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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의 조형성과 미학 _주제로 본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고충환


한국현대미술의 조형성과 미학

_주제로 본 한국현대미술의 단면 




고충환 | 미술평론가


▷①

생태 

생태 여성주의 

코라 

애브젝션, 애브젝트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류세 


▷②

주체와 자아 그리고 정체성 문제 

신체 풍경, 바디스케이프 

상실감 

신인류 


▷③

형상성, 형상 미술 

정치미술 

추상과 형상의 경계 

네오팝 

풍경화 

현대판 진경 

도시 회화, 어반아트 혹은 시티스케이프 


▷④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 

브리콜라주, 브리콜레르 

패러디, 그러므로 차용의 경우 

역할극 혹은 역할 놀이 


▷⑤

탈 조각 

미니어처 조각 

부드러운 조각 

사진 조각 


▷⑥

전형과 원형 

놀이와 유희 

판타지 메이커스, 환상 제작자 

네트워크 

역사 

독자적 텍스트와 작가적 텍스트 






생태.

세계적으로 화석연료 사용의 증가에 따른 환경오염과 지구생태계 위협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사실상 이를 계기로 삶의 질 전반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 생태 담론이다. 여기서 생태는 환경과 비교된다. 환경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관점에서 본 생태(지구생태계, 환경생태계 그리고 나아가 미술 생태계와 같은 하위 카테고리로서의 생태개념)를 말한다면, 생태는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는, 자연의 관점에서 본 생태(생명 사상으로 본 상위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생태개념)를 의미하는 것이 다르다. 생태가 환경을 포함하는, 상대적으로 더 큰 개념 혹은 카테고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생태 여성주의. 

여성주의는 크게 본질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생태주의로 나뉜다. 그중 생태 여성주의는 환경 문제, 생명 사상,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한편, 성적 정체성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면서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다원주의의 급진적인 경우보다는 본질주의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세계의 원형으로서의 아니마(여성성)를 아니무스(남성성)적인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칼 구스타프 융, 그리고 감성적인 세계의 회복을 위해 아니마가 내재하고 있는 문학적이고 시적인(그러므로 예술적인) 가능성에 주목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입장을 수용하는 편이다. 참고로 아니마는 여성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원형적인 숨(그러므로 호흡)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 의미가 생태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생명 사상과도 통한다. 


코라.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코라는 존재가 유래한 우주적 자궁 그러므로 원초적 자궁을 의미하고, 기호 그러므로 언어 이전의 무정형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원초적인 무정형 상태를 자족적인 욕동(원초적인 욕망)의 상태로 이해한다면 프로이트의 원초적 자아와 통하고,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신들의 향연)와 통한다. 기호 그러므로 언어 이전의 무정형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조르주 바타이유의 무정형 개념과 통하고, 자크 라캉의 상상계 개념과도 통한다. 그렇게 코라는 존재가 유래한 근원(삶)이고, 나중에 존재가 되돌아갈 집(죽음)이다. 그래서 존재는 코라를, 그러므로 집을 그리워한다. 


애브젝션, 애브젝트.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애브젝트는 침, 피, 땀, 똥, 오줌과 같은 신체 분비물을 의미하며, 이성이 지배하는 정신의 왕국을 전복하기 위해 소환된 것들, 이질적인 것들, 낯선 것들, 생경한 것들, 그로테스크한 것들, 혐오스러운 것들, 비 혹은 반 제도적인 것들, 규정할 수 없는 것들, 그러므로 이성이 추방한 것들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로 치자면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 

성 정체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관습의 결과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하면서 가변적이고 비결정적인 성 정체성을 실천 논리로 풀어내는 일군의 경향성의 작가들이 있다. 성 정체성 논의는 일종의 개념의 교차로에 비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와 에이즈, 몸 담론, 정상성과 비정상성 논의, 페미니즘과 재현의 문제, 성과 권력의 관계와 같은 주요한 핵심 논제들이 성 정체성 개념(혹은 담론)으로부터 파생되고 연동된다. 

