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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담론을 통해 본 고승현의 자연미술 (2)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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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담론을 통해 본 고승현의 자연미술  (2)


고충환

 



고승현의 자연미술 



자연 되기 


그렇게 자연미술 특히 고승현의 자연미술은 자연에 자기가 동화되는 과정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스로 자연이 아니면서 자연 되기를 추구하는 것인데, 들뢰즈와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의 되기의 철학에 대한 공감이 확인된다. 

여기서 되기란 한 주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자 되려는 지향점에 주체를 투사하는 것, 타자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내재화하는 경험을 통해 타자와의 차이에 공감하며 나아가 그 공감을 토대로 모든 사태를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고 느끼는, 그렇게 다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 전체성보다는 이질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것, 통합적인 구조에 반하는 뿌리줄기(리좀) 구조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 집합체(유기적인 전체와는 다른)와 다중성(종 다양성?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실험하는?)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타자?)가 되는 것 혹은 되려는 경향성, 예컨대 여성 되기, 아이 되기, 나무 되기, 동물 되기, 자연 되기로 이해하면 되겠다. 흉내 내기, 척하기, 타자 되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흉내를 내고 척하는가. 타자 되기란 무슨 의미인가. 역지사지다. 역할극이다. 타자가 되어봄으로써 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로써 제도가 타자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타자에게 무엇이 억압돼 있는지, 억압의 진원이 어디인지(혹은 무엇인지) 캐내고 주지시키는 것이다. 눈속임이고 탈주다. 자기를 지목하려는 제도의 관성과 기획에 대해 차이를 생성시키면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타자 되기에는 이런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의미가 중첩돼 있다. 


작가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작가 고승현은 자연 되기를 통해 자연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이를테면 도구화된 자연)이 자연에 대해 억압적인 것임을 주지시키고, 자연에 대한 제도의 독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도구화된 자연으로부터 영적인 자연으로 인식 전환을 유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을 다시 보고 읽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원초적 자연, 자연의 원형, 자연 자체를 맞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고승현의 자연미술을 통해서 그 실천 논리를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나의 작업은 매우 간단하다. 구체적인 어떤 형상을 만들기보다는 호흡하고 생각하고 만져보며 관찰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다.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나 드로잉의 방법으로 자연의 형상과 일치시키거나 연결점을 찾아 작업을 한다. 이를테면 나는 자신의 몸과 자연의 일부분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기를 즐겨한다. (고승현) 


자연 되기를 도구로 작가 고승현의 작업을 분석할 때 그 개념적 성격이 단연 돋보이는 작업이 있다. 작가와 소가 함께 벌이는 퍼포먼스가 그렇다. 작가가 입에 풀을 물고 있고 소가 그 풀을 뜯어 먹는, 풀을 매개로 작가와 소가 하나로 연결된, 그러므로 그 자신 또 다른 소로 화한 작가와 소가 동격이 되는 퍼포먼스다. 소와 함께(1983. 공주 산성공원), 낙타와 함께(2016. 남아프리카공화국 랑게반), 그리고 당나귀와 함께(2019. 이탈리아 산 베르나르도) 같은 상황 논리의 퍼포먼스를 작가는 버전을 바꿔가며 보여주고 있다. 


이 일련의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풀을 매개로 소가 되고(소 되기), 낙타가 되고(낙타 되기), 당나귀가 된다(당나귀 되기). 자연이 되고(자연 되기), 타자가 된다(타자 되기). 자연과 소통하고 싶은, 그 자신 자연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며 관념을 예시해주는 프로젝트다. 이후 나무 되기, 꽃 되기, 풀 되기와 같은 다른 작업으로 변주되는 일련의 되기 시리즈 작업에서의 개념을 대변하는 표상과도 같은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고승현의 자연 되기는 드로잉을 매개로 자연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법과 과정이 특징이다. 신체 위에 드로잉하기도 하고, 신체를 자연의 일부로 매개하기도 하고, 자연 위에 드로잉하기도 한다. 각 신체 드로잉, 매개 드로잉, 자연 드로잉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먼저 신체 드로잉을 보면, 암벽의 크랙에 연장된 선을 몸에 그려 넣은 작가가 암벽을 타고 있는, 그래서 암벽의 일부처럼 보이는(1987. 서해안 삽시도), 자갈의 형태와 크랙에 연장된 선을 몸에 그려 넣은 작가가 자갈밭에 누워있는, 그래서 자갈처럼 보이는(1989. 서해안 외연도), 흙바닥에 난 크랙에 연장된 선을 손바닥에 그려 넣은 작가가 손바닥을 흙바닥에 대고 있는, 그래서 흙바닥처럼 보이는(1993. 문의 대청호수), 몸에 흙물로 종유석을 그려 넣어 동굴 속 종유석에 일치시킨, 그래서 종유석처럼 보이는(1995. 필리핀 사카다 크리스털 동굴), 얼굴에 풀을 그려 풀밭에 누운, 그래서 풀처럼 보이는(1989. 공주 계룡산), 몸에 꽃을 그려 꽃밭에 파묻힌, 그래서 꽃처럼 보이는(1989. 공주 계룡산) 작업들이 있다.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자연에 연장된 신체 드로잉을 매개로 각 암벽 되기, 자갈 되기, 흙바닥 되기, 종유석 되기, 풀 되기, 꽃 되기를 실연(그리고 실현)한다. 


