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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 거울에 사는 유령들, 타자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

고충환



이열/ 거울에 사는 유령들, 타자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 

고충환 | 미술평론가


추상적 평면 회화에서 거울(형) 회화로, 타블로에서 오브제로, 평면에서 설치로 전환한 지 10여 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평면 작업을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행했을 것이고, 병행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하튼 변신을 시도했다는 것이고, 어느 정도 변신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추상 평면 작업으로 이미 뚜렷한 자기 언어를 획득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여기에 회화에 요구되는 감각과 설치에 요구되는 감각의 성질이 사뭇 다른 것임을 인정한다면 변신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작가에게 변신은 자유(자유혼의 증명과도 같은?)고, 더욱이 예술에서 변신은 미덕이기조차 하다고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왜, 무엇 때문에, 어떤 계기로 변신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변신은 또한 어떤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오랫동안 수행성과 반복성을 열쇠 말 삼아 추상 평면 작업을 해오다가 언젠가부터 답답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2010년 우연히 경기도 동두천 미군기지 철수 현장을 찾았다가 낡은 거울이 눈에 들어왔고, 불현듯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했다. 어머니가 경대 앞에서 분을 바르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 등 뒤 어깨너머로 본 작은 거울 속에 어머니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모습이 신기한 기억으로 남아있었고, 낡은 거울이 그 잊힌 기억을 일깨웠다고 했다. 기억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초현실주의의 어법으로 치자면, 기억과 그리움과 시간과 같이 부재 하는 것들을 환기하는 발견 오브제와 맞닥트린 것이다. 새로운 모든 것들은 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향수를 자극하는 사물 대상으로 전이되는 것이 사물의 운명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전언을 일깨웠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낡은 거울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던 차에, 2015년 파리국제예술공동체(시테)에 입주해 1년간 체류하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를 계기로 소위 거울(형) 회화에 대한 형식실험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작가는 파리 벼룩시장과 골동품 시장을 다니면서 고풍스러운 빈티지 거울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정형이든 비정형이든, 묘사든 얼룩이든 거울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뒷면 페인트칠을 벗겨내야 했는데 만만치가 않았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차에 마침내 그 용도에 꼭 맞는 화학약품을 알게 됐고, 이후 작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페인트칠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울 부분은 지우고 남길 부분은 남기는, 그렇게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어쩌면 빈티지에 빈티지를 더하는, 시간에 시간을 더하는, 그러므로 시간의 집을 만들고 몸을 만들고 아우라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지운다기보다는 그리는, 지우면서 그리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그 자체가 이미 그림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요구되는 감각의 질을 충족시키는 몸체가 만들어지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이미지 형성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이 얹혀질 지지대를 선택하는 단계에서도 시행착오가 있었고, 마침내 투명한 실크 천을 찾아냈다. 실크 천은 그 결이 섬세해서 얼핏 보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고, 여기에 실크 천을 2겹 3겹으로 중첩 시키면 일렁임이 강조돼 보이는 무아레(프랑스 말로 물결무늬를 뜻하는) 현상이 특징이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형상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없는 듯 있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고, 아마도 작가가 지향하는 이미지 형성에도 부합하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작가는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일일이 점을 찍어 그리는 점묘 드로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림 틀을 준비된 액자에 맞춰 일체화하는 것으로 작업을 완성했다. 


중요한 것은 액자 따로 그림 따로가 아니라, 낡은 액자에 낡은 그림을, 묵은 시간에 묵은 시간을 일체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치 액자 자체가, 혹은 거울 자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미지며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 것, 어쩌면 액자 자체가 원래 간직하고 있었던 낡은 분위기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슨 새로움이 있는가. 작가가 지향하는 새로움이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새로움을 말하는 것인가. 박물관에나 걸려 있으면 꼭 맞을 그림이 왜 미술관에 걸려 있는가. 이것은 현대미술인가. 작가가 지향하는 현대미술은 무엇인가. 작가의 개입과 매개와 해석을 증명하는 작가적 아이덴티티는 어디에 있고 무엇인가. 