196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의 와중에 정식화된 담론으로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코라와 애브젝션, 루이스 이리가레이의 여성적 글쓰기, 자크 라캉의 주이상스와 상상계, 슬라보예 지첵의 실재계, 미셸 푸코의 성과 권력,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와 에로티시즘, 수잔 손탁의 퀴어, 질 들뢰즈의 욕망의 용법과 관련이 깊다. 


인류세.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 담론에서 인류세는 하나의 지질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생산물에 의해 환경이 조성되는, 인구증가와 무분별한 소비와 같은 인간의 활동으로 환경이 결정되고 기후가 변화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그러므로 지구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인간이라고 본 것이다. 이산화탄소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원을 넘어 플라스틱과 같은 인간이 만든 물질이 새로운, 그리고 어쩌면 회복 불가능한, 돌이킬 수 없는 오염원이라고 본 것이다. 사태가 그런 만큼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를 탈피해, 자연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것이 요구된다. 

논객들이 많지만, 인간(human)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부엽토(humus)로 보는, 사람을 흙이 변형된 형태로 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동물, 식물, 다양한 반려자들과 함께 <이상한 친족관계>를 맺어 새로운 해법을 찾아보자는 도나 헤러웨이의 이론에, 그리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사회적이든 자연적이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상호관계 속에 존재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인 결합망이라고 하는 부르노 나투르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에 힘입고 있다. 

주요 작가로 바닷가에서 수거한 해양 쓰레기를 재구성한 정재철(실크로드프로젝트로도 유명한)의 설치작업을 들 수 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다니다가 어느 이름 모를 해안에 가닿았을 것들이 삶의 유비를 떠올리게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작가는 이 부유물들을 크라켄 그러므로 바다 괴물이라고 부른다. 자연을 위협하는 플라스틱 천지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Top





주체와 자아 그리고 정체성 문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리어왕은 절규했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자신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들어있지 않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정신인가. 몸인가. 의식인가. 무의식인가. 욕망인가. 마음인가. 아니면 이 모두의 총체인가. 모든 존재는 의미론적으로 텅 비어있고, 다만 존재가 이런저런 상황 속에 놓일 때 비로소 의미는 발생한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다시, 그러므로 상황이 없으면 의미도 없다. 그렇게 존재는, 존재의 의미는 상황에 연동된다. 

후기구조주의는 이런 상황적 주체를 타자라고 부른다. 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며,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허명이며, 다만 막연하게 주체라고 부르는 순전한 언어적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질 들뢰즈는 그 주체를 정신분열증적 분석이라고 부르고, 기관 없는 신체라고 부른다. 정해진 코드가 없이 임의적인 탈주선을 따라 욕망을 실천(실현)하는, 기관이 따로 없으므로 자유자재한 의식이다. 


신체 풍경, 바디스케이프. 

바바라 크루거는 당신의 몸은 전쟁터라고 했다. 몸은 개인의 정체성이 등록되고 삭제되고 수정되고 재기입되는 등기부다. 누가 등록하고 삭제하는가. 누가 호명하고 재현하는가(루이 알튀세의 이념적 주체). 그렇게 호명되고 재현된, 등록된 등기부와 더불어서 개인은 비로소 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적 주체로서 태어나고(혹은 거듭나고) 페르소나(페르소나의 어원은 가면에서 왔다)를 덧입는다. 신체 풍경은 분열을 포함한 심각한 자기 정체성 문제를 표상한다. 


상실감.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상실의 계절을 살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존재를 상실한, 자연을 상실하고,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원형을 상실한 시절을 살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정신적인 공허와 허무를 부르는(뒤르켐의 아노미),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가 죽음보다 피로한 시대(피로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징후이며 증상이라고 해도 좋을 현실을 살고 있다. 

