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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겸 / 사물과 그 이미지 사이에서

김영호

김순겸은 대상 재현적 사실주의 경향에 속하는 작가로서 사물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10년 이상을 천착해오고 있다. 그동안 그가 선택한 화제(畵題)는 꽃에서 그릇 그리고 고가구와 등잔에 이르는 오브제들로서 특정 부류에 국한하지 않고 범주가 다양하다. 주제를 선정하는데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는 이유는 정작 그의 예술이 지향하는 바가 사물 자체가 아닌 사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작가가 세밀한 기법으로 그려낸 꽃이나 그릇은 고가구나 등잔 등의 사물과 함께 화면에 배치됨으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독특한 환영을 제공해 왔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사물들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서로 상충되거나 조화를 이루면서 다양한 의미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 과정에서 사물들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기호가 되었고, 작가는 이러한 내러티브가 있는 풍경에 <기억넘어-그리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김순겸의 ‘놋그릇’ 연작들은 이전과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사물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파헤치려는 작가의 의도가 보다 명확해 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간의 작품을 보면 화면위에 그려진 꽃과 그릇은 일련의 서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다루어 졌다. 수반에 걸쳐진 가지에 활짝 핀 목련의 꽃무리나, 놋그릇에 담겨 넘치는 물의 과장된 표현은 일종의 감성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서정성은 실재로 꽃꽂이된 화초나 정한수를 담은 사발에서 느껴지는 서정성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작에서는 이러한 서정적 메시지가 크게 축소되고 있으며, 사물 자체의 물성과 형태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이미지와 그 환영적 효과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통해 거두게 된 일종의 체험적 성과로서 그의 작업이 심미적 단계에서 인식론적 단계로 올라서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한편 김순겸의 근작들은 일상적 사물을 그림으로 재현하는 방식에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서술적 묘사의 방식에서 해석적 표현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관객들에게 각각 다른 감흥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전자는 감각적 설명에 호소하고 후자는 시지각을 둘러싼 인식의 문제에 접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물 자체의 환영적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연극적 장치들을 과감하게 화면에서 제거해 버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최근작에서는 수반에 담긴 목련이나 고가구나 문짝이 함께 어우러지는 정물화풍의 배치방식을 찾아볼 수 없다. 작가가 표상하는 세계는 더 이상 삶의 공간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의 사물이 캔버스 표면 전체를 덮으면서 배치되어 있고 사물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재료의 물성과 그 표면에 반영하는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제 김순겸의 화면에 자리 잡은 것은 거대한 하나의 놋그릇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처럼 캔버스위에 그려진 김순겸의 사물은 놋그릇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놋그릇을 둘러싼 기능과 삶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의 역할로부터 벗어나 어떤 내재율을 지닌 환영적 이미지로 존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지와 환영의 미학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김순겸의 근작들은 관객들에게 놋그릇 작업은 보는 이들에게 사물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직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른바 사물 자체와 사물의 환영 사이에 발생하는 차별성을 인식하고 거기서 미적 감흥을 얻고 즐기도록 요구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시각적 장치들을 도입하고 있다. 우선 캔버스 전체에 놋그릇 하나만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 그려 놓았고, 놋그릇의 물성을 강화하기 위해 표면의 질감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딱딱한 놋그릇 안에 부드러운 유기적 물질로서 물의 이미지를 담아놓은 것이다. 그릇에 채워진 물의 이미지는 파장이나 반영을 과감하게 생략해 하나의 색면으로 처리함으로서 상상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배경 역시 삶의 공간이 아닌 캔버스의 바탕 자체로 남겨두었고, 거친 붓질의 흔적을 통해 회화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남다른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결국 놋그릇이 있는 풍경이 아닌 놋그릇이 만들어내는 환영적 이미지의 문제로 우리의 시지각을 안내하는 요소들이다. 김순겸의 놋그릇 그림은 사물의 서술적 메시지를 넘어 사물의 본성을 인식하는 차원으로 보는 이를 안내하는 것이다.

회화 작품에서 환영적 이미지를 인식하는 일은 어떤 가치를 지닌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사물의 실재와 그 이미지의 차이를 깨닫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광고 이미지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사회에서 실재와 환영 사이의 차이를 직시하고,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일은 더이상 간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사물 그림을 사물 자체와 혼동해 바라보는 태도는 서구미술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는 이미지로 가치가 있으며 사물 자체와 별개의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술의 새로운 노정은 시작되었다. 모더니즘 이후에 등장한 극사실주의 회화 역시 사물의 이미지가 회화의 본성으로서 허구적 이미지라는 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에서 등장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회화에서 환영적 이미지를 인식하는 문제는 현실적 삶에 종속된 이미지가 아니라 사물의 본성과 실존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이미지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김순겸의 놋그릇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놋그릇 이미지의 환영에 주목하게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이미지의 환영이 우리에게 새로운 미적 감흥을 선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미적감흥은 사물의 실체가 이미지로 전환되고 그 이미지가 다시 독립된 실체로 읽혀지는 순환의 고리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 얻어지는 쾌감이다. 그것은 또한 정보 이미지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현대사회의 현실을 인식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는 기쁨이기도 하다. (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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