이처럼 신체 드로잉이 자신의 몸 위에 그린 드로잉 그러므로 그려진 선을 자연의 선 그러므로 주어진 선에 일치시켜 자연처럼 보이게 한 경우라면, 아예 신체 자체를 자연의 한 부분으로 내어준 경우, 신체 자체를 자연의 일부로 매개하고 개입시킨 경우(신체풍경? 바디스케이프?)를 매개 드로잉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해변에 누운 자신의 몸을 해안선에 일치시킨(1989. 서해안 외연도), 움푹 팬 길 위에 누운 몸을 매개로 단절된 길을 연이어준(1987. 부여 부소산), 마른 호수 바닥에 누워 갈라지고 터진 호수 바닥에 자기를 일치시킨(1988. 청양 칠갑산 천정 호수), 그리고 나뭇가지를 입에 문 채 물속에 누워있는, 그 자체 재생과 정화의식을 떠올리게도 되는(1996. 공주 원골) 작업이 그렇다. 


자연의 일부로서 자신의 신체를 내어준, 그래서 주어진 자연풍경을 변형한, 그리고 어쩌면 그 자체 불완전한 자연풍경을 내가 들어서 완성했을지도 모를, 최소한 자연과 신체가 매개되는 상황 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는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각 해안선 되기, 길 되기, 그리고 호수 되기를 실연(그리고 실현)한다. 몸을 매개로 끊어진 길을 잇기도 하고, 갈라지고 터진 마른 호수의 상처에 동참하고 공감한다. 


작가의 작업이 다 그렇지만 이처럼 자연에 자신(신체)을 던지는, 그래서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게 만든 작업들이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을, 지각 현상학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나는 지각을 매개로 이미 세계에 속해져(연장돼) 있어서 나와 세계를 주(체)와 객(체)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그렇게 작가가 자연에 동참하고 타자를 알아가는, 작가만의 방법이며 태도를 예시해주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 드로잉이 있다. 물이끼를 실처럼 풀어 물이 들고 나면서 바위 위에 남긴 흔적을 흉내 낸(1994. 공주 공암), 파도가 들고 나면서 해변에 남긴 흔적을 따라 드로잉을 그린, 그리고 물이 밀려와 드로잉을 지우는(2016. 남아프리카공화국 랑게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자갈돌을 모래사장 위에 일렬로 배열한, 그 밑으로 그림자가 생기는, 해가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그림자도 덩달아 움직이는, 그렇게 해가 그림을 그리는, 그러므로 해가 없으면 그림도 없는,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일종의 해시계를 흉내 낸(1984. 서해안 안면도) 작업이 그렇다. 


자연을 소재(재료)로 자연에 드로잉한, 그러므로 작가의 매개와 간섭을 최소화한,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행위가 매개되기 전 상태 그대로 되돌려지는 작업이란 점에서(작업이 끝나면 모든 것을 다시 본래대로 되돌려준다. 혹 그러지 않더라도 자연은 내가 행한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 속으로 어김없이 흡수한다. 8)


) 상대적으로 자연미술의 지향에 충실한 작업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자연 드로잉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최소한의 매개와 간섭과 개입을 통해(최소한이란 점에서 미니멀리즘도 자연미술의 한 덕목일 수 있다) 자연이 자기 그러므로 생태를 실현하는 현장을 확인하는 것(호흡하고 생각하고 만져보며 관찰하는 것. 고승현)이 말하자면 작가 고승현이 지향하는 자연미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미술에 부합하는 경우로 헛손질로 나뭇잎의 그림자를 움켜쥐었다가 풀어주는(1987. 공주 산성공원), 손가락 사이에 꽃대를 끼워 붙잡고 있다가 풀어주는(2016. 남아프리카공화국/ 2019. 이탈리아/ 2019. 일본), 그리고 돌 위에 비친 풀 그림자, 그러므로 어쩌면 풀이 그린 그림을 포착해 보여주는(2019. 이탈리아 산 베르나르도/ 이탈리아 꼬르떼 산트 안드레아) 작업이 있다. 


이 작업에는 분명 작가의 개입이 있고 매개가 있지만, 자연의 입장 그러므로 자연의 시각에서 볼 때 처음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최소한이고 미니멀이다. 어쩌면 거저, 단순히 자연이 거기 있음, 혹은 거기 있었음에 대한 존재의 증명을 위한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내 의식과 감각이 잠든 순간에도, 그리고 내 의식과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깥에서도 자연은 거기에 여전히 존재했었음을 새삼 주지시키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연의 입장이라고 했고 자연의 시각이라고 했다. 그 자체, 말하자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기야말로 작가가 추구하는 자연미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일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시선은 권력이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읽는 주체와 읽히는 객체, 명명하는 주체와 정의(규정)되는 객체로 구분하면서, 서로 주체로서 군림하려는, 그래서 서로 맞잡을 수 없고 화합할 수도 없는, 그래서 소외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부조리한 삶의 조건이고 실존적 조건이라고 했다. 실존주의다운 냉소적 태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시선의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추구하는 자연미술은 바로 이런, 시선의 권력관계를 허물어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상호내포적인 관계를 복원하는, 시선의 정치학을 정향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쉽게 말해, 시선(그 자체 지식이 비롯되는, 지식의 원점이고 씨앗이라고 해도 좋을)이 인간이 독점하는 전유물일 수 없다. 자연에도 시선이 있다(그러므로 자연에도 지식이 있다). 내가 자연을 쳐다보면, 자연도 나를 쳐다본다. 쌍방 주체를 인정할 때, 그렇게 쌍방 주체로서 서로 쳐다볼 때(비록 사르트르는 불가능하다고 얘기하지만) 비로소 교감도 가능해진다. 교감이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시선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나는 거미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내 손을 거미줄 뒤에 놓고 사진을 찍었고, 이러한 개입을 통해 시점을 거미로 이끌게 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재인식시키고 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이끈 것이다.9) 

 


