는 문화기반시설에 전문 부서가 없다는 것은 신중히 검토해야 할 대목이다.  

두 번째 사례는 제주돌문화공원(박물관) 내에 자리잡은 오백장군갤러리의 경우다. 돌 테마와 관련해 제주의 특화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건립된 오백장군갤러리는 2010년에 문을 연 이래 도 내외 미술인들의 관심을 끄는 시설로 기대를 모아왔다. 규모 면에서도 비엔날레나 축제 등의 국제행사를 유치할 만 한 전시실과 수장고 그리고 공연장과 카페테리아를 확보하고 있어 대표적인 전시시설로 손색이 없다. 제주돌문화공원이 계획하는 또 다른 문화시설로서 2020년에 완공될 ‘선문대할망전시관’이 완성되면 문화산업의 지형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오백장군갤러리를 바라보는 언론과 미술계의 시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제주도립미술관의 경우처럼 대형 전시시설이 완공된 후에 이를 가동할 전문인력과 조직 그리고 운영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관 이래 추진되어 온 오백장군갤러리의 전시기획 컨텐츠를 조사해 보면 이러한 우려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 그리고 전시관은 모두가 박물관의 범주에 속하는 문화시설들로서 전문성 없이 운영될 수 없는 시설이다. 돌문화공원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비판을 이르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방자치제도 시행 이후 전국에 건립되고 있는 대형 문화기반시설들이 난립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고려하면 오백장군갤러리의 정상적 운영을 위한 전문인력과 조직에 대한 도 행정부서와 도민들의 관심이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기라 생각된다.         

      

V. 제주도가 ‘환태평양의 눈’이 되려면 


제주도의 미술문화 정책과 행정은 차별적이고 특화된 영역을 발견하고 집중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주도내의 문화기반시설의 실태를 냉정한 시각으로 연구조사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사업의 방향이 제주의 자연과 생태에 대응하며 살아온 제주인들의 정신을 문화 이데올로기로 구현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세우고 이를 통해 제주인이 제주도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각성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는 최근 세계 7대경관 브랜드화로 세계인이 찾는 제주를 육성하고 자연자원을 이용한 녹색성장도시를 조성하고 관광 활성화에 투자를 확대한다고 선언했다. 이와 관련해 제주도립미술관과 돌문화공원 등의 문화기반시설이 제주 지역의 미래성장 동력사업의 한 유형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 실천방안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제주의 대표적 미술관의 위상을 세우고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 컨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제주 미술인들의 통 큰 열정과 추진력이 필요한 시기다. 제주도가 아시아의 현대미술, 나아가 환태평양 지역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질 높은 문화 콘텐츠로 재생산해 수출하는 문화발전소가 되기 위해서는 제주도내의 미술문화 기반시설의 조직과 인력을 재정비하는 정책안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2014. 4. / 미술세계)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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