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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숙, 색감으로 질감으로 시간을 조형한 그림

고충환




이기숙, 색감으로 질감으로 시간을 조형한 그림 


고충환 | 미술평론가


가로지르는 길이 있는 들판 같은. 선혈처럼 붉은 속살을 드러낸 땅 같은. 야트막한 능선 같은. 첩첩한 산 같은. 첩첩한 밭 같은.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기워놓은 논밭 같은. 밭고랑 같은. 밭과 산과 하늘이 연이어진 풍경 같은. 그 풍경 위로 때로 민들레 홀씨가 날아다니는. 그리고 더러 꽃비가 내리는. 무채색 위로 청색과 적색 때로 녹색이 대비되는 색면추상 같은. 기와 표면의 빗살 같은. 사기 혹은 항아리의 질박한 표면 질감을 닮은. 

원색마저 채도를 조절한 숙성된 색감이, 그리고 거칠거칠하고 순한 질감이 돋보이는 작가 이기숙의 그림은 서정적인 추상 풍경 같다. 현실적인 풍경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풍경 같고 내면 풍경 같다. 상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 혹은 도시인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만한, 기억으로나마 어렴풋하게 간직하고 있을, 고향 같은 풍경이고 원형적인 풍경이다. 상실한 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상실감을 파고들면서 가만히 흔들어놓는, 위안이 되는, 정겹고 살가운 풍경이다. 작가는 그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도 알고 있는 친근한 풍경이다. 현실 속 풍경이라기보다는 기억으로 소환한 풍경이며 잊힌 풍경이다. 아득하고 아련해서 그리움을 자아내는 풍경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추상같기도 하고 풍경 같기도 한, 이 이중적인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먼저 캔버스에 한지를 여러 겹 중첩해 바른다. 작가의 그림에 보면 저부조 형식의 얕은 골이 감지되는데, 그 골이며 질감을 위한 살을 올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흙물을 바른다. 원색마저도 마치 한차례 걸러낸 것 같은 침잠된 색감이, 흙물과 물감이 결합해 만든, 그렇게 채도가 조절된 색감이 바로 이러한 흙물에 연유한 것이다. 

그렇게 흙물을 발라 젖은 상태의 두툼한 한지 위에 드로잉을 하는데, 끝이 뾰족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도구를 이용해 드로잉을 한다. 대개는 선을 긋기도 하고 더러 점을 찍는 점묘의 형태로 나타난, 드로잉의 과정에서 젖은 한지가 옆으로 밀리면서 골을 만든다. 그리고 한지가 마른 후에 결이 고운 사포로 표면을 갈아내면 질박하면서 순한 표면 질감을 얻을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선묘 풍경이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바탕을 만드는 작업에서 이미 선묘 풍경을 위한 결정적인 꼴이 완성된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올리고 그림을 덧그리는 반복 과정을 통해서 원하는 색감과 질감과 분위기를 얻는다. 

기억이 소환한 풍경이며 원형적인 풍경이라고 했다. 아득하고 아련해서 그리움을 자아내는 풍경이라고도 했다. 여기에 색감과 질감이 어우러져 고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이 그림을, 더 먼 풍경의 시간, 이라고 불렀다. 더 먼 풍경의 시간은 어떤 풍경이고 어떤 시간일까. 그 풍경은 그 시간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작가는 자연을 질료로 자기만의 풍경을 재구성할 수 있고,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시간을 조형 그러므로 조작하고 편집할 수 있다. 아마도 그렇게 재구성된 풍경이며, 조형된 시간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원래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아우라라고 불렀다. 우리 말로 옮기면 분위기가 된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기억 속 풍경 그러므로 멀리 있는 풍경을 현재 위로 소환한 그림이고, 그렇게 소환된 그림이 아득하고 아련한 그리움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이다. 

융은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미학 그러므로 예술과 관련해서는 원형적 미의식이라고 해도 좋고, 존재론과 관련해서는 존재의 원형 혹은 원형적 존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중 원형적 미의식에 대해서는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 혹은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적 DNA의 이름으로 그동안 누차 거론된 바 있고, 작가의 그림은 그 논의와 관련이 깊다. 여기서 원형은 전형과는 다르다. 전형이 공공연하게 사회적 합의에 이른 기호 그러므로 공적 기호에 해당한다면, 원형은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기호, 기호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기호, 잠재적인 기호들의 거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에서 길어 올려진 기호가 전형일 수 있고, 그런 만큼 원형의 층위는 전형의 그것보다 깊다. 

그 실제를 보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선묘 풍경이라고 했는데, 전통적으로 선을 새겨 그리는 암각화와 관련이 깊고, 새긴 선에 색을 채워 넣는 상감기법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그림에서 감지되는 거칠거칠하고 순한, 질박하고 유기적인 질감 그러므로 분위기가 분청사기의 그것과도 통한다. 사태를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대개 청자는 귀족의, 백자는 선비의, 그리고 분청사기는 서민의 생활감정이며 정서를 반영한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질감 그러므로 분위기는 귀얄문과 빗살문으로 지지 되는 분청사기의 표면 질감을 닮았다. 

작가 스스로 분청사기의 회백색의 색감과 절제되면서도 감각적인 선각에 매료되었다고도 했지만, 작가가 체질적으로 물려받은 원형적 DNA라고 해도 좋고, 그 원형적인 미의식이 각색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쳐 자기화한 경우라고 해도 좋다. 그 자체 능동적으로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이미 주어진 원형적 미의식을 의식적으로 발굴하고 자기화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수동적인 수행성이 매개 작용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한국적인, 전통적인, 그리고 서정적인 정서를 건드리는, 원초적인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유년의 풍경을 불러온 것이면서, 유년의 기억을 넘어 원형적인 풍경을 되 불러온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의 현재가 안온하게 기숙할 수 있는 이상적인 풍경을 재구성한 것이다. 비록 작가 개인의 이상적인 풍경을 그린 것이지만, 유사한 유년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원형적 풍경을 색감으로 그리고 질감으로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그 원형적인 풍경이 현재하고 있었던, 지금은 작가의 그림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더 먼, 시간 속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시공간을 열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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