작가는 거미의 시점에서 자신의 손을 찍었고 얼굴을 찍었다. 마치 거미가 작가를 쳐다보듯, 거미의 시점에서 작가가 어떻게 보일지 유추해보게 만드는 사진을 찍었다. 거미를 위해 작가가 기꺼이 모델이 돼 주고 타자가 돼 준 것이다. 그렇게 쌍방 주체가 실현되면서 비로소 작가와 거미, 작가와 자연, 작가와 세계가 교감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메를로 퐁티는 나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나와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나와 세계, 나와 자연, 그러므로 어쩌면 나와 너의 상관적이고 상호적인 그러므로 상호 내포적인 관계를 인정한 것이다. 타자에게 시선을 돌려주는 것, 타자로 하여금 시선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다르게 보기(존 버거 John Peter Berger)와도 통하고, 생태학의 다른 방식의 관계를 상상해 보기와도 통한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이 다 그렇지만, 생태 드로잉으로 특정할 수 있는 작업들이 있다. 개펄에 작가가 그려놓은 그림을 게가 변형시킨(1983. 서해안 안면도), 개펄에 작가가 그려놓은 배열을 고둥이 변형시킨(1987. 서해안 삽시도), 흙물 위로 감 씨가 흘러내리면서 드로잉을 그린(2004), 흙물 위로 수세미 씨가 흘러내리면서 드로잉을 그린(2005) 작업이 그렇다. 살아 움직이면서 변형하는(그러므로 어쩌면 창조하는) 생명의 관성을 이용해 그린, 중력과 같은 자연의 물리적 성질을 이용해 그린, 그러므로 자연과 작가가 협력해 그린 그림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 오브제와는 비교되는 인공 오브제를 매개로 한 작품이 있어서 주목된다. 녹슨 못 등 버려진 오브제를 주워 와 스탬프 모양으로 재구성한, 마치 길 위에 스탬프라도 찍어 놓은 것 같은, 그 자체 또 다른 맨홀처럼도 보이는, 더욱이 흰 눈과 대비되면서 더 강조돼 보이는 작업(2000. 여수)이 그렇다. 눈이 쌓인 길 위에 손바닥 도장을 찍은 작업(2017. 공주 정지산)과 함께 스탬프 그러므로 도장의 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 증명이 지문이라고 한다면, 도장은 그의 사회(학)적 제도적 인격을 대변해주는 신분 증명일 수 있다. 자연미술에 초점이 맞춰진 작가의 작업이 사회학과 접목되는 지점이고, 사회학(그러므로 어쩌면 사회생태학)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작업이다. 


그리고 문자와 같은 기호(언어)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개념 드로잉으로 정의할 만한 작업도 있다(1982. 공주 앵산 공원). 사람들이 서로 몸을 기대면서 人心(인심)과 같은 문자를 흉내 낸 것이다. 흉내 내기 혹은 모방의 대상이 자연으로부터 언어 그러므로 추상적인 기호로 대체된 것이란 점에서, 특히 문자를 재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동원된 것이란 점에서 특이한 사례를 예시해준다고 생각한다. 한눈에도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앞서 본 도장을 소재로 한 작업과 함께, 작가의 자연미술이 사회학과 접목될 수 있는, 그러므로 예술사회학(사회생태학)을 도구로 자연미술을 읽을 수 있는 계기를 열어놓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무 조각에 새 깃털을 꽂아 물에 띄워 보낸(2017. 터키 이즈미르 버드 파라다이스), 나무 조각에 조약돌을 얹어 물에 띄워 보낸(2011. 이란 카스피해) 작업이 문학적이고 존재론적이고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아마도 새 깃털이 유래한 하늘 위로 새 깃털을 날려 보내는, 조약돌이 유래한 곳으로 조약돌을 되돌려보내는 회향 의식일 수 있다. 깃털이 유래한 곳? 조약돌이 유래한 곳? 그러므로 존재가 유래한 곳으로 존재를 돌려세우는 회귀 의식일 수 있다. 현대인은 너무 멀리 왔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아득해지고 까마득해지고 잊힐 만큼. 그렇게 현대인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기의 유래를 상실하고, 자기의 원천을 상실하고, 자기의 원형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뿌리도 없이 부유하는 삶의 현실을 앓고 있다. 이 작업은 그런 상실의 시대에 들이미는 처방전 같고, 묘약 같고, 시 같다. 정처 없는 여행에 비유되는 삶의 알레고리 같다. 


그런가 하면, 소똥에 꽃을 심은, 그리고 행복한 소똥이라고 명명한 작업(2017. 루마니아)이 생성과 소멸이 순환하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존재의 생리에 대한 학문이랄 수 있는 생태학의 표상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똥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와도 인연이 있는, 아마도 작가와의 만남으로 인해 자연미술가로 변신했을 영국의 여류작가 케리 모리슨의 작업을 작가는 가장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10)


 영국 집에서 과일을 먹고, 한국에 와서 흙밭에 똥을 누고, 그 토양이며 똥을 양분 삼아 실제로 과일을 키우는 작업이다. 그리고 똑같은 과정을 역순으로도 실행해 보여주는 작업이다. 똥(그러므로 생명)을 매개로 한국과 영국이(그러므로 존재와 존재, 타자와 타자가) 상호 이주하고, 상호 교류하고, 상호 내포되는 작업이다. 생태와 생태학의 실체가 손에 잡히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감동적이라는 작가의 기억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창틀과 같은, 벽감과 같은 건물구조의 한 부분으로 만든, 때로 흙벽에 난 우연한 틈새에 돌과 못과 나뭇가지, 꽃과 풀잎과 새 깃털 같은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오브제를 배치한 작업(2017. 루마니아 라자레아 캐슬)이 수집과 채집, 배열과 배치, 편집과 재구성으로 나타난 조형 원리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무상자 시리즈로 나타난 작가의 또 다른 작업을 예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미술의 확장_나무상자 시리즈 