깃들 곳을 찾지 못한 새가 녹슨 못과 합판 부스러기를 물어와 아파트 베란다에 집을 짓는다. 그렇게 자연은 이제 풍문으로나 떠돌고, 아득한 전설처럼 기억될 뿐이다. 유년 시절은 너덜너덜해진 흑백사진 속에서 빛이 바래져 가고, 그렇게 의심스러운 기억과 더불어 천국보다 낯선 자기와 마주하는 드문 계기로서나 겨우 추억될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있다. 그가 떠나온 고향은 실제로 자신이 태어난 지정학적 장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근본적인 상실감 그러므로 원형적인 상실감, 다시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정처 없는 사람이고 떠도는 사람이다. 

여기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상실한 원형을 되불러오는 것이다. 좀 극적으로 말해 오직 상실한 것만이 의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삶의 부조리가 있고 존재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상실한 것을 매개로 부조리한 삶과 아이러니한 존재를 주지시키고, 이로써 허물어진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복구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고장 난 세계를 수리하는 사람 그러므로 세계의 수선공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신인류. 

흔히 현대인을 신인류라고 부른다. 전에 없던 각종 첨단의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디지털 유목민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호명의 이면에는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인터넷 혁명이 있고, 세계 끝에 사는 익명의 주체와 통하게 해주는 스마트폰 혁명이 있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소통을 가로막는 어떤 시공간의 차이도 장애물도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 모두 살고 있다. 소통의 채널이 SNS로 옮겨오면서, 관계망 역시 SNS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렇게 새롭게 구축된 온라인 관계망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대면하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리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세계와 단절돼 있으면서 통하는, 세계를 손안에 쥐고 있는 고립된 개인이라고 하는,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현실을 낳고 있다. 

△Top




형상성, 형상 미술. 

원래 형상 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 진영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풍의 미술과 그리고 구상 회화와의 차별성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서 처음 유래했다. 당시 민중미술에서 유래한 용어로는 매체 미술도 있는데, TV와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에 나타난 사회문화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성의 회화를 의미했다. 형상 미술과 매체 미술은 말하자면 민중미술을 위한 실천 논리의 두 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형상성을 획득해야 했다. 그 이론적 근거를 게오르그 루카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론에서 가져왔는데, 반영이론, 전형이론 그리고 총체성 이론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의 형상성(그리고 형상 미술)이란 당대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형상을, 현실을 관통하는 전형적인 형상을, 그리고 총체적인 국면을 반영한 형상을 의미했다. 민중미술에서 형상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극적인 현실(극화된 현실)의 표현과 함께 사회적 현실의 전형적인 국면이 강조된 것에 따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정치미술. 

민중미술, 후기민중미술, 참여미술, 그리고 때로 형상 미술로 지칭되는 회화적 경향의 계보를 잇는 정치적 경향성의 회화. 


추상과 형상의 경계. 

동시대 추상미술은 추상미술을 지지하고 견인해온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형식을 해체하면서, 가능한 모든 형식을 불러들여 재편하고 재구성한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재현과 구상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식으로든 현실과 실재로부터 추상 된, 그래서 현실과 실재의 접점 혹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최근 추상의 경향이라고 해도 좋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그 자체 추상이기만 한 추상 그러므로 소위 순수추상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네오팝.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물결에 반응하는 중국의 냉소적 사실주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다져진 인프라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형상 미술을 예시해주고 있는 일본의 재팬팝(혹은 마이크로팝), 그리고 한국의 코리안 팝이 이러한 네오팝의 경향 아래 아우러진다. 


팝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성 담론으로 지지 되는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거대 담론이 지배하던 이념의 시대가 가고, 미시 담론과 개인적인 서사가 그 의미를 얻는 몸의 시대, 감각의 시대에 부상하고 있는 시대정신의 변화양상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나아가 일상성 담론은 세계인식의 지형도마저 바꿔놓고 있는데, 위로부터의 역사 대신 아래로부터 수렴되는 역사를 표방한 아날학파의 역사적 태도와도 맞물린다. 몸의 역사, 성의 역사, 패션의 역사, 음식문화의 역사가 종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중심의 역사의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팝으로 나타난 회화적 경향성에 대해서는 이처럼 변화된 세계인식의 지형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한편으로 네오팝으로 범주화되는 경향성의 회화는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도 연동되는데, 피부를 연상시키는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질감과 흐릿한 초점 그리고 클로즈업된 근접 시점으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사진 같은 회화), 현실 속에서 소재를 찾기보다는 미디어와 인터넷 속을 떠다니는 정보와 출처 불명의 이미지를 자기화하는 경향성의 회화(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왕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이나 태도와 관련되며, 기왕의 이미지를 숙주로 한 기생의 논리와 통한다), 그리고 제록스 프린터와 포토샵과 같은 미디어 고유의 성질을 이용한 기계적인 회화를 아우른다. 


