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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선, 생각의 집 그러므로 존재의 집을 짓다

고충환



최인선, 생각의 집 그러므로 존재의 집을 짓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나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란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탐구과정이다. 이 질문에 철학자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적 언어로 답을 찾아가지만, 작가는 눈앞에 있는 물질(물감)과 자신과의 치열한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되는 사고의 궤적이 캔버스 위에 물질로 그려지면서 회화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회화는 물질이고, 모방이며, 현상 너머의 본질을 투영하고 반영하는 허구적 숙명을 가진다. 나는 본질 자체가 될 수 없는 회화의 한계를 받아들여 오히려 이를 극대화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회화라는 허구적 방법론은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대상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적합한 도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 작가 노트

1990년대 초반 작가 최인선은 물성과 구조에 바탕을 둔 <영원한 질료> 시리즈를 통해 예술을 위한 예술의 길을 열었다. 원래 보들레르의 낭만주의와 오스카 와일더의 예술지상주의에서 비롯한 개념이지만, 작가의 경우 그 개념은 이보다는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해 이후 추상미술을 예고했던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화는 회화다(회화일 뿐), 라는 동어반복으로 이해해도 좋을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순수한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입장이다. 형식요소를 회화의 본질로 본다는 점에서 형식주의, 회화를 형식요소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환원주의, 그리고 순수한 형식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순수주의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논리적으로 추상미술이 가능할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나의 점을 회화의 형식요소로 볼 수도 있지만, 한갓 점에서마저 존재를 보고 우주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는 논리다. 인식 작용이 매개되면서 형식요소를 형식요소 자체로서보다는 00에 대한 기호로, 상징으로, 표상으로, 알레고리로, 암시로, 예시로 본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이후 예술을 위한 예술 개념과 결별한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형식요소와 순수추상을 강조하면서 정작 예술이 보듬어야 할 삶의 서사와 같은 존재론적 문제를 간과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후 작가의 작업은 이런저런 경우로 삶의 서사를 도입하는 형식실험의 장이 된다. 2000년대 초 오브제 설치 작업이 그것으로 물성을 강조한 페인팅과 실낱같은 연필 드로잉, 그리고 일상에서 채집한 각종 생활 오브제가 경계를 허물어 유기적인 한 몸을 이룬 작업이다. 오브제 조각들을 배열하고 재구성한 앗상블라주도, 나무판자 위에 컬러를 칠해 하나의 전체 화면으로 재구성한 컬러필드페인팅(우리는 모자이크다)도 당시 같이 시도되고 예시된 작업들이다. 그리고 2008년부터는 실내 공간을 그리면서 컬러가 도입되기 시작하다가, 이후 점차 색채가 전면화하는 회화로 전환한다.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로 치자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몸체로 후기 모더니즘의 삶의 서사를 흡수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상호텍스트성 그러므로 상호영향사에 대해 열려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미술사적 사건에 열려 있으면서, 네트워크 되면서 자기만의 회화적 형식을, 서사를 일구어내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국내적으로는 후기 미니멀리즘(미니멀리즘의 최소한의 구조에 서정과 서사를 도입해 차별화한)과 후기 단색으로 범주화되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예시해 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회화적 형식(구상적 형식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에 삶의 서사를 도입하는 형식실험의 장이 된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존재의 유래를 탐색하는 자기 사유의 과정일 수 있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존재자의 기억을 넘어서는 존재의 기억을(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한다), 아득한 기억을 융은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원형적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기억이라면 흐릿하게나마 알만한 형상이 있을 것이지만, 개별적 존재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흔적과 질료와 같은, 겨우 암시될 뿐인, 다만 분명하지 않은 것을 더듬어 찾아갈 뿐인, 감각적인 기억(그러므로 몸의 기억)의 형태로 전수된 것일 터이다. 무의식이라고 해도 좋고, 심연이라고 해도 좋다. 폴 클레는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그렇게 비가시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존재를 유령이라고 불렀다. 다시, 그렇게 유령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자체 존재의 유래를 탐색하는 작가의 그림이 적어도 외관상 추상적인, 유령처럼,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흔적과 질료로만 구조화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 그러므로 원형적인 기억을 빛(날것의 빛, 절대 빛)과 흰색(생산되어진 흰색, 겨울에 생산된 흰색)에서 찾는다. 여기서 빛과 흰색의 질료적 성질은 다르지 않다. 빛의 광학적 성질을 색으로 환원하면 흰색이 될 터이다. 작가의 그림은 특히 빛의 광학적 성질과 관련이 깊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자잘한 빛 알갱이를 안료에 섞어 캔버스에 도포 하는데, 그 과정에서 빛 알갱이가 전혀 해체되거나 뭉개지지 않으면서, 처음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을 쓱 보면 뭘 그리기나 한 것일까 싶게 그저 허옇게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놀랍게도 화면 속에서 무수한 빛 알갱이들이 올올이 살아서 존재를 드러낸다. 당연히 빛에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그림이 사람을 따라다니고, 눈을 따라다니고, 빛을 따라 움직인다. 조명(그리고 자연광도 마찬가지지만)처럼 자기 외부에 주어진 빛의 환경에 따라서 그림은 흰색으로도 보이고, 회색으로도 보이고, 은색으로도 보이고, 은회색으로도 보이고, 여기에 자잘한 빛 알갱이로 반짝거리는 눈 색으로도 보인다. 형언할 수 없는 색깔, 비결정적인 빛깔, 그러므로 빛의 색의 스펙트럼을 하나의 화면 속에 잠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기에 그림을 보는 이 저마다의 심리적이고 감각적인 형편에 따라서 섬세하게 다른 색을 보고 감각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빛의 질료는 형언할 수 없는, 비결정적인 존재의 양태를 드러내며,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결정적인 요소이며 성질이 된다. 형식이 그렇고 감각이 그렇다면, 의미론적으로 작가는 존재란 하나의 빛 알갱이, 그러므로 빛의 질료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존재의 궁극은 빛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존재의 궁극? 빛? 신이다. 천창을 통해,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내리는 빛의 세례에 주목한 중세 기독교 이후 빛은 후광으로, 님부스로 도상화되면서 신의 현현으로 자리한다. 존재가 빛 그러므로 신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해도 좋다. 저마다의 존재가 마음속에 빛 그러므로 신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존재 자체가 이미 곧 신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흰색은 도상학적으로 순수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빛과 흰색을 빌려 순수한 신 그러므로 순수한 존재(원형적 존재)의 회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빛이 신이고, 존재가 곧 신이라는 사실은 생각이다(작가의 생각일 수도 있겠고, 작가의 그림에서 유추한 평자의 생각일 수도 있는). 생각을 옮겨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림은 생각을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생각의 집을 짓는 행위(생각의 형태화, 15도 기울어진 집의 형태)가 곧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가 존재의 인격을 결정한다는 말일 수도 있겠고, 존재란 언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림 그러므로 이미지 또한 언어다. 그러므로 그림을 매개로 생각의 집을 짓는 작가의 행위는 곧 존재의 집을 짓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존재의 집을 짓고 있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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