이 오브제는 평소 자연 속에서 발견한 자연물들이다. 그리고 특별히 폐자원센터에서 골라 모아왔던 크고 작은 동파이프들도 함께 하였다. 동은 금속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재이다. 인간의 피부같이 온도와 습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에게는 살아있는 생물체로 느껴져 젊은 시절부터 좋아해 온 금속재료다. 또한, 40여 개의 낡은 오동나무 상자는 50년 전 공주 막걸리 양조장에서 술밥을 말릴 때 사용된 것으로 나의 소중한 기억을 담아 놓기에 적합하였다. 이 재료들을 다시 만져보고 조합하여 재생시키는 동안 나는 과거로의 즐거운 시간여행에 흠뻑 취하였다. 11) 

 


작가는 얼마 전 문을 닫은 양조장에서 공수해 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막걸리(그러므로 어쩌면 기억과 추억)를 발효시킬 때 쓰는 낡은 오동나무 상자에 한국을 포함 독일, 몽골,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각지에서 채집해온 오브제들을 담아 재구성했다. 피스타치오 씨앗 껍질, 죽은 새나 고라니의 뼈다귀, 고목 둥치와 나뭇가지, 나뭇잎, 조개껍데기, 산호, 조약돌, 새집, 벌집, 불가사리, 솔방울, 강낭콩 꽃씨, 멕시코 조개, 고슴도치 과 동물의 가시털, 새의 깃털, 규석, 가시나무, 마른 솔잎, 암모나이트 조개화석, 그리고 섬세한 조각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벌레가 파먹은 나무와 같은 자연 오브제들이다. 


그리고 구리 코일, 배수관,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 팬 장치, 키보드, 트랜지스터, 유년을 상기시키는 미니카, 낡고 해져 읽을 수 없게 된 군번, 도무지 그 원래 기능을 알 수 없는 녹슨 철 구조물, 넬슨 만델라의 얼굴이 그려진 병뚜껑, 그리고 한 덩어리로 모여 기하학적 패턴을 만드는 볼트와 너트와 같은 산업 폐기물을 포함하는 인공 오브제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오랜 세월 물살에 휩쓸렸을 고철 조각에 흙과 자갈이 달라붙어 있는, 구리 파이프에 나뭇가지가 결합 된, 베틀과 양귀비 씨앗이 결합 된, 베를 짤 때 쓰는 북에 죽은 고라니 뼈가 구리 선으로 결합 된, 그렇게 자연과 인공이 결합 된 합성 오브제들도 있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해 한자리에 호출된 자연 오브제, 인공 오브제, 그리고 합성 오브제들이 낡은 나무상자에 담겨 재배치되고 재배열되고 있다. 그렇게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오브제들이 초현실주의에 연유한 사물의 전치와 낯설게 하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최초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일탈해 다른 맥락으로 갈아탈 때 의미 또한 덩달아 달라지는, 그렇게 또 다른 의미를 얻는 후기 구조주의의 탈맥락과 재맥락의 논법을 떠올리게도 된다. 


그러므로 후기 구조주의에서 의미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맥락 속에서 주어지고, 맥락과 더불어 수정된다. 그러므로 맥락이 의미를 낳는다. 다시 그러므로 맥락 바깥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무슨 말인가.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오브제가 처음 속해져 있었던 맥락이 있을 것이다. 생명(자연물의 경우)과 기능(인공물의 경우)이 그것이다. 생명이 생명을 다했을 때, 그리고 어떤 물건이 원래 수행했을 기능을 상실했을 때 그 의미는 달라진다. 더욱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지금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더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는지, 그렇게 관계가 재설정되었어야 했는지가 오리무중일 때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낯설어지는 것은, 그래서 전혀 다른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새로운 모든 것이 빠르게 시간 속으로 미끄러지고, 그러므로 멜랑콜리와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변질되는 것이 모든 사물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 여기에 모인 오브제를 매개로 정작 그때 그곳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 그러므로 원형적 기억을 되불러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가 채집할 당시에는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운 오브제들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두고 보는 동안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을 오브제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은 작가의 경우에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스러운 오브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나무상자 시리즈 작업은 기억을 불러오고, 추억을 불러오고, 스스로 그리움을 환기하기 위한, 그러므로 어쩌면 물신에 해당하는, 페티시에 해당하는, 그 자체 자연미술에 대한 작가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는, 다시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을 엿볼 수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나무상자에 오브제들(그러므로 어쩌면 기억과 추억)을 재구성해 놓은 작업이 있는가 하면, 나무상자에 흙물을 부어 침전시킨, 그 침전물이 마르면서 강바닥처럼 갈라지고 터진, 마치 그 자체 모판처럼 보이는, 발굴 현장 모형처럼도 보이는 나무상자 속에 규석과 같은 알록달록한 형형색색의 오브제를 심어 놓은 작업도 있다. 


그 오브제들이 토양에 뿌리를 내린 가능성의 씨앗을 보는 것 같고, 미증유의 싹을 보는 것도 같다. 그로부터 무엇을 보게 될지, 무엇을 읽게 될지 정해진 바가 없는, 전적으로 열린 의미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시공을 초월해 한자리에 모인 오브제들이, 맥락을 갈아탄 오브제들이 낯섦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그 오브제들은 텍스트다. 그리고 미셸 투르니에는 책을 펼치는 순간, 절벽에 새까맣게 붙어서 잠자던 흡혈박쥐들이 일시에 날아올라 독자의 피를 빤다고 했다. 흙 속에 파묻힌 알록달록한, 형형색색의, 꿈꾸는 듯 아롱거리는 오브제들에 마주하는 순간, 그 오브제들이 저마다 일시에 날아올라 어떤 상처를 만드는지 두고 볼 일이다. 