한갓 사물에 특유의 아우라를 부여해 정서를 자극하는 연출사진과 이미지, 온갖 현란한 이미지들로 감각을 자극하는 광고 이미지들이 유혹하는 이미지들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현대인의 처지를 대변해준다. 흘러 다니는 이미지들(특히 낮보다는 밤에 광고판이 뿜어내는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이러한 표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이 도시적이고 영화적인 감수성과 통하며, 이는 그대로 네오팝 그러므로 어쩌면 신사실주의 경향성의 회화로 범주화되는 작가들의 내면에 자리한 감수성을 말해준다. 


풍경화. 

존 버거는 풍경화의 태생을 이해관계와 결부시킨다. 그저 풍경화로 보이는데, 사실은 땅 주인의 영지와 권력을 표상한다고 했다.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는, 눈에 보이지 않게 관리 감시되고 있는 경계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풍경은 풍경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풍경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그렇게 풍경(화)은 권력을 투사하고, 자본을 투사하고, 욕망을 투사한다. 그렇게 자연(풍경)의 의미가 퇴색된 상실의 시대에 자본주의적 풍경 혹은 욕망의 풍경, 그리고 제도적 풍경을 그리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고, 어쩌면 존 버거의 후예로 불러도 좋을 작가들이 있다. 


현대판 진경. 

한적하다 싶으면 송전탑이 가로 막고 서 있고, 숲속의 자투리땅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공원들이 조성돼 있다. 이제 군 초소는 전원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를 유도하기 위한 H자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험한 곳일수록 산세도 빼어나 그만큼 등산객도 더 많이 찾는다. 이처럼 사람이 찾는 산이 아닌, 적막강산을 생각하기도 어렵고 현실성도 없다. 등산객은 말하자면 현대판 산수풍경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풍경(인공풍경?) 대신 오히려 관광엽서와 휴양지 광고 전단지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등장하는 빙하와 화산, 물개와 펭귄이 더 친숙하고 살갑다. 이제 자연은 비의를 품지도 주술을 부리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흘러간 옛 노래로 되돌아와 향수를 달래주거나 하릴없는 풍문으로 떠돌 뿐. 이런 상실의 시대에 자연과 풍경, 풍수와 오행, 전원과 산수는, 더욱이 산수를 그리고 수묵을 그리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도시 회화, 어반아트 혹은 시티스케이프. 

도시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반영하는 경향성의 회화를 의미한다. 그 자체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리얼리티(현실주의)를 얻는다. 도시 회화에서 도시는 대개 회색 도시, 콘크리트 도시, 삭막한 도시, 무표정한 도시, 그리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필름 누아르에서처럼 냉정한 도시로 수식된다. 그 수식에 정서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여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렇게 도시는 상실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거처가 되었고, 타자들의 임시거소가 되었다.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상이며, 질병이 되었다. 도시는 그렇게 지정학적 장소를 넘어 현대인의 의식적인 장소가 되었다. 

주요 작가로는 패턴화된 연립주택의 구조에 주목한 정직성, 70, 80년대 건립된 아파트를 아카이브 형태로 재구성한 정재호, 도시 문명을 거대한 쓰레기 산수에 비유한 이문주, 도심 속 외곽과 변두리 풍경을 재현한 노충현, 각종 공사 현장을 뒤덮고 있는 타폴린 방수포를 소재로 한 금혜원, 재개발 현장을 그린 박용일의 <어수선한 풍경>, 테이프 회화의 박상희를 들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이콘으로 청계천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플라잉시티, 각종 재개발 아파트 프로젝트를 기획 전시한 윤현옥 역시 이 범주에 든다. 

