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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희, 잠수복을 불태우며

고충환



여명희, 잠수복을 불태우며 


고충환 | 미술평론가


바닷속에서 사람은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잠수복이 있으면 문제는 다르다. 잠수복을 입은 사람은 바닷속에서 뭍에서처럼 숨을 쉬고, 움직이고, 웃고, 말하고, 자유자재할 수 있다. 작가 여명희가 보기에 세상은 바닷속 같다. 숨을 쉬기도, 움직이기도, 웃기도, 말하기도 어렵다. 도무지 자유자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작가는 잠수복을 입고 살았다. 잠수복을 입고 벗은 듯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잠수복을 입은 채로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 마침내 잠수복을 벗기로 했다. 잠수복을 태워 없애기로 했다. 잠수복도 없는 벗은 몸으로 세상에 홀로서기로 했다. 저마다의 잠수복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 같고, 그런 숨 막히는 세상에서 홀로서기의 우화 같다. 

여기에 평소 작가의 그림에서 느낀 것이지만, 작가에게 바다는 세상이 유래했고, 하늘이 유래했고, 상상력이 유래했고, 무의식이 유래했고, 기억이 유래했고, 현재가 유래했고, 현재의 역사가 유래한 존재의 모태인 것 같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나 사막과 같은 황량한 풍경, 불모의 풍경, 폐허의 풍경에서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예술은 언어의 폐허, 의미의 폐허, 감각의 폐허, 그러므로 의식의 영도지점에서 매번 새로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결정화된 언어, 제도화된 언어, 사회화된 언어, 상식과 합리로 전형화된 언어를 재편하고 정화하는 장이어야 한다. 그렇게 억압된 언어, 잊힌 언어, 원초적 언어 그러므로 몸과 분리되기 이전의 언어를 소환하고 발굴하는, 복원하고 회복하는 장이어야 한다. 그렇게 매 순간 언어가 갱신되고, 의미가 갱신되고, 감각이 갱신되고, 세계가 갱신되는 장이어야 한다. 생경한, 낯선, 이질적인(그 자체 반무의식적인 그리기를 의도한 작가의 화법에 연유한)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예술의 실천 논리가 자기를 실현하는 장을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현재의 역사>는 모순인데, 시점상으로 현재는 지금 막 도래한(그리고 도래하고 있는) 시제에 속하고, 역사는 과거시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여하튼 이런 모순은 다만 뭍에서의 모순이지, 바닷속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닷속에서 시간은 뭍에서와는 다르게 흐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란히 흐르고, 기억과 원형적 기억이 아직 오지도 않은 기억(예상, 예감, 전조, 기미, 그리고 암시와 같은)과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이처럼 바닷속과도 같은 작가의 의식(아니면 의도된 무의식?) 속에서 시간은 하나로 흐르고, 공간은 재구조화된다. 

이를테면 거꾸로 걸어도 그림이 되는 그림이 그렇다. 교각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런데, 아래쪽에서 위로 올려다본 그림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준다면, 뒤집어 놓은 그림이 화면의 한쪽 가장자리에 있을 소실점을 향해 내달리는 연이은 선들로 이루어진 테라스를 보는 것 같다. 시멘트벽을 소재로 한 그림도 그런데, 시멘트벽 위로 보이는 풍경이 뒤집어 걸으면 시멘트로 된 교각이나 터널 뒤편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이중적인 그림이고 다중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걸어도 그림이 되고 저렇게 걸어도 그림이 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림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그림을 거는 기준이라도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그림이 되는 기준을 문제시하고, 정면성의 법칙(안정감을 주는, 선입견을 배반하지 않는, 그림과 관련한 관습과 관성)을 의문시한다. 그림이 성립되는 조건은 매번 부정되어야 하고,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렇게 그림은 매 순간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이 되어야 한다(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금까지 알려진 적이 없는 미증유의 감각을, 언어를, 의미를 일깨우는 형식실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그렇게 결정화된 언어, 제도화된 언어, 사회화된 언어, 상식과 합리로 전형화된 언어를 정화하기 위해 언어의 폐허, 의미의 폐허, 감각의 폐허 위에 선다. 숨 막히는 언어(그리고 소통, 그러므로 불통)로 구조화된 세상으로부터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잠수복을 태워 없애고 오롯이 자기 언어로 홀로서기로 했다. 그렇게 작가는 미증유의 언어 속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져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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