앞서 작가의 나무상자 작업은 초현실주의에 연유한다고 했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발견된 오브제(작가의 경우에는 자연 속에서 발견한 자연물들)와 관련이 깊다. 초현실주의 작가 중 특히 요셉 코넬(Joseph Cornell)이 일련의 상자 작품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중에는 자연물도 있고 인공물도 있다. 그 오브제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가 작가의 경우와 통한다. 행선지가 표시된 지도, 각종 물품 표, 비행기표, 엽서, 우표, 네 귀가 너덜너덜해진 낡은 흑백사진, 급하게 휘갈겨 쓴 메모, 명승지의 지명이 각인된 조잡한 열쇠고리, 박제된 작은 새, 지구의, 지팡이, 우산 등등. 


비행기표나 엽서나 우표는 하나같이 도장이 찍혀 있거나 서명이 되어 있어서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상자 작품에 진열된 물건들은 한마디로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이 잡동사니 물건들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아쉬워하고, 아득한 시간을 그리워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물건들의 기억력을 작가의 오브제 역시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브르통(Andre Breton)은 시와 오브제를 결합한 시적 오브제(Poem Objet)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특정의 시상(詩想)에 대해서는 강한 환기력을 갖지만, 그 자체로는 철저하게 무용한 오브제들이다. 그러면서 무용한 사물들로 가득한 가방을 그 예로 들고 있다. 기능을 상실했지만 손때묻은 사물들,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버려 지지가 않는 사물들,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주물 같고 페티시 같은 사물들일 것이다.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창안한 상징 오브제는 어떠한 매개도 없이 인간의 잠재의식 그러므로 무의식에 직접 호소해오는(질 들뢰즈의 표상 없는 기호?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의 푼크툼?), 작가에 의해 고안된 오브제를 말한다. 


그렇게 초현실주의는 이런저런 오브제들과 함께 자연 오브제, 반(半)자연 오브제(녹슨 철판과 가공된 나무와 같은), 재해 오브제(화재나 홍수와 같은 재해로 인해 원형이 훼손된 오브제), 발견된 오브제, 해석된 오브제를 제안했는데, 작가의 나무상자 작업과도 관련이 깊다. 특히 발견 오브제는 오브제를 작가가 발견하는 과정에서 예술로 부를 만한 작가의 심미적 계기가 작용했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하게 선택된 것인지가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이런 발견 오브제에 작가의 가공이 개입되거나 혹은 그것을 전시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심미적 계기가 작용하게 되면, 해석된 오브제(작가에 의해서 해석된 오브제)가 된다. 


오브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친숙한 세계가 진즉에 자기 내부에 잉태하고 있었던 낯선 요소를 발견해내는 일, 그러므로 캐니와 언캐니의 상호 내포적인 관계를 인식하는 일과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들고 다르게 보게 만드는 일과 관련이 깊다. 특히 낯선 요소의 발견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오브제는 분더카머(Wunderkammer) 곧 진기한(진귀하고 기이한) 사물들을 모아놓은 방과도 관련이 깊다. 


그 자체 박물관과 미술관(그러므로 작가의 나무상자 작업에 대해서는 서랍처럼, 그 자체 독립된, 사사로운, 때로 은밀한 작은 미술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의 전신이기도 한 분더카머는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하고, 타자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반영하고, 식민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을 반영하고, 오리엔탈리즘을 반영하고, 에로티시즘을 반영하고, 해부학을 반영하고, 기형과 이형적 존재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반영한다(찰스 다윈 Charles Robert Darwin은 생물학적 진화의 가능성을 돌연변이 그러므로 기형과 이형적 존재에서 찾는다. 진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사실을 예측 가능한 사실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세계를 재구성하는(그러므로 자기만의 세계를 짓는) 예술가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렇게 자연 오브제, 인공 오브제, 그리고 자연과 인공이 합체된 합성 오브제를 매개로 기억을 불러오고 추억을 환기하는, 그리고 때로 기형과 이형을 제안하는(그 자체 어쩌면 다른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보기를 제안하는 생태학의 한 갈래와도 통하는) 작가의 나무상자 시리즈 작업은 자연에 대한, 그리고 예술(자연미술)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호기심과 사랑과 욕망을 반영한다. 



자연미술의 확장_소리예술  


소리예술_존 케이지와 환경음파의 경우 


나는 음악을 만들 때 소음을 사용하는 일이 전자 장비의 도움으로 음악을 창조하는데 이르기까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믿는다. 그 전자 장비들은 어떤 소리라도 음악적 목적에 유용하도록 만들 것이다. 음악의 종합적 창조를 위하여 광전자, 영화, 그리고 기계적 매체들이 연구될 것이다. 과거에는 논란의 지점이 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있었다면, 머지않은 장래에는 소음과 소위 음악적 소리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다. 12)


