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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살갗도 없이, 매개도 없이

고충환



최선영/ 살갗도 없이, 매개도 없이 


고충환 | 미술평론가


가수면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 같은. 잃어버린 머리를 찾아서 두리번거리는 것 같은. 마침내 찾아낸 반쪽과 합체하는 것 같은. 인디오처럼 잃어버린 기억(원형적 기억?)을 문신으로 새겨놓은 것 같은. 무거운 머리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마음속에 떡잎을 키우는 것도 같고, 하트를 품고 있는 것도 같고,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같은. 우는 것도 같고, 기도하는 것도 같고, 뿔난 것도 같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도 같고, 물속에 부유하는 것도 같은. 꽃봉오리가 심장을 감싸 보호하는 것 같은. 방향을 잃은 채 부유하는 말의 조각들과 침묵하는 입술이 대비되는 것도 같은. 

머리에서 떨어져 나온 뇌가 허공 아니면 물속을 떠다니는 것도 같고, 뿌리 달린 손이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부유하는 것도 같은. 말이 파동을 일으키며 진동하는 것 같은(그런데 그 말은 끝내 자기가 가닿을 곳을 찾을 수 있을까). 머리가 흔들리는 것도 같고, 상실된 기억으로 머리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조각이 눈물방울에 갇힌 것도 같은. 얼굴이 뭉개지는 것도 같고, 서로 감싸 안는 것도 같은. 만화에서처럼 다이아몬드를 그리며 꿈이 깜박거리는 것도 같은. 머리에 달린 레이더로 알 수 없는 메시지를 송출하는 것도 같은. 가로등 아래 온몸을 안쪽으로 만 채 웅크리고 있는 것도 같고, 검은 담요를 악몽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것도 같은. 몸도 없는 뇌를 두 발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도 같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 작가의 그림은 밝은 색채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암시적이고, 파편적이다. 표면적이면서 중의적이다. 의미를 드러내면서 숨겨놓고 있다. 무슨 의미일까. 


작가 최선영은 감정에 맞게 적혈구의 색과 모양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화가 나면 붉은 뿔처럼 변하고, 부끄러울 때면 발갛게 달아오른 동그라미로 변한다. 우울할 때 적혈구는 파란색 눈물방울을 닮았다가도, 기분이 들뜰 때면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로 변신하기도 한다. 때로 분홍색 풍선이 돼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기분 좋은 날에 적혈구는 부드럽고 우호적인 질감을 띄다가도, 긴장하면 이내 수축하기도 할 것이다. 감정과 자기감정 그러므로 자기를 적혈구와 동일시한 것인데, 환경에 맞게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을 떠올리게도 된다. 

카멜레온이 색을 바꾸는 것은 잘 숨기 위해 변신하는 것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변신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감정이 적나라하게 솔직하게 드러나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감정이 자기감정에 연동된 표현주의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세계와 감정의 피부가 어떤 매개도 없이 만나진다고 해야 할까. 매개도 없이 만난다? 매개도 없는 감정이 세계를 변신하고 창출한다고 해도 좋다. 피부도 없는 감정이 상상력을 닮았다고 해도 좋고, 욕망을 닮았다고 해도 좋다. 욕망과 상상력이 어떤 제약도 없이 오롯이 자기를 실현하는 코라(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상상계(자크 라캉)가 온전히 보전되고 있다고 해도 좋고, 그렇게 행복한 유아기적 요람이 자기를 흔드는 대로 맡겨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우회를 모르는 욕망,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욕망, 욕망에 맞춰 변신 되는 세계는 그러므로 소여 된(주어진) 세계라기보다는 창출되는 세계다. 그렇게 이미지가 생성되고, 예술이 창출된다. 상상력이 지배하는 예술(보들레르)이고, 유아적 상상력 그러므로 우화가 지배하는 예술이다. 이성의 왕국에 속한다기보다는 심리학에 경도된 세계고 예술이다. 심리학을 업은 예술이 세계를 재편하고, 재구성하고, 변신하는 것. 비결정적으로 만들고, 유동적으로 만드는 것.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기법(초현실주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이야기 사슬(천일야화)이,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숨어있는 이중 그림이, 하나의 말속에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 있는 다성성(미하일 바흐친)이, 타자들의 맞아들임 그러므로 초대(레비나스)가 이처럼 변신하는 세계에 연동된다. 천국은 어린아이(욕망의 화신인, 그러므로 순진무구한)를 위한 것이라는 성경의 전언에 연동되고, 어린아이(상상력의 화신이기도 한, 그러므로 밑도 끝도 없는)처럼 그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피카소의 전언에 연동된다. 그렇게 작가는 의미론적으로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는 유아기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살갗도 없이 만나는 세계감정을 그려놓고 있었다. 


작가의 그림은 관계와 소통, 고독과 소외(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종교 감정에서 건너왔을 죄의식)와 같은 평소 생활감정을 그린 자기반성적인 그림, 유아기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그림책(작가는 실제로 그림책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과 어른들을 위한 우화, 그리고 여기에 타자로 나타난 신을 맞아들이고 초대한 종교 감정을 그린 그림을 아우른다. 형식적으로 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드로잉을 아우르고, 의미론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는, 서사적이고, 문학적이고, 동화적인 점이 특징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저마다의 생활감정을 그림으로, 이미지로, 색으로 표현하는 것일 수 있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는 어디서 왔는지, 나는 누구인지와 같은 존재론적인 물음(그러므로 정체성 문제)을 묻는 것일 수 있고, 유년과 같은, 원형적인 기억(융에 의하면,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과 같은 상실된 것들을 되불러오는 것일 수 있다. 

그중 작가의 그림은 상실된 것들을 되불러오는 이야기에 가깝다. 상실된 유년의 기억을 되불러오고, 여기에 어쩌면 존재의 원인일지도 모를 신(루시앙 골드만에 의하면, 신은 숨어있으면서 편재한다)을 되불러온다. 그렇게 소환된 이야기는 천진하고, 순수하고, 순진무구한데, 자신을 일깨우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린아이를 위한 이야기인 만큼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것과도, 그리고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인 만큼 신의 눈높이에 맞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도 어린아이를 요구하고(천국은 어린아이를 위한 곳), 그림책도 어린아이를 요구한다(그리고 어른들은 상실된 유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덩달아 작가 역시 어린아이의 심성이, 상상력이, 세계 이해가 요구된다. 어떤 매개도 없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고, 욕망이 자기실현을 얻는 순간이다. 상상계(자크 라캉)다. 그곳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공간은 재구조화되고, 사물의 질서는 재편된다. 현재와 유년이 만나고(보르헤스의 휘어진 시간),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진다(탈경계). 사물이 말을 걸고(사물 인격체), 적혈구가 분홍색 풍선으로 변신한다(안과 밖의 전복). 

살갗도 없이, 매개도 없이 상상력이, 감정이 현실이 되는 세계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 문제는 없는가. 그 세계에 입문한 자는 마냥 행복한가. 다름 아닌 상실한 것들 그러므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되불러온 것이라고 했다. 상실한 것들 그러므로 억압된 것들이 되돌아오고(프로이트), 상상계에 실재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다시, 자크 라캉). 어른이 상실한 유년을 기억하듯, 동화는 잔혹동화(어른을 위한 동화 그러므로 우화)를 억압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동화와 잔혹동화 사이, 상상계와 실재계 사이, 현실과 이상 사이, 그리고 불완전한 자와 꿈꾸는 자 사이에서 자기만의 서사를 풀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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