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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 꽃 이미지 실험

김영호

꽃 이미지 실험


십여 년 전. <꿈과 형상> 이라는 제하로 개인전을 열었을 때였다. 김은경은 투명 아크릴 판면에 수성 아크릴 안료를 사용해 감각적인 추상 이미지를 그린 작품 연작을 내놓았다. 당시 전시 서문에서 나는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조형적 특성에 특별히 주목해 ‘강렬한 색채대비 효과’, ‘이미지의 이중적 구조’, ‘비정형적 형상’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면 형식의 뒤편으로 은닉된 주제의식이 꽃이나 종려나무 그리고 별밤과 바람의 기억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구체적 형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적 서정이 작가의 작업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색채와 표현형식이 작가가 채택한 삶의 노정과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모색하기를 기대했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 김은경의 작업은 여전히 투명 아크릴 판면에 수성 아크릴 안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조형적 방식이나 주제의식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작가의 대전 작업실을 방문해 작품들을 일견했을 때 비평을 하는 나로서 일종의 당혹감을 느꼈다. 시간이 정지된 상황. 세월이 괄호 속으로 사라져 버린 채 어제의 작가를 오늘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을 내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작가의 일관성을 탓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 변하고 변하지 않은 요소들을 따지는 일은 결국 작가의 세계관이나 예술의욕에 관한 문제이므로 나는 이 점에 주목하기로 한 것이다.  


김은영의 작업은 일관되게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디자인적 요소를 품은 그의 작업은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를 묻게 한다. 특정 사물이 이미지로의 전환을 거쳐 그림으로 표상되는 과정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다. 눈은 사물을 받아드려 안구 뒤편의 망막에 상을 맺게 하는데 이때 망막에 비추어진 사물은 사물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외형, 즉 빛에 의해 운반된 사물의 허상이다. 그리고 그 상이 망막에 배열된 신경세포를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 이미지다. 이 때 주목할 부분은 상이 이미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관념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관념은 작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예술의욕이며 세계관이다. 망막에 맺힌 상에 관념이 개입되어 이미지가 형성되고 뇌에 입력 저장되는 것이다. 


김은영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뇌에 입력된 이미지를 화면에 재현하는 활동이다. 꽃이나 식물 따위의 사물을 그리지만 그림마다 제각기 다른 모양과 분위기를 지니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망막에 비친 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뇌에 저장된 이미지를 토해내어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망막에 비친 상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것이 예술인 시기가 있었지만 사진기가 발명된 19세기 이래 그림은 대상의 외형을 모방하고 재현해 내는데서 벗어나 개인의 관념, 즉 어떤 생각이나 인상이 적극 반영된 이미지를 표상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른바 모더니즘 미술은 대상이 아닌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상을 그리는 것이었으며 인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념은 20세기를 거치며 그림을 추상으로 변화시켜 왔던 것이다.  


김은경의 그림은 모더니스트의 실험적 노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꽃의 이미지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감으로 환원된 꽃의 이미지가 강하게 어필되고 급기야 꽃의 이미지는 형식이 된다. 작가가 화면에 표상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꽃이나 식물의 외상을 넘어선 지점에서 나타나는 순수 조형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색이며 형이며 물감이고 마티에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적 요소들은 순수성을 향해 끊임없는 노정을 계속해 왔다. 10년이 넘는 시간은 작가의 작업의 중심이 되는 이미지의 형식에 대한 수고를 끊임없이 감내해온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은경의 작업에 숨겨진 실험의 비밀은 따로 있다. 색과 형 그리고 물감의 물성과 마티에르를 넘어선 영역의 것이다. 이른바 공간에 관한 것으로서 시각적 환영 혹은 환상이라 부를 수 있는 차원의 공간을 위한 실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꽃이라는 대상이 시각적 이미지로 바뀌고 다시 아크릴 판면 위에 표상되면서 시각적 환상을 피워내는 실험에 작가가 10년 이상의 세월을 바쳐온 것이다. 김은경의 작업에서 이미지가 중요하다면 그 이유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험의 차원으로 변주되는 단계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개입되는 관념이 작가의 예술의욕 혹은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김은경의 작업에서 환상 공간은 다차원적 구조로 나타난다. 중첩된 투명 아크릴 판에서 얻을 수 있는 평면과 입체, 표면과 배면, 단일면과 복수면 따위의 여러 영역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그의 작품은 상호작용의 복합체를 이루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인식되는 공간은 물리적 구조를 지닌 공간이다. 가령 사각의 아크릴 판면 위에 그려진 이미지가 복수로 중첩되면서 이차원적 평면이 삼차원적 공간으로 확대되고, 2-3밀리 두께의 투명 아크릴 판면 위에 그려진 꽃의 이미지가 뒤집혀 배면으로 제시되면서 색의 중첩과 투사 현상이 역전되는 효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2중 혹은 3중으로 겹쳐진 투명 아크릴 판은 그 자체가 3차원의 구조를 품고 있다. 이 모든 공간에 배치된 꽃의 이미지는 조형적 구조와 구성 그리고 색채의 물성과 질감이라는 형식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들이다.


김은경의 작업에 나타나는 형식과 구조의 문제가 정작 가치를 지니게 되는 지점은 그것이 작가의 예술의지 혹은 세계관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는데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심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관념이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지배하는 관념은 이미지의 성질을 규정하는 요소인 동시에 작가의 작품에 가치를 결정지우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김은경의 꽃 그림 앞에서 영적 체험 혹은 환상 체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뇌를 형성하는 신경세포의 경이로운 활동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체험은 작가의 조형적 역량과 예술의지가 만들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1)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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