소리예술은 소리를 매질로 사용하는 예술이다. 고승현 작가의 <나무상자> 시리즈 작업이 오브제를 도입해 기왕의 자연미술을 확장한 것이라면, <백 년의 소리_가야금>은 소리를 매개로 또 다른 형식의 확장을 꾀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특히 인위를 거부하고 자연을 추구한 선 사상에 바탕을 둔 자연음, 우연음, 일상음, 채집음, 환경음을 주장한 존 케이지와 그가 이끌었던 환경음파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케이지가 보기에 기왕의 음악은 고도의 기교로 인해 선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80년 독일 베를린 아카데미 데어 쿤스트에서 열린 전시 <눈과 귀를 위하여>를 넬레 헤르틀링과 공동 기획하는 등 1980년대 이후 다수의 주목할 만한 소리예술 관련 전시를 기획한 바 있는 르네 블록(Rene Block)은 소리예술을 장 팅겔(Jean Tinguely) 등 키네틱아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리설치의 경향(모리스 오펜하임 Meret Oppenheim, 사르키스, 라이도나), 존 케이지의 환경음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환경음파(음환경파라고도 한다)(필립스, 오테, 막스 뉴하우스, 빌 폰타나 Bill Fontana, 테리 폭스 Terry Fox), 플럭서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개념적 소리예술의 경향(코나, 라 몬테 영 La Monte Young), 그리고 소리행위(사운드 퍼포먼스)의 경향(죤스, 크리스티나 크비슈, 프레쉬, 그리고 아마도 보이스 퍼포먼스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존 케이지의 소리예술은 선(禪) 사상에 힘입고 있다. 여기서 선 사상은 무결정성의 미학과 간결성의 미학 그리고 우연성의 강조로 나타난다. 삶의 현장에서 유래한 우연하고 돌발적인 다양한 소리를 소리예술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환경음의 바탕이 된 케이지의 선 사상에 대해서는 특히 1952년에 발표한 작업 <4분 33초>에서 엿볼 수 있다. 


케이지가 제시된 그 시간 동안 연주에 해당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으로도 알려지게 된 작업에서, 그 시간 동안 발생한 모든 우연적인 소리가 일종의 음악이 되었으며, 결국 침묵이 아닌 소음이 음악이 된 셈이다. 이로써 케이지는 소리를 제시하는 대신 소리를 듣는 것을 통해서 어떤 근원적인 존재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음악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지 않을 뿐, 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존 케이지에 공감하는 환경음파를 보면, 베를린 호흐슐러의 베르톤치니(Mario Bertoncini)가 직접 제작한 공기 하프를 들 수 있다. 실내는 물론 야외에 공기 하프를 세워두면, 대기 중의 바람이 하프의 현을 건드리면서 연주가 된다.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사람이 아닌 자연이 되는 셈이다. 특히 고승현의 작업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환경음파로 분류되는 작가 중 크리스토프 샤를(Christopher Charles)의 <Undirected/ Entbidung>은 컴퓨터에 의해 제어된 음향과 영상, 그리고 이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상호침투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케이지의 우연성 이론에 충실한 편이다. 그런가 하면 실 플로이어(Ceal Floyer)는 <파기 Digging>란 작품에서 땅을 파는 소리를 증폭해 들려주는 스피커를 통해 환경음을 직접 도입한다. 


그런가 하면 소리예술을 매개로 자연과 환경 생태를 테마로 한 에콜로지를 다룬 경우가 주목된다. 구닐라 린더가 그런데, 일종의 인공생명을 다룬 일련의 작업 <생태방어연구>에서 작가는 길게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무나 화분에 심은 꽃, 센서와 컴퓨터 그리고 CD 플레이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한다. 관객이 나무나 화분에 다가가면 관객의 접근을 감지한 센서가 보내온 신호에 따라서 나무나 생화가 반응하는 상호작용 작업이다. 이때 나무와 생화의 반응은 마치 동물의 그것과도 같은 떨림과 소리와 소음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접근으로 인해 식물이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진동과 소리의 형태로 치환한 것이다. 식물이 내장한 에너지의 실체를 체감할 수 있는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식물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각하며, 반응하는 주체임을 말해준다. 과학과 생태가 유기적으로 결합 된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울리히 엘러의 달팽이 껍질을 소재로 한 <달팽이의 노래, 1992>는 북 위에 놓인 달팽이 껍질이 그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독특한 마찰음을 내는 작업이다. 또한 엘러는 거대한 식물 조형의 꽃술로부터 실시간으로 야외의 음이 갤러리 안에 울려 퍼지게 한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태양전지로부터 에너지를 전달받은 썩은 거목의 뿌리가 미묘한 음을 내며 진동하는 크리스티나 크비슈의 작업을 비롯해, 폴 판하우젠, 데이비드 던, 사마크와 같은 작가들이 소리를 매개로 생명(에콜로지)을 다루고 있다. 



소리예술_고승현의 경우(백 년의 소리_가야금) 


언제부터인가 자연을 바라만 보기보다는 자연의 작은 소리에 더욱 집중한다. 생명의 소리로 충만한 자연은 언제나 나를 감동시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 소리, 구성지게 지저귀는 산새들과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나는 이와 같은 자연과 닮은 소리를 가야금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그 소리는 맑고 우아하며 자연의 소리와도 잘 어울린다. 그렇지만 나는 전통의 가야금 제작 방법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재료의 선택도 매우 자유롭다. 가급적 현장에서 발견한 나무를 사용한다. 지역에 따라서 나무의 종류와 크기, 모양,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제작 방법도 달리한다. 따라서 그 소리도 분명 서로 다른 특성이 있다. 서로 다른 자연물들이 자연 속에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듯이 사람들이 연주하는 나의 가야금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세상의 평화와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13)

 


앞서도 보았지만, 고승현의 작품 <백 년의 소리_가야금>은 <나무상자> 시리즈와 함께 기왕의 자연미술을 확장하려는 한 시도로 보인다. 그리고 소리를 매질로 하는 소리예술 중 특히 인위를 거부하고 자연을 추구한 선 사상에 힘입고 있는 존 케이지와 그가 이끈 환경음파, 그리고 에콜로지(생태학)를 테마로 한 소리예술의 경향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자연에는 소리도 있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들을 수 없는 소리도 있다. 아마도 들을 수 없는 소리의 음역이 더 크고 광범위하게 존재할 것이다. 사람의 인식도 그렇고 감각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연은 사람의 인식과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깥에(도) 있다. 아마도 자연에 대한 사람의 영역은 도구화된 자연에 머물고, 개념으로 환원된 범주(그러므로 개념화된 자연)에 한정될 것이다. 


