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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미술 국내전시 40년의 명암

김영호

프랑스미술 국내전시 40년의 명암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사가)

 

프랑스미술은 프랑스에서 발흥한 미술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프랑스 땅에서 활동한 작가들이 꽃피운 미술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반 고흐나 피카소 그리고 샤갈이나 달리 같은 작가들은 이방인이었지만 프랑스의 특정 미술경향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프랑스미술의 범주에 속하는 작가들이었다. 사실 프랑스미술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살았던 외국작가들 덕이다. 양차대전 사이에 파리 몽파르나스 지역에서 거주하던 외국인 작가들을 지시하는 ‘에콜 드 파리’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인과 일본인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서양인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인으로서 유학중이던 이종우와 배운성도 이 시기에 파리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프랑스미술이 미술관 전시를 통해 한국에 집단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였다. 한국과 프랑스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된 1886년이고 보면 진척이 더딘 편이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조선왕조의 고종황제는 외교공관을 통해 서양의 기술자와 미술가 등을 불러들이고 한국정부의 대신을 프랑스로 파견하는 등 문화교류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과 프랑스의 우호적 관계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현지에 전통양식의 ‘대한제국관’을 설치하는 단계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서방지역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일본의 간섭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1876년 조선과 일찍이 수호조약을 맺은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급기야 1910년 한국을 일본으로 병합시켰다. 이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1945년 해방이 될 때 까지 서양과의 직접적인 외교 채널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통해 진행되었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이 공식적 교류를 재개하게 된 것은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프랑스 대사관이 재개관 되면서였다. 그러나 뒤이은 한국전쟁에 의해 교류활동은 다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신임 프랑스 대사가 입국하면서 비로소 양국의 외교 관계는 정상화 되었고 이때부터 한국 국적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건너가게 된다. 이 시기에 파리에 도착한 작가는 남관(1954), 손동진(1954), 김흥수(1955), 박영선(1955), 김환기(1955), 함대정(1956), 이성자(1958), 이응로(1958), 이세득(1958), 변종하(1959) 등이 있으며 향후 한국의 화단에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통상 1957년을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한국미술은 전후 프랑스가 일으킨 앵포르멜(Informel) 운동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태동기의 한국화단이 파리화단과 밀착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시기의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교류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짝사랑으로 표현되는 문화교류의 불균형은 정부기관 차원의 전시회에서도 예외없이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것도 1969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한국 최초의 국립미술관으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최근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내놓은 전시회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의 첫 프랑스 미술 전시는 197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 달 동안 열린 <현대 프랑스 명화전>이다. 조선일보사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며 주최한 이 전시에는 아쉽게도 판화 100여점과 타피스리 20여점이었다. 그러나 출품작가들의 이름을 보면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전시회였음을 알 수 있다. 아르프, 아틀랑, 브라크, 샤갈, 들로네, 뒤피, 에른스트, 포트리에, 자코메티, 그리스, 아르퉁, 칸딘스키, 레제, 마송, 마티스, 미로, 피카소, 루오, 술라주, 드 스탈, 바자렐리, 비용에서 자우키에 이르는 43명 작가들의 판화 2-3점이 출품된 것이다. 프랑스 예술국장 베르나르 안토니오스는 서문을 통해 이 전시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파리를 현대미술 창조의 중심지가 되게 한 예술가들’이 망라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듬해인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현대미술을 제대로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를 개최했다. <프랑스 현대 유화전>이라는 주제로 50명의 작가들이 제작한 회화작품 59점이 소개된 것이다. 역시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이 전시는 앵포르멜을 비롯한 서체적 추상에서 기하학적 추상에 이르는, 전후 25년의 역사를 수놓았던 작가들이 망라되었다. 출품작가들의 명단을 보면 아감, 알레친스키, 아펠, 드브레, 들로네, 포트리에, 한타이, 아르퉁, 마티유, 메사지에, 미쇼, 폴리아코프, 에오펠, 소토, 술라주, 바자렐리, 자우키 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을 대여한 곳이 프랑스 엘리제궁, 국립근대미술관, 갤러리 드 프랑스, 장 푸르니에, 갤러리 마그, 갤러리 드니즈 르네 등 당대 최고의 컬렉션이라는 점에 비추어 교류전에 대한 프랑스 측의 성실함을 파악할 수 있다. ‘다양성과 절제의 감각’이라는 제하에 서문을 쓴 도라 발리에(Dora Vallier)는 전후 프랑스 미술의 특성을 ‘반작용에 의해 계승되는 변증법적 방식위에 정립된 연속성’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논지의 글은 관 주도의 전시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미술의 생명성과 저항성을 불어넣는데 기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교류의 물꼬를 튼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미술을 지속적으로 소개했다. 1970년대가 지나는 동안 국내에서 개최된 대표적인 전시회로는 1972년 <밀레 특별전>, 1974년 <피카소 특별전>, 1976년 <인상파전>, 1977년 <프랑스 18세기 명화전>, 1979 <프랑스미술 영광의 300년전>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전시회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했다는 점은 특이한 사항이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과 전문직 학예사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음을 대변해 주고 있으며, 그 결과 전시회를 둘러싼 홍보와 교육 그리고 기대효과의 측면에서 국가 차원의 문화 정치적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이상의 전시회들은 프랑스미술을 국내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한국의 대표적 언론이었던 조선일보사의 대대적 홍보 기사들은 밀레와 인상파 작가들 그리고 피카소와 샤갈이 국내 대중들의 뇌리에 새기는데 나름의 역할을 담당했다. 

