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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 기억의 복화술, 무의식보다 깊은, 때로, 깃털처럼 가벼운

고충환




이연숙/ 기억의 복화술, 무의식보다 깊은, 때로, 깃털처럼 가벼운 


고충환 | 미술평론가


인형극에선 인형이 주인공이지만, 정작 인형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숨은 사람이 대신 말한다. 복화술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변호), 사물을 통해서(사물극), 상처를 통해서, 침묵을 통해서(마임), 그리고 때로 풍경을 통해서 대신 말하게 하는 기술이다. 기억이 그렇다. 기억은 사라지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다만 억압될 뿐. 희미해질 뿐. 자리를 옮겨 다닐 뿐(전이). 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변신하면서 다른 사물 속에 소생한 기억이 하는 말을 기억의 복화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연숙의 작업이 그렇다. 

그의 작업은 유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종잡을 수 없지만(작가는 크게 정주형 작가와 유목형 작가로 나뉜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작가는 그중 유목형 작가에 가깝다), 기억이 매개되면서 종잡을 수 없는 작업을 하나로 엮게 만든다. 엄마를 불러오고, 아버지를 불러오고, 할머니를 불러오고, 유년을 불러오고, 오래된 집을 불러오고, 광주를 불러오고, 역사를 불러오고, 장소를 불러오고, 시대를 불러오는, 그렇게 기억을 부르는, 기억이 화자로서 증언하게 만드는, 그런,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을 매개로 부재 하는 것들, 상실한 것들, 억압된 것들, 더러 죽은 것들, 그러므로 혼(유령)을 부르는(초혼)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때로 그리움으로 화해진, 빛바랜 시간을 부르는, 그런,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젖꼭지가 있다. 무수한 돌기들이 형태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장기를 뒤집어놓은 것도 같고, 신체의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도 같은, 그러므로 신체를 재편한 것 같은 작업이 루이스 부르주아와 에바 헤세를 상기시킨다. 몸을 주제화한 것인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근원을 묻는 작업인가. 엄마의 젖을 빨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인가. 존재가 유래한 우주적 자궁으로 회귀하고 싶은 것인가. 아마도 작가의 작업, 그러므로 작가의 기억이 시작되는 원형적인 이미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원형은 전형과는 다르다. 사회적 합의에 이른 기호, 공공연한 기호, 그러므로 공적 기호가 전형이라고 한다면, 원형은 전형보다 깊다. 미처 의미화되지 못한 말들(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리), 의미 이전에 이미 있었던 말들, 의미화를 거부하는 말들, 의식보다 깊고 무의식보다도 깊은 말들, 존재보다 멀고 아득한 말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입안에 맴도는 말들의 거소가 원형이고, 전형은 그 거소로부터 길어 올려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젖꼭지라는 전형적인 신체(몸) 기호를 표상으로 삼아,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인 이미지, 원형적인 기억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몸은 기억한다. 의식은 잊어도 몸은 잊을 수가 없다. 몸 기억이고 감각 기억이다. 의식은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잊지만, 몸의 기억은 저절로 기입된다. 그렇게 몸의 일부가 되고, 감각의 부분이 된다. 

여기에 얼굴이 있다. 때로 몸도 있지만. 실루엣 형상의 얼굴 위로 작가는 촘촘하게 침을 박았다. 그리고 침과 침 사이를 가녀린 실로 연결했다. 대개 팽팽하지만, 때로 연결에 실패해 흘러내린 실도 있다. 여기서 침은 몸의 기억, 그러므로 몸에 등록된 기억을 상징한다. 침과 침을 연결한 실은 기억과 기억의 관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아래로 흘러내린 실은, 그렇게 흘러내리면서 엉킨 실은 망각을, 망실된 기억을, 망실된 기억의 흔적을 상징한다. 이처럼 기억은 망실될 때조차 흔적을 남긴다. 몸 위에 얼굴 위에 마구 박힌 침이 그런 것처럼 상처를 남긴다. 망실된 기억(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억압된 기억)의 상처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훼손된 기억의 망처럼 보이고, 치유 불가능한 상처의 망처럼 보이고, 엉클어진 관계의 망처럼도 보인다. 얼굴은 인격의 최전선이다. 그리고 타자의 욕망이 인격을 만든다. 몸 위로 얼굴 위로 마구 박힌 침이, 흘러내리면서 엉킨 실이, 그런, 인격의 그림자, 인격의 일그러진 초상을 보는 것도 같다. 