혹자는 봄에 땅에 귀를 기울여보면 새싹이 언 땅을 깨고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운동이 있으니 소리도 당연히 있을 것이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생명에 공감하는 소리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귀 기울인다는 말은 자연에 공감한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작가는 세계 각지를 떠돌며 30여 점이 넘는 가야금(?)을 제작했다. 소나무, 체리 나무, 은행나무, 자작나무, 오동나무, 감나무 등 수종도 다양하다. 벌목된 나무, 번개에 쓰러진 나무 등 현지에서 직접 채집된 나무를 재료로 하는 만큼 형태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다. 매번 지역적인 특성을, 생리적인 특질을 반영한, 그래서 현지인들이 쉽게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소리를 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무를 선택하는 단계에서부터 저절로 지역 사람들의 자연이며 생리가 반영되는 것인 만큼, 매번 그 지역만을 위한 가야금이 제작된다고 해도 좋고, 그런 연유로 가야금들은 아비코, 리코로데, 마술레와 같은, 실제로 가야금이 제작된 지역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고(실제로 유명 음악가가 정식으로 연주한 적도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나무에 귀를 갖다 대고 나무를 타고 흐르는 진동으로 소리를 느낄 수도 있다. 보이는 소리, 들리는 소리, 만져지는 소리, 느껴지는 소리가 실현되고 있다. 소리가 다른 감각으로 번안되면서 통하는 공감각이 실현되고 있다. 소리와 소리가, 감각과 감각이,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그리고 어쩌면 화합)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매개와 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이를테면 몸체에 매어진 줄을 손끝으로 튕기는 순간 울려 나오는 소리가 그 나무의 나이테(그러므로 나무의 연륜, 나무의 삶의 시간) 속에 배어든 갖가지 소리를 불러내어 함께 어우러진다는, 관념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작용이 일어나는 순간에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다. 


누군가가 매개되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고 했다. 여기서 매개자 그러므로 연주자는 사람이 될 수도, 자연이 될 수도 있다. 바람이 될 수도, 대기가 될 수도 있다. 바람은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다가와 현을 흔들고 나무를 건드린다. 그렇게 작가의 가야금은 소리를 매개로 사람과 교감하고 자연과 교감한다. 그리고 어쩌면 보이지 않는 신 그러므로 자연의 영과도 교감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숨은 영을 일깨운다. 작가의 가야금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사람과 자연에 숨은 영이 교감하는 소리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그러므로 죽은 나무를 소재로 한 작가의 가야금은 가야금이면서 가야금이 아니다. 어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가야금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자연미술을 소리예술로까지 확장하는 계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좋다. 자연에는 소리도 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보다 더 큰 음역의 들을 수 없는 소리로, 자연은 수런거리고 부산하다. 작가의 가야금은 그 들을 수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바람이 현을 흔드는 소리, 공기가 나무에 스치는 소리, 자연에 숨은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소리를 매개로 자연을 환대하고 초대하는 작품이며,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상생할 수 있는지 예시해주는 작업이다. 


소리를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화합할 수 있는지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작가의 가야금이 들어서 어떻게 인식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지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의 사회조각에도 비교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게 작가의 가야금은 지금도 루마니아 나자레아 아트센터, 독일 담스타드 국제숲예술센터, 중국 심천 퍼블릭 스컬쳐파크, 불가리아 두피니아트센터, 남아프리카공화국 리치몬드갤러리, 리투아니아 유로포스파커스 오픈에어 아트뮤지엄, 그리고 에스토니아 퀴트올그의 사냥꾼의 계곡과 같은 어느 한적한 숲속 공원을 찾은 사람들에게 자연이 연주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을 것이다. 




결론  


개념미술 이후 현대미술은 의미를 다투는 장이 되었다. 그리고 문화운동(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이후 현대미술은 담론을 생산하고 실천하는 이론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테리 이글턴 같은 사람이 이론 이후 그러므로 담론 이후를 말하기도 했지만, 담론 이후마저 담론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에 근거한 것이란 점에서, 담론을 통해서 담론 이후를 말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므로 그 자체 또 다른 담론의 제안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에서 담론은 여전히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작가 고승현이 직접 발의해 채택된 자연미술은 마치 담론의 다발과도 같다. 자연미술에는 기왕의 대지예술을 비롯해 생태예술과 환경미술, 자연관과 생명 사상,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 담론(하나의 지질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플라스틱과 같은 인간의 생산물에 의해 환경이 조성되는, 인구증가와 무분별한 소비와 같은 인간의 활동으로 환경이 결정되고 기후가 변화되는 시대를 의미)과 기후미술, 그리고 여기에 자연 되기의 이론과 실천이 하나로 얽혀있다. 