△Top




유토피아. 

유토피아는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의 저작에서 유래했고, 이보다 더 전으로 치자면 플라톤이 이상 국가의 한 형태로 제시한 철인정치와 철인국가에 소급된다.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이상을 꿈꾼 것이란 점에서 사회학적 의미를 얻는다. 

한편으로 유토피아는 이런 현실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더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그러므로 다만 사람들의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 다시 그러므로 자유 정신과 사유하는 유목의 형태로만 비로소 그 의미를 얻는 장소를 뜻한다. 현실과 이상의 분리로 나타난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주지시키면서, 동시에 이상을 통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말해주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개념이다. 꿈꾸는 인간 그러므로 꿈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는 사람,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발터 벤야민)이 기거하는 개념적인 장소일 수 있다. 


헤테로토피아. 

초 장소, 부재 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치자면 유토피아와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유토피아가 실제로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장소를 의미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존재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에서 지워진 장소, 그러므로 잊힌 장소, 비 혹은 반사회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다르다. 미셸 푸코는 감옥과 정신병원, 군대와 기숙사와 같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장소 그러므로 반사회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권력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보는 것이지만, 푸코는 특이하게도 여기에 휴양지를 포함한다. 휴양지 역시 어쩌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게 만드는(일시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스스로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그러므로 비 혹은 반사회적 행위가 도모되는 장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도와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해도 여기서 휴양지는 대개 한적한 곳, 외진 곳, 그러므로 숨어 있기 좋은 곳, 다시 그러므로 비 혹은 반사회적 행위가 도모되기 쉬운 곳이다. 권력의 사각지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브리콜라주, 브리콜레르.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창작의 경향성으로, 서로 무관하거나 이질적인 단편들을 한자리에 그러모아 그럴듯한 제3의 무언가를 재구성해내는 경우를 말한다. 혼성풍경, 합성풍경으로 나타나며, 인터넷을 통한 서핑과 매핑, 편집과 재구성 혹은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탈맥락과 재맥락과 통한다. 모든 의미는 그 자체 공허한 추상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맥락 속에서만 의미는 비로소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맥락이 의미를 결정하고 생성시킨다. 다시 그러므로 모든 의미는 맥락 결정적이다. 그런 만큼 맥락이 바뀌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다르게는 관계의 재구성(관계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패러디, 그러므로 차용의 경우. 

패러디는 덧붙여진 것들, 첨언과 첨삭, 부언과 부연, 주석과 인용 등 의미와 의식의 보충물들을 매개로 세계를 부풀리고 변질시킨다. 엽기, 통속, 컬트, 인형, 더미(Dummy), 마네킹, 좀비 등 보충물들로부터 유래한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기존의 친근하고 동질적인 이미지에 편입시키고 그것들을 하나로 섞어 놓는다. 세분화하기보다는 짜 맞추고 접붙이는 패러디는 이처럼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미지의 지층들을 가로지르며, 의미들을 분절시키고, 세계를 변질시킨다. 


역할극 혹은 역할 놀이. 

역할극이란 참여자가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극의 한 형식을 말한다. 대개는 인터뷰의 형식을 빌려 상호적인 관점과 상호이해관계를 다루는 형식을 취한다.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 혹은 사회를 다룬 믹스라이스, 박경주, 임민욱, 베트남 이주여성과 인터뷰한 조혜정, 스스로 군사독재 시절 정치군인으로 분장한 조습의 작업을 아우른다. 그리고 스스로 여왕을 연기한 여성들과 인터뷰한 천 경우(사진 퍼포먼스), 패션모델로 분장한 모친을 소재로 한 파야의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개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수자와 같은 타자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천 논리가 강한 편이다. 