유년 시절 작가는 재개발 현장에서 살았다. 사람들이 떠나고 없었고 덩달아 아이들도 없었다. 그렇게 작가는 친구도 없이 혼자서 놀았다. 공사장 현장에 있는 큰 파이프가 놀이터였다. 그 파이프의 구멍을 통해서 작가는 처음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렇게 작가가 처음 본 세상은 쓸쓸한, 어수선한, 나중에 알게 될 것이지만, 자본주의적인, 사회(학)적인 풍경에 대한 기억으로 남았다. 

모르긴 해도 재개발 현장에는 비닐봉지도 날아다녔을 것이다. 유년 시절 엄마는 비닐봉지를 무슨 유용한 물건이나 되는 양 곱게 접어 보관했다. 실제로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는 당시 다른 엄마들처럼 코 바느질도 잘했다. 그렇게 작가는 그때 엄마처럼 비닐봉지를 잘게 잘라 만든 것을 실 삼아 코바늘로 뜨개질하기 시작했다. 유학 시절 경제적 부담 없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이기도 했다. 어쩌면 당시 작가의 처지가 투사된, 사물 인격체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코 바느질로 꽃 모양도 만들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해파리도 만들고, 샹들리에와 같은, 다른,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자기만의 환상을 지어낼 수 있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그러므로 엄마를 오마주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었다. 

유년 시절 작가는 할머니와 살았다. 떨어져 사는 엄마와는 주말에나 재회할 수 있었다. 엄마가 다시 돌아갈 때면 배웅을 했는데, 그렇게 엄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루나무 가로수가 있었다. 여기서 작가는 그 미루나무 밑으로 물이 흐르고, 그 물에 미루나무가 비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를 보내야 하는 서러운 마음이, 엄마를 붙잡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엄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물에 비친다고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비닐봉지를 뜨개질해 미루나무가 물에 비치는 풍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가는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프로젝트에서 주민들이 저마다의 기억을 비닐봉지에 담아오는 놀이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추억하고 있는,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편지며 장난감이며 사사로운 물건들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사물에 잠재된 미학적 가능성에 주목한 초현실주의는 비록 일상에서의 기능적이고 효용적인 가치를 상실했지만, 어떤 시상(예컨대 사사로운 추억이나 낯선 비전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을 강하게 환기하는 사물을 시적 오브제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런 사물들일 것이다.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주민들이 비닐봉지를 뜨개질해 컵 받침과 같은 형태를 만들었고, 그 형태들이 모여 카펫을 이루게 했다.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되면서 큰 형태를 만드는 모듈 구조지만, 사실은 같은 문양이 하나도 없는 반 모듈 구조이기도 한, 협동의, 공동체의 메타포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사사로운 기억을 환기한다거나 협동의 추억을 불러오는 물건, 그러므로 정서를 환기하는 물건은 이미 한갓 물건일 수가 없었다. 패티시, 그러므로 감정을 가진 물건이라고 해야 할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부재 하는 사건, 불가능한 순간과 만나게 해주는 주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비닐봉지에는 사회(학)적인, 생태적인, 공동체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의미가 담겼다. 작가가 찾아낸 비닐봉지의 새로운 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비닐봉지에 기억을 담고 추억을 담았다. 작가에게 비닐봉지는 프루스트 효과에서처럼 기억을 환기하는, 때로 요셉 보이스의 사회 조각에서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하는, 그리고 다니엘 뷔랭의 사회(학)적 아니면 개념적인 테이프에서처럼 장소 특정성과 지표 그리고 예술가의 매개 역할을 대리 수행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이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광장에 머문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 그러므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주변으로 비닐봉지가 날아다닌다. 비닐봉지는 사람들의 손에도 쥐어져 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비닐봉지는 없다. 사람들이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이며 캐리어를 비닐봉지 형태의 금박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렇게 금박 된 비닐봉지에는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이, 추억이, 일상이, 번민이 담겨있을 것이다. 소소하지만(비닐봉지처럼) 소중한(금박처럼) 삶이 담겨있을 것이다. 흑백 처리된 사람들이며 거리가 기억을 환기하고(빛바랜 흑백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금박 처리된 비닐봉지가 소중한 기억과 일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기억은 일상을 살게 만드는, 삶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마치 주물과도 같은, 금박으로 정성스레 고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무엇이 된다. 

