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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률, 소통의 안부를 묻다

고충환



김성률, 소통의 안부를 묻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처음엔 단색환가 했다. 더러 원색과 같은 눈에 띄는 색상이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색채가 적극적인 의미 기능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대개 중성적인 무채색 계열이 지배적인, 절제된, 혹은 금욕적인 색채감정이나,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 것 같은, 지우면서 그리기를 꾀한 것 같은, 그리기와 지우기가 일체화된, 그렇게 그리기와 지우기의 변증법적 사투를 증명이라도 하듯 붓 자국이 여실한 화면이 후기 단색화겠거니 했다. 

그런데, 화면이 중첩돼 있었다. 화면 안쪽으로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림 속에 뭔가가 숨어있나 싶었다. 애써 그려 놓은 연후에 덮어서 가린, 혹은 지운 뭔가가 있나 싶었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숨기면서 말하고 싶은, 그러므로 양가적인 뭔가가 있나 싶었다. 그게 뭔가. 문자였다. 베일처럼 드리워진, 우연하고 무분별하고 감각적인 붓질 밑으로 바탕화면은 온통 알 수 없는 문자로 뒤덮여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문자 연구>라고 불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한글의 초성과 영문자 알파벳 그리고 여기에 각종 추상적인, 그러면서도 일정한 의미 기능을 수행하는 기호와 부호들을 배열해놓은 것이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문자를 직접 배열한, 그러므로 프로토콜을 알고 있을 작가는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문자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했고, 또한 무슨 의미인가. 작가는 낮에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 건축 현장에서 소재며 주제를 취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다.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삶의 현장으로부터 건너온 것임을 인정한다면, 삶에의 경험치가 반영되고 투사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삶의 현장과 창작 현실의 유기적인 관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평소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잠재된 예술의 가능성이며 계기를 발견하는 의식과 감각의 촉이 살아있다는 전제에서 보면(아마도 작가가 그럴 것이다), 창작을 위해서는 최적화된 환경이라고 해도 좋다. 

건축 현장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난다. 멀쩡하던 건물이 허물어지고, 전에 없던 건물이 들어서면서 풍경이 바뀌고, 풍경의 주인이 바뀐다(진즉에 존 버거는 풍경화를 자본과 권력의 관점에서 해석한 적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복과 건립이 반복된다. 어스름 새벽녘에 인력시장을 찾은 사람 중 운 좋은 사람들이 하루를 보내고, 함바집에서 게걸스러운 허기를 때우고, 또 다른 어스름 속으로 귀가한다. 어스름 그러므로 어둠이 집인 사람들이고, 어스름과 어스름 사이를 사는 사람들이다. 빨간 스프레이로 알 수 없는 숫자가 흩뿌려진 반쯤 허물어진 벽면 옆에서 포크레인이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남은 벽면을 주저앉힌다. 떳다방과 로또가, 재개발과 원주민의 아우성이 뒤엉킨 진풍경을 주인 잃은 백구가 먼발치서 바라본다. 삶의 축소판이고, 사회학적 풍경의 미니어처라고 해도 좋다. 

건축 현장에는 먼지와 함께 온갖 말들이 날아다니고, 소리가 날아다닌다. 욕설이 날아다니고, 개 짖는 소리가 날아다니고, 주저앉는 건물이 죽으면서 내는 신음이 날아다니고, 물건이 부딪치거나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날아다니고, 미처 내뱉지 못한 채 혀끝에 맴도는 말들이 날아다니고, 속으로 삼킨 말이 날아다닌다. 그 어수선한 와중에도 작가는 그렇게 날아다니는 말들을 채집하고, 소리를 줍는다. 욕설을 줍고, 속말을 줍고, 흉내말 그러므로 의성어를 줍고, 의태어를 줍는다. 그리고 그 말과 소리를 집으로 가져와 가공한다. 얼핏 알아먹기 힘들게 가공하는데, 팔다리를 다 떼어낸 한글의 초성을, 영문자 알파벳(아마도 허물어진 건물의 이름과 간판에서 채집되었을)을,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기호와 부호를 하나로 섞어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방식으로 편집하고 재구성한다. 