△Top




탈조각.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조각적인 것에 대한 저항>(2009.11) 전시를 계기로 공론화된 개념이다. 당시 기왕의 설치미술의 한 경우 내지는 조각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탈조각의 개념에 대한 이견들이 있었다. 그 범주로는 빛 조각(라이트아트), 공기 조각, 소리 조각(사운드스컵처), 부드러운 조각(소프트스컵처)을 아우르며, 주요 작가로는 쇳가루를 소재로 한 김종구,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함연주, 망 조각의 김세일, 중력 조각의 전강옥, 그림자 조각의 차상엽이 포함된다. 유사 개념으로 비물질 조각이 있다. 


미니어처 조각. 

주로 화학 합성품인 스컬피를 소재로 하지만, 씹다 만 껌이나 알약 같은 일용품을 소재로 취하기도 한다. 손가락 하나 크기의 조각이 많지만, 이쑤시개 반 토막만 한 조각도 있다. 주요 작가로는 현대인을 제도에 길든 애완동물에 비유한 함진, 현대인을 폐기물과 재활용품에 비유한 이동욱, 남근에 자족적인 인격을 부여한 권재홍을 비롯해 최수앙의 초기 작업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일종의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에서 유래한)으로 부를 만한 낯설고 이질적이고 냉소적인 비전이 특징이다. 


부드러운 조각. 

함연주, 김세일의 작업은 부드러운 조각으로 범주화할만한 경향성을 보여준다. 함연주는 머리카락을 거미줄처럼 짜낸 가녀린 구조물로써 공간을 구획한다. 머리카락으로 공간을 구성한 공간설치작업으로, 공간 속에 완결된 작품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제시되는 점이 특징이다. 우연성의 계기를 공간 속에 개입시켜 공간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드러내는 그 구조물은 마치 덧없는 이미지를 증명해 보이는 시간의 그물 같고, 미망의 그물 같다. 


그리고 김세일은 가녀린 철사를 소재로 뜨개질하듯 엮어나가는 방법으로 마치 비정형의 고치와도 같은,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놋쇠 숟가락이나 부처 소상 등의 사물의 한 표면을 기점으로 철사를 꼬아나가기 시작해서, 결국에는 그렇게 형성되고 부풀려진 망이 외부로부터 사물을 감싸 안는 역설적인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듯 부처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그대로 절이 되고, 물고기를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바다가 되고, 짐승을 싸안고 있는 망 구조는 숲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상은 임의적일 뿐, 실상 망 구조 자체는 무한정 부풀려질 수 있다. 마치 거품처럼 모든 결정적인 형상, 결정적인 읽기를 임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열린 체계를 예시해준다. 


사진 조각. 

권오상과 고명근의 작업은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이 사진으로까지 확장된 경우를 예시해준다. 권오상은 재현과 관련된 전통적인 문법에 독특한 방법으로 반응한다. 잘게 나눠진 사진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등신대 크기의 인체나 실물 크기의 사물을 재현한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리얼리티가 모여 전체를 이루는 사진을 실현한 것이다. 환조처럼 3차원적인 입체감과 질량을 갖고 일정한 공간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사진의 표면적인 세부(피부)마저 간직하고 있다. 이런 특질로 인해 그의 작업은 흔히 조각적 사진 또는 사진적 조각이란 말로서 형용 되는데, 이는 곧 조각과 사진의 범주와 방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그 경계를 허물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를 흉내 내는 유사 실제와 함께 그 조작적인 프로세스를 공공연하게 노출함으로써 오히려 특유의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사진 조각은 고명근의 작업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는다. 투명한 필름에 인화된 사진 조각들을 조합하여 가상의 건축물이나 구조물을 구축한 일종의 미니어처로서, 실재를 재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작가의 공상 속에서 편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와 가상이 교묘하게 결합해 그 자체 또 다른 현실처럼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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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과 원형. 