특히 자연에 동화되고 흡수되는(자연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난 자연 되기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담론이고 실천이라고 해도 좋다. 자연 되기는 질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르게 되기에 착안한 것으로서, 욕망의 용법과 관련된다. 다르게는 흉내 내기 혹은 척하기로서,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체제전복을 꾀하는, 내파 곧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으로 스스로 전복되기를 꾀하는 반체제적이고 반제도적인 실천 논리로서 제안된 것이다. 이를 작가의 작업에 적용해 보면 자연 되기를 통해 은연중 도구화된 자연으로 나타난, 반자연적이고 반생태적인 체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1981년 여름 금강에서 시작된, 국내 최고의 자연미술그룹 야투의 창립 맴버로 참여한 이후 지금까지 그룹을 이끌고 있는, 그리고 여기에 사계절연구회, 글로벌노마딕프로젝트,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통해 국내외적으로 자연미술을 심화하고 있는, 특히 이를 계기로 대외적으로도 인적 네트워크와 교류를 확장하고 있는 작가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한국 자연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나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자연미술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만났고, 신에 대한 믿음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작품을 만든다. 나는 하나님과 다른 관계로 분리될 수 없다. 매 순간 내 존재, 신앙과 삶은 항상 공존한다고 했고, 14)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것이다. 그런 자연 속에서 호흡은 곧 나의 기도이며 그 시간은 나의 신앙생활이다. 자연에 나의 논리를 적용하기보다는 자연의 섭리와 그 순리를 따라 나는 순응하고자 한다고도 했다. 15)

 


작가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작가의 자연미술은 곧 자연 속에 숨은 하나님, 혹은 자연으로 육화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므로 자연과 교감하는 작가의 행위는 곧 하나님과 교감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 속에 숨은 하나님과 만난다? 자연으로 육화된 하나님과 교감한다? 샤머니즘이고, 토테미즘이고, 애니미즘이다. 범신론이고, 물활론이다(그리고 어쩌면 영성주의다). 종교적인 특히 기독교의 신과는 사뭇 다른 결이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모방이 플라톤의 이데아(절대신 혹은 관념 신의 표상 그러므로 실재와도 같은)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듯이, 기독교의 신을 맞아들이기 위한 계기(그러므로 신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 계기의 표상과도 같은 작업이 있다. 곧추선 자세로 하늘을 향해 사다리를 치켜들고 있는,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을 향해 길을 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다(1985/ 1989 재연). 자연미술에 대한 작가의 소명 의식을 엿보게 해주는 표상과도 같은 작업이다. 그동안 작가는 자신의 작품 <길>에서처럼 길도 없는 길을 내느라 외로웠고, 그 덕에 이제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 길에 담론을 보태 좀 더 탄탄한 길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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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승현 고승현. 작가 노트. 2019. 


9) 고승현. 안케 멜린과의 인터뷰. 2005/ 거미줄. 공주 원골. 1996.  


10) 나태주. 고승현, 그는 아직도 젊다. 작가 인터뷰. 2010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특집. 공주문화. 2010. 7, 8월호. 


11) 고승현. 작가 노트. 2021. 


12) 존 케이지. 선언문. 1937(1958 개정). 르네 블록. 플럭서스 음악: 일상적인 이벤트. p.12. 독일 플럭서스 1962-1994. 매듭 많은 긴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2001. 재인용.  

 

13) 고승현. 작가 노트. 백 년의 소리-고승현의 가야금. 2009. 2011.  


14) 안케 멜린과의 인터뷰. 2005.2.25.  


15) 고승현. 작가 노트. 지난 25년을 되돌아보며. 2005. 



참고문헌 



고승현. 20세기 말 한국의 자연미술 운동과 세계의 자연미술: 

        그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석사논문. 한남대학교. 2000. 

        자연미술가 고승현의 제1차(2005), 유럽 3개국 순회전시회 리포트

       (에스토니아-퀼트오르그/ 독일-삭슨베르그/ 영국-할던벨베드레). 

        백 년의 소리 – 고승현의 가야금. 2005. 

        지난 25년을 돌아보며. 2005. 

        야투 자연미술운동과 고승현의 작품세계. 2009.      

        백 년의 소리-고승현의 가야금. 2009. 2011. 

        작가 노트. 2017. 

        작가 노트. 2019. 

        작가 노트. 2021. 

고충환. 야성, 야생, 야투, 그러므로 들에서 태어난. 또, 다시야생.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22. 연미산자연미술공원. 2022. 

김성호. 자연과의 호흡 – 고승현의 자연미술. 고승현 자연미술전. 

        금강자연미술센터. 2019. 

김찬동. 자연미술: 재야생과 카오스모제(Chaosmose)의 자연들을 위하여. 

        또, 다시야생.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21-2022. 

        연미산자연미술공원. 2022. 

나태주. 고승현, 그는 아직도 젊다. 작가 인터뷰. 

        2010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특집. 공주문화. 2010. 7,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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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플럭서스 1962-1994. 매듭 많은 긴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2001. 

마순자. 생태, 어떤 천국, 에코토피아의 봄. 미술평단. 1998. 겨울. 

박이문.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당대. 1997. 

안케 멜린. 고승현과의 인터뷰. 고승현 작품집. 2005. 

오세원. 재야생과 자연미술 담론에 대하여. 또, 다시야생.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22. 연미산자연미술공원. 2022. 

이성원. 야투-자연미술 연구: 1981년부터 1998년까지의 

        사계절연구회를 중심으로. 석사논문. 공주대학교 교육대학원. 2000. 

이응우.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지형을 향해 가는 야투의 자연미술운동 30년. 

        2011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자연미술국제학술세미나.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운영위원회. 2011. 

임동식. 야투창립선언문. 1981. 

조관용. 무기물과 생물의 경계는 있을까. 또, 다시야생.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2021-2022. 연미산자연미술공원. 2022. 

존 케이지. 선언문. 1937(1958 개정). 

전원길. 고승현의 백 년의 소리-가야금을 통한 기도. 

        고승현 백 년의 소리-가야금 자료집. 2017. 

채연. 합성된 자연, 현실을 비추다. 제10회 고승현 개인전 

      나무상자 – 자연과 인간. 금강자연미술센터. 2021.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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