그렇게 문자를 화면에 배열하는데, 한눈에도 패턴이 뚜렷하다. 패턴이 뭔가. 모나드 그러므로 하나의 단위원소가 반복 재생산되면서 모듈 구조를 이루고, 모듈 구조가 패턴을 만든다. 외적으로 패턴이 뚜렷하지만, 엄밀하게는 같은 단위원소를 반복한 것이 아니므로 모듈 구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패턴은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분명한 형식적 특징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화면에 문자를 배열하기 위해 전사 기법을, 그리고 스텐실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기법의 전용이 패턴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물성이 강조되는데, 미세한 요철이 손끝에 만져지는 것이 그렇다. 일종의 상감기법과 역상감 기법이 시도된 것으로 보이고, 그 자체 시각적 언어를 촉각적 언어로 확장하고 심화하는 부분이 있고, 화면을 탄탄하게 가져가는(그러므로 구조적인, 혹은 구축적인) 부분이 있다. 

문자를 소재로 한 근작에서도 그렇지만, 이런저런 도시적 아이콘을 소재로 한 전작에서부터 패턴은 진즉에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전형적인 문법 혹은 방법론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왜 패턴인가. 기본적으로 패턴에 대한 작가의 형식적 끌림이 그 원인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보다는 작가의 도시적인 체질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가적 체질은 도시적인 것 같다. 작가는 도시에서 어떤 전형적인 형식을 보고 있고, 그 형식적인 특징이 패턴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늘에서 보면 도시는 정교하게 설계된 바둑판 같다. 도시 구조가 그렇고, 트랜지스터가 그렇다. 전자 기판이 그렇고, 기계 부품이 그렇다. 하나같이 닮은꼴의 아파트 공화국이 그렇고, 마트의 진열장을 채우고 있는 대량 복제 생산된 상품들이 그렇고,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 비디오에 나오는 컨베이어 벨트를 통과한(기계적인 교육 현실에 빗댄) 똑같은 아이들처럼 고도로 제도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심성이 그렇다. 그러므로 작가는 혹 도시는 패턴이다, 혹은 패턴으로 구조화돼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렇게 배열된 문자로 구조화된 화면을 무채색으로 덮어서 가린다. 그래서 그림은 서두에서도 말한 것처럼 얼핏 문자와는 거리가 먼 단색화처럼 보인다. 단색화 뒤로 문자들이 실루엣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말들, 길을 잃은 말들, 부유하는 말들이 수런거리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 속에 문자를, 말을, 언어를, 기호를, 메시지를 숨겨놓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지우면서 그리는, 지우기를 통해서 그리는, 숨기면서 말하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는 왜 말들을 숨기는가. 왜 애써 구축한 문자를 지우는가. 작가가 채집한 말들, 삶의 변방에서 주워온 말들은 대부분 공적이기보다는 사적인 말들이다. 사사로운 말들이고, 아우성이고, 그중에는 아픈 말도 있다. 사적인 말들, 아픈 말들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고, 치유한다는(위로하는 말로 아픈 말을 덮는다는) 의미도 있고, 귀 기울여 듣는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사사롭게 하는 말이나 아픈 말일수록 더 그렇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듣기 위해선 귀 기울여 들어야 하고, 애정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역설적으로 보이는데, 근성 없이 듣고 애정 없이 듣는, 불통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그러므로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표상 혹은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고 말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세계 내 존재라고도 했다. 인간은 특정의 언어로 구조화된 사회, 그러므로 언어를 도구로 한 특정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구축된 세계 속으로 던져진다고 했다. 인간은 언어를 벗어날 수 없고, 언어로 구조화된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러므로 이미, 진즉에 사회적인 동물인 채로 태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색화와 개념미술, 그리고 여기에 사회학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담론이 결부된 작가의 그림은 그림 자체가 주는 감각적 쾌감과 함께, 그렇다면 우리는 잘 말하고 있는지, 잘 듣고 있는지를 묻는다. 소통의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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