전형이 공공연한 합의에 이른 사회적 기호를 의미한다면, 원형은 그 층위가 전형보다 깊다. 전형이 충분히 사회화된 기호 그러므로 사회적 기호를 의미한다면, 원형은 존재론적 기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원형은 잠재적인 기호들의 집(아니면 저장고)이며, 전형은 원형에서 길어 올려진 기호, 그러므로 잠재적인 기호 중 마침내 자기표현을 얻은 기호라고 해도 좋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 속 기호를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구분했다. 공적 기호를 의미하는 스투디움이 전형에 해당한다면, 화살처럼 날아와 상처를 입히는 기호, 코드가 부재해 읽을 수 없는 기호, 사사로운 기호, 트라우마를 의미하는 푼크툼이 원형에 해당한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놀이와 유희.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놀이와 유희가 그 계기일 수 있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의 본성을 이성(형식 충동)과 감성(감성 충동)으로 구분하고, 그 두 본성을 화해시켜 조화롭게 하고 통합으로 이끄는 계기를 유희충동으로 봤는데, 이때의 유희충동이 다름 아닌 미이며 예술이다. 형식 충동과 함께 유희충동을 예술의 원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호이징하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존재론적 성질을 놀이에서 찾았다. 인간을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하면서, 이런 놀이로부터 비로소 예술이, 문화가 가능해질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판타지 메이커스, 환상 제작자. 

문자 이전 구술시대에는 이야기 전수자가 환상 제작자 역할을 했다. 대개는 무당을 겸하기도 하는 그는 단순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할 뿐만 아니라 때로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해서 해석의 역사가 이미 그들로부터 비롯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중세시대에는 마녀, 세계의 형질을 변질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미혹하는) 연금술사, 별자리를 보고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가, 그리고 환상을 조작하는 마술사가 그 역할을 도맡는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예술가와 초현실주의, 그리고 남미의 매직리얼리즘이 이런 환상 제작자로서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인터넷 이후로 치자면, 구글맵을 참조해 하나의 완벽한 허구적 세계를 창조해내는 신종 소설 장르가 생겨나기도 했다. 여하튼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므로 현실(성)을 담보할 수 있고, 그럼에도 실제로는 전혀 가보지 못한 곳(경험하지 않은 일)을 재구성한 것이므로 그 자체 허구이기도 한,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또 다른 현실을 열어놓는 것이 그렇다. 


네트워크. 

장르와 장르, 형식과 형식, 개념과 개념, 분야와 분야를 네트워크 시켜 의외의 의미를 열어놓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제안하고, 억압된 의미를 폭로하는. 의미는 배열과 배치에 연동된다. 그 자체 결정적인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열과 더불어서 그리고 배치 여하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고 결정된다. 그러므로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고, 의미를 열고 확장하는 기술이다. 


역사. 

역사는 해석이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 곧 현재의 역사라고 했다.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모든 과거는 현재라고 고쳐 부를 수도 있겠다. 과거에 의미 부여하는 것, 그러므로 과거를 현재 속에 살게 하는 것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해석은 헛소리다(파스칼 키냐르). 여기에 예술비평에 관한 한 오독은 없다는 말도 있다(움베르토 에코). 저마다 문맥은 다르지만 이렇게 열거해놓고 보니 이것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지점이 보인다. 바로 원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의의를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이 전언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경우가 파스칼 키냐르다. 모든 해석은 헛소리다(문학이다?). 주관적인 첨언이고 부언이고 주석이다. 그렇게 역사는 해석을 매개로, 해석을 넘어 문학이 된다. 역사적 사실 자체는 그때 일어난 일이지만, 역사를 현재 속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지금이다. 그때 실제로 일어난 일과 지금 역사를 보는 눈이 상호 간섭하면서(가다머의 지평융합) 역사는 비로소 현재를 만드는 또 다른 현실로서 현재 속에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 텍스트와 작가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독자적 텍스트와 작가적 텍스트로 구분한다. 그저 수동적 읽기를 수행할 뿐인 텍스트가 독자적 텍스트라고 한다면, 읽으면서 동시에 쓰게 만드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작가를 요구해오는, 능동적 읽기를 요구해오는 텍스트 그러므로 열린 텍스트를 작가적 텍스트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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