여기서 작가는 시간을 짓는 사람이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에 형태를 만들고 색깔을 부여해 감각의 표면 위로 불러내는, 그러므로 시간의 집을 짓는 사람이다. 선형적인 시간 속을 헤집어(혹은 해체해)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재편하는(혹은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흐르는 시간을 흐르는 채로, 낡은 채로, 휘발되고 박락된 채로, 벗겨지고 희미해진 채로 붙잡아 화석화하는, 그러므로 시간의 흔적을 박제화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작가에 의해 화석화되고 박제화된 시간의 꼴이 어떤가. 희미하고, 흐릿하고, 애매하다.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다. 시간의 질감을 손에 쥐여주는 것도 같고,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시간의 질량을 빼앗아가는 것도 같다. 노스텔저를 불러일으키고, 바니타스를 상기시키는 것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거울 회화는 마치 빛바랜 흑백 사진 속 인물을, 풍경을, 사물을, 정경을, 사건을, 현상을, 부재 하는 존재를, 흔적을, 그러므로 유령을 불러낸 것도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유령에 대한 그 정의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가시를 통해 비가시적 존재를 암시하는 현대미술의 지향과도 통한다. 그 유령의 실체가 무엇인가. 그 유령은 어떤 미학적 가치를 갖는가. 원형이다. 아우라다. 무정형이다. 그리움이다. 그리고 결핍이다.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가 거울을 통해 불러낸 존재는 유령이었고, 시간의 유령이었고, 원형적인 시간의 유령이었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은 실제로는 먼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 그러므로 아득한 것을 현존시키는 감정을 아우라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는 원형만큼이나 먼 존재며, 아득한 시간을 현재 위로 불러오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거울이 불러낸 희미한, 흐릿한, 애매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들, 그러므로 어떤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아우라를 발산하는 것들이 조르주 바타이유의 무정형과도 통한다. 

정형은 제도의 논법이고, 무정형은 재야 그러므로 예술의 문법이다. 작가의 거울에 보이는 흐릿한 것들, 희미한 것들, 애매한 것들, 그러므로 무어라고 꼭 집어서 얘기할 수 없는 것들, 정의할 수 없는 것들, 규정할 수 없는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의미 바깥에 있는 것들(모리스 블랑쇼)이 제도의 논법에 반하는 실천 논리를 예시해준다. 그리움을 환기하고 결핍(결핍 자체가 이미 그리움이다)을 환기하는 욕망의 용법을 예시해준다. 

그렇게 작가는 거울 회화를 통해 유령들을 불러오고 있었다. 그 유령들이 보르헤스의 거울_타자를 상기시킨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거울을 보는 이유를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보면 이렇다. 타자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내가 맞는지, 타자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그렇게 내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정작 내가 아닌, 타자들이 욕망하는 나, 타자들이 부여하고 정의해준 나, 사실은 타자들의 욕망, 그러므로 어쩌면 타자들을 본다. 그렇게 타자의 욕망에 초점이 맞춰진 거울 보기에 대해 거울은 때로 억압된 나, 정작 너는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나, 어쩌면 나 자신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나의 원형적인 모습, 헐벗은 모습을 되돌려준다. 거울은 그렇게 자기_타자를 발견하게 해준다. 거울이 자기반성적인 도구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타자가 아닌, 타자들이라고 했다. 예수는 미친 사람을 군대에 비유했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미친 사람들이고, 뭔가에 홀린 듯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군대에 비유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을 특정하거나 한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일반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여럿이 살고 있다? 다성성(미하일 바흐친)이다. 나는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내 속에는 죽은 엄마도 살고 있고, 엄마와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던 꼬마도 살고 있다. 언젠가 본 비현실적인 풍경이 등재돼 있고, 그만 잊고 싶은(폭력적인? 낯 뜨거운?) 사건이 생생하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처가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 상호텍스트성, 혹은 상호영향사적 주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거울 회화는 희미한, 흐릿한, 애매한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 유령들, 타자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와 만나게 해주는 자기반성적 계기를 열어놓고 있었다. 


거울 회화 이전에 작가는 수행성과 반복성을 열쇠 말 삼아 추상 평면 작업에 매진했다고 했다. 그 일련의 타블로 작업을 작가는 <생성공간_변수>라고 불렀다. 그 말이 질 들뢰즈의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을 연상시킨다. 들뢰즈의 이 말을 의식하거나 염두에 두고 생각해낸 개념이라기보다는, 반무의식적으로 생각이 서로 통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생성하는 것들, 생성 중인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비결정적이고 비규정적인 것들에 초점이 맞춰진 것일 터이고, 그림을 보면 실제로도 그렇게 보인다. 그리고 형식과 재료와 방법이 달라졌을 뿐, 크게는 전작에서의 이념이 근작의 거울 회화에도 그대로 연장 적용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근작에서의 거울 회화는 시간과 기억과 그리움과 같은, 부재 하는 것들,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이 호출되면서 지금 막 생성 중인(차이를 만들어내면서 생성하는) 공간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좋고, 그러므로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전작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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