   

각설하고, 프랑스미술이 동시대 한국화단에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전시회는 1982년 서울미술관이 개최한 <프랑스 신구상회화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회는 앵포르멜 미술을 대대적으로 선보인 1971년 <프랑스 현대 회화전> 이후 가장 중요한 프랑스미술 국내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시회에는 1950년부터 당대까지 파리화단에서 주목받고 있던 구상화가로서 발튀스, 마타, 엘리옹을 위시하여 1960년대 이른바 ‘서술적 구상’을 주도했던 모노리, 에로, 레칼카티, 아이요 등 25명의 작품 25점이 소개되었는데, 한국화단에 신형상주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기폭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 프랑스 신구상회화는 196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형상주의 미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태동된 실험적 경향이었고, 1980년대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자유구상을 비롯해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태리의 트랜스아방가르드, 미국의 배드페인팅과 공조하면서 대륙간의 경계를 넘어 국제적 경향으로 확산되었던 미술이었다. 이 경향의 미술가들은 예술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내세우던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롯해 삶의 전반적인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고 그것을 새로운 조형어법으로 구현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프랑스 신구상회화전>이 개최될 당시 한국 국내의 상황을 보면 앵포르멜에 대한 반성과 미니멀적 미술에 대한 극복으로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는 집단적 움직임이 진척되고 있었다. 조선일보 이외의 언론사에서도 뒤늦게 문화사업에 팔을 걷어 붙였는데, 그 중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서 각각 새로운 형상성을 내세운 공모전을 출범하면서 화단의 다원성을 추구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신구상회화전>은 시원한 가뭄의 소나기처럼 미술계를 적시며 구상회화의 다양한 싹들을 돋아나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신형상 미술이 때마침 한국에서 때맞추어 등장한 민중미술로 흡수되면서 사회 운동의 경향으로 축소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치적 선동과 구호의 지표아래 조형적 성과를 일구는데 소홀함으로서 한국의 민중미술이 국제적인 경향으로서 신형상주의 미술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평가는 후에 민중미술에 대한 비평적 지표가 새롭게 정비되면서 정리되어야 할 대목으로 남아 있다. 


198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국내에서 개최된 프랑스미술전은 이전에 비해 화단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85년의 <로댕전>, 1986년의 <프랑스 20세기 미술전>, 2000년의 <오르세미술관 한국전> 등 여전히 인상주의에서 앵포르멜에 이르는 과거의 거장들을 소개했으며, 새로이 문을 연 사립미술관으로서 호암미술관, 워커힐미술관, 선재미술관, 환기미술관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또한 1988년 개관한 예술의전당과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기획사를 끼고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치루면서 흥행 위주의 전시사업에 몰두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특별히 국내화단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 주목할만 한 전시를 꼽자면 1995년 호암갤러리가 뷔랭과 라비에 등을 초대해 마련한 <프랑스설치작가 8인전>, 국립현대미술관의 1997년과 2008년에 각각 개최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전>과 <아네트 메사제전>, 환기미술관이 2006년에 기획한 <공간의 시학전>, 서울시립미술관이 2006년 기획한 <로베르 콩바스전>, 그리고 21세기 프랑스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소개한 2011년 <오늘의 프랑스 미술전>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화교류사 차원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보면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일방통행의 역사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이후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적 교류는 미술관과 갤러리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활성화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한편, 양국의 문화적 외교관계에 대한 지원이나 민간 차원의 교류에 대한 인식도 이전과 달라지게 되었다. 1997년 프랑스에서 이우환이 처음으로 파리 국립주드폼 미술관(Galerie nationale Jeu de Paume)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2004년 김창열이 뒤를 이으면서 미술관 차원의 교류활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전쟁과 국토재건의 시대를 거쳐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프랑스미술 국내전이 한국화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미술관 전시는 국내의 일반대중과 미술애호가들에게 프랑스미술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파리가 예향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도록 이끄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문화 교류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수용과정의 문제점은 한국미술사 기술에 있어 전후 프랑스 미술에 대한 미술사적 종속현상을 심화시켰다는데서 드러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현대미술의 시점을 앵포르멜적 경향으로 설정하거나 한국의 단색평면주의 회화를 미니멀적 경향으로 빗대어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것에서 나타나며 그 결과 심각한 미학적 오류를 발생시켰다. 또한 새로운 형상미술이 상투적 리얼리즘 미술로 흡수되거나 미술계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양분되는 가운데 다양한 형상성을 내세우는 미술의 경향들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한 면도 무시할 수 없다. 글로벌리즘이 보편화되고 문화적 교류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은 작금의 상황에서 특수한 문화적 환경과 전통의 산물인 프랑스미술을 비롯한 구미미술의 수용과 정착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점들을 분석하는 일은 더 이상 미술 일이 아니다. 아울러 과감한 반성과 극복을 위한 혜안을 세우는 것이 오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외국미술 국내전시 60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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