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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영/우연한, 무분별한, 분방한, 엉뚱한 자연

고충환



유근영/ 우연한, 무분별한, 분방한, 엉뚱한 자연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자연. 스스로 그러한, 스스로 있는, 원래 그런, 이라는 의미다. 그 존재 방식에 인과를 위한, 진위를 위한 자리는 없다. 인과도, 진위도 다만 인간의 일일 뿐. 천지는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천지 그러므로 자연은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인간도 마찬가지. 자연에는 개념이 없다. 개념도, 따짐도 다만 인간의 일일 뿐. 인간이 자연을 뭐라고 부르든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연은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고, 인간의 지각 너머에 있다. 인간은 자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슨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알 도리가 없다. 안다고 해도 그 앎은 다만 인간의 일일 뿐, 자연이 보기에 그 앎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처럼 자연에 관한 한 인간은 철저하게 무지하다. 자연에 대한 이런 무지로 인간은 샤머니즘을, 토테미즘을, 물활론과 범신론을 발명했다. 야생과 야성을, 초월과 숭고를 발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신을 발명했다. 알 수 없는 자연을 경외하다가, 종래에는 미신의 혐의를 덧씌워 이성의 왕국으로부터 자연을 추방했다. 그 사정은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도구적 자연(도구화된 자연)이 보편화된 현실에도, 그리고 이에 따른 자연의 복수가 공공연한 현재에도 자연은 처음 그대로 인간의 개념 바깥에, 스스로 그렇게, 스스로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개념 바깥에, 스스로 그렇게, 스스로 있는 자연이란 뭔가. 그 자체 무규정자라는 의미일 텐데, 그렇다면 이처럼 무규정자로서의 존재 방식을 가진 자연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최소한 어떻게 부를 수도 없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각 피직스와 나투라로 구분했다. 감각적 자연을 피직스로, 그리고 자연을 감각 하게 해주는, 그 자체로는 비감각적인 원인(그러므로 원동력)을 나투라라고 불렀다. 비감각적인 원인? 비감각적인 원동력?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을 유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므로 자연은 아마도 이런 유령의 한 형태, 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좀 더 널리 알려진 경우로 치자면 에너지 그러므로 자연에 내재 된 생명력(바이털리즘)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기와 기운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무규정자, 유령, 에너지, 생명력, 그리고 기와 기운(그리고 기운은 움직이는 것이므로 운동성)으로 재정의된다. 

작가 유근영의 그림이 이런, 자연의 재정의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지,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자연은 종래 자연 개념과는 어떻게 다른지 볼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엉뚱한 자연>이라고 부른다. 엉뚱한 자연? 왜 엉뚱한 자연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엉뚱한 자연은 고사하고 자연이 무색한 그림이다. 심지어 자연을 보고 그린 그림도 아니다. 단색화가 한창이던 시절에, 구상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시절에 작가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자고, 마음대로 그리자고 작정했다. 자기를 방기했다기보다는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그림, 자기로부터 비롯된 그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림의 형식이란 미리 주어진 것 그러므로 전제된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이 그린 그림, 체질이 육화된 그림일 때에야 비로소 자기표현이고 자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그린 그림? 체질이 육화된 그림? 표현주의고, 추상표현주의다. 어떤 전제도 없이, 어떤 매개도 없이 회화적 화면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의식 없이 세계(작가에게는 화면이 세계다)와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도 없이 세계와 마주하다 보면 무의식이 열린다. 몸에 등록된 기억이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의식이다. 개념 없는 자연을 보고 그리기에는 최적화된 상태이며 태도(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회화적 방법론마저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제스처가 뚜렷한, 스트로크가 오롯한 그림을 그렸다. 형식실험을 방불케 할 만큼 다채로운 붓질이, 화면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붓질이, 화면을 가로지르다가 문득 멈춰 선 붓질이, 그렇게 머뭇거리는 붓질이, 비정형의 얼룩과 자국을 만드는 붓질이, 무심하게 그어 내린 듯 선을 만들고, 생각 없이 찍은 듯 점의 패턴을 만드는 붓 자국이, 그리고 중력에 순응이라도 하듯 화면 아래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내리다가 맺힌 물감 자국이 생생한 그림을 그렸다. 음악에서의 리듬(공감각)을 연상시키는 붓놀림이 여실한 그림을 그렸다.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반쯤은 무의식과 우연이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생생한 것으로 치자면 색을 빼놓을 수 없는데, 회화는 표현이고, 색이 곧 표현이라고 한 마티스의 정의를 떠올려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붓질들의 춤사위를, 색채들의 향연을 그림 속에 고스란히 들여놓고 있었다. 그리고 엉뚱한 자연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평소 자연에 공감이 있었고, 반무의식적 끌림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꽃의 전형적인 형태, 꽃봉오리의 꼴, 그리고 잎맥의 패턴을 떠올리게 하는 선입견을 재확인시켜주는 경우들이 있어서 자연이라고 해도 좋고, 굳이 자연이 아니어도 무방한 그림이다. 

문제는 자연이 아닌, 엉뚱한 자연이라는 주제에 있다. 추정컨대 자연에 대한, 자연을 향한 작가의 관심은 감각적 실재로서의 자연보다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생명력에, 자연의 비가시적인 본성에 있었을 것이다. 감각적 실재로서의 자연을 감각 하게 해주는 자연의 원인에, 자연의 원동력에, 자연에 내재 된 생명력에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그런 자연, 우연한 자연, 개념 없는 자연에 있었을 것이다. 무규정자, 유령, 에너지, 생명력 그러므로 바이털리즘, 그리고 기와 기운으로 재정의된 자연에 있었을 것이다. 하이데거로 치자면, 존재자가 아닌 존재에, 개별자가 아닌 보편자(그러므로 자연의 생태학)에 있었을 것이다. 메를로 퐁티로 치자면, 나와 세계, 나와 자연을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는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나는 자연에 속해 있고, 자연은 내가 연장된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은 굳이 자연이 아니어도 무방한 그림이라고 했다. 감각적 자연이 유래한 자연의 원인, 자연의 원동력, 자연의 생명력을 그린 그림인 만큼 작가의 그림은 보다 궁극적인 지점을 향하고 있고, 그 지점이 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가 유래한, 그 자체 자연에 내재 된 생명력 그러므로 바이털리즘과도 통하는 몸 그림을 정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이털리즘의 미학적 근거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 있는가. 

그 미학적 근거를 니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예술 충동을 각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구분했다. 자기 내면에 질서의 성소를 건축하려는 충동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에서 예술이 성립 가능한 서로 다른 계기를 본 것이다. 예술이 성립 가능한 계기에 대해 유형학적 접근을 시도한 경우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이런 유형학적 접근에 의하면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다르게는 코스모스형 성향과 카오스형 체질에도, 그리고 에토스 형 작가와 파토스 형 작가의 구분에도 그대로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가적 체질은 상대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이고, 카오스적이고, 파토스적이라고 유형화해봐도 좋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자연에 내재 된, 그리고 존재에 내재 된 이런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마음대로 그리자는, 그러므로 어쩌면 몸이 부르는 대로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리자는, 그렇게 몸의 본성이, 자연의 본성이 자기실현을 얻는 그림을 그리자는 작가의 작정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자기로부터 비롯된 자연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을, 형식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우연한, 무분별한, 분방한, 엉뚱한, 그러므로 어쩌면 스스로 그런 자연의 생명력이 자기실현을 얻는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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