그렇게 비닐봉지의 추억을 매개로 작가가 불러온 사람들에는 유년의 자기가 있고, 엄마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마을 주민들이 있고,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사가 있고, 공동체가 있고, 사회(학)적 의미가 있다. 공감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파장이 있고, 정서를 파고드는 서정적(아니면 시적) 환기가 있다. 뭔가 문학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비닐봉지는 아니지만, 작가가 불러온 기억에는 아버지도 있다. 평소 아버지는 난을 애지중지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난이 죽었다. 아버지는 아쉬워했고, 엄마는 좋아라, 했다. 그리고 엄마는 죽은 난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 파를 심었다. 난과 생김새가 비슷하기도 하거니와, 파를 직접 키워 먹을 수도 있으니 좋았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를 불러온 것이지만, 사실은 엄마를 다시 불러온 것이었고, 가족사를 불러온 것이었다. 일반화하기는 그렇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해서 이상주의자(아버지)와 현실주의자(엄마)가 대비되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삶을 보고 있었고, 가족사를 통해서 사회를 보고 있었다. 

작가는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소환하는데, 할머니는 옷이 해지면 단추를 다 떼 내고 버렸다고 한다. 단추 하나도 귀한 시절이었다. 그 기억에 착안한 작가는 버려진 반닫이를 설치했는데, 아마도 일부러 손잡이 장식을 다 떼 낸 반닫이를 설치했다. 오래된 물건, 버려진 물건을 소환한 이 작업에서 실제로는 가난했던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 것이고, 살가운 물건(농경사회)과 흔한 물건(자본주의)이 대비되는 시절 감정을 소환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후세대 사람들이 물건을 꼭 소홀히 하는 것만도 아니다. 요새 언박싱이 유행하는데, 필기구 하나에서마저 나만의 명품을 고집하는, 물건 마니아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감정이, 연애와 같은 관계에 대한 감정이 물건 쪽으로 옮겨갔다고 해야 할까. 사람보다는 물건에서 위안을 찾는 소외된 인간관계에 대한, 물신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물건에 대한 살가운 감정만큼은 그대로 계승되고 전이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가족사를 소환하고, 엄마의 밥상과 할머니의 부엌과 경대(거울이 달린 옛날 소형 화장대)가 있는 오래된 옛집을 소환하고, 시절 감정을 소환한다. 그리고 역사적 현실을 소환한다.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가족사 그러므로 미시 서사를 통해 본 역사적 현실을, 역사적 현실로 확대 재생산된 가족사를 소환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아직 어렸던 작가의 기억을 소환한 것인데, 당시 엄마는 두툼한 이불로 창문을 덮어서 가리고, 창문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때 그 이불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이불을 매단 설치작업에 작가는 <능지처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불이 설치된 꼴이 사지절단형을 연상시키는 형태도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당시 능멸당했던 시대 감정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광주 국군병원에 설치한 또 다른 작업(그러므로 장소 특정성 작업)에서는 집기며 사물들이 흙물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흙물이 바짝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터지게 했고, 그 터진 위로 물에 잠겼던 사물들이 드러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드러난 사물들이 낯설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얼마 전에 작가의 작업실이 불탔다. 그때까지 했던 작업이 모조리 소실되었다. 작가는 그렇게 망가진 오브제 중 몇 개를 간직했다. 비록 작업은 소실되고 없지만, 자기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 오브제들이 기억하고, 증거하고, 증언해줄 터였다. 그리고 전시 현장에 다른 오브제들과 함께 그때 살아남은 오브제들을 같이 설치했다. 시공을 초월해 전이되는 기억, 중첩되는 기억의 생리를 증명하는 현장이라고 해도 좋다. 전이되고 중첩되는 기억이 그 실체를 얻는 현장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불탄 작업실 작업도(작가에게는 심지어 불탄 작업실마저 작업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삶 자체가 작업이다), 광주 국군병원 설치작업도 똑같이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아무도 모른 채 지나칠 수도 있었을 일을 불에 그을린 사물들이, 갈라지고 터진 흙바닥이, 그러므로 사물화된 기억이 일깨워줄 터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작가는 매향리에서도 광주를 보고, 호주 원주민에게서도 광주를 본다. 어쩌면 일상에서마저 광주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고, 트라우마를 본다. 끈질기게 살아남는 기억의 고집을 본다. 

그렇게 기억을 통해서 말하는, 사실은 기억 뒤편에 숨은 작가가 말하는 작가의 작업은 사사로운, 일상적인, 소시민적인, 평범한, 애틋한, 살가운, 공동체적인, 역사적인, 사회(학)적인, 때로 윤리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층위가 상호작용하면서 유기적인 한 몸을 일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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