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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쉬예/ 수면에 이는 파문, 흐르는 비

고충환



왕쉬예/ 수면에 이는 파문, 흐르는 비 


고충환 | 미술평론가


반투명한 간유리나 플랙시글라스를 통해 본 것 같은. 파문과 같은 문양과 패턴이 돋을새김 된 유리창을 통해 본 것 같은. 비가 주름 혹은 주렴을 만들며 흘러내리는 차창을 통해 본 것 같은. 한 꺼풀막이 덧씌워진 것 같은. 정경이 안개에 휩싸인 것 같은. 모든 것이 흘러내리고 녹아내리는 것 같은. 

이 희뿌연 그림은 도대체 무엇인가. 풍경인가. 아니면 추상인가. 경복궁의 전면, 압구정의 여러 모습, 조선의 민화 속 풍경, 그리고 전시가 열리는 학고재의 전면과 같은 실재하는 대상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추상은 아니다. 가만히 보면 건물의 실루엣이나 거리의 정경과 같은, 알만한 사물 대상이 보이는 것도 같다. 화면 속에서 발원한 은근한 빛이 화면 위로 사물의 실루엣을, 그리고 다채로운 색깔을 밀어 올리는 것도 같다. 화면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도 같다. 관념적인 혹은 감각적인 프리즘을 통해 본 세상을 그린 것도 같다. 모르긴 해도, 동물이나 곤충의 눈을 통해 보면 세상이 저렇게 보일 것도 같다. 

회화는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재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재현을 매개로 실재를 암시하는 것이 회화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암시적이다. 형상과 추상, 감각적 실재와 관념적 실재, 그러므로 인식론적 실재 사이의 풍경을 보는 것도 같고, 경계의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이런 사이의 풍경, 경계의 풍경을 작가는 인식의 저편이라고 부른다. 인식(그러므로 시각)을 문제시하는 것이고, 인식의 저편, 그러므로 인식론적 시각 이전의 사물 자체를 직접 지각하고 싶다. 인식에 선행하는 존재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본질적인 시각, 그러므로 어쩌면 신성한 시각을 회복하고 싶다. 이처럼 인식에 선행하는 존재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작가는 시공나체, 그러므로 시공간의 나체와 직접 마주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공간의 나체, 그러므로 세계 자체와 어떻게, 직접, 마주할 수 있는가. 

모든 시각은 인식을 통해 본 시각이며, 그러므로 인식론적 시각이다. 시각은 인식으로 오염돼 있다. 인식의 매개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세상을 보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읽는 것이지, 세계 자체를 볼 수가 없다. 세계 자체, 그러므로 시공간의 나체와 직접 마주할 수가 없다. 여기서 현상학적 에포케, 그러므로 일시적인 판단중지가 요청된다. 나를 인식 이전의 상태, 그러므로 의식의 영도지점에 내려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발가벗은 내가 발가벗은 세상과 만나야 한다. 그렇게 세상과 만나야 떨림이 있고 설렘도 있다. 설레고 떨리는 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단독자, 그러므로 인식 이전의 내가 인식 이전의 세상과 직접 만나는 가능성에 대해 하이데거는 회의적이다. 세상은 언제나 이미 어떤 인식론적 틀로 구조화된 것이고, 우리 모두 그 인식론적 틀 속으로 던져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던져진 존재를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라고 부른다. 여기에 후기구조주의는 주체를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부른다. 나는 타자다. 여하한 경우에도 나는 타자들에게서 건너온 인식론적 틀을 벗어날 수가 없고, 타자 없이 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타자들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나와 타자,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그렇다면 나는 타자를, 세계를 어떻게 맞아들일 것인가. 

그림 위로 흐르는 것이 파문이라고 했다. 물결이다. 물속에서는 모든 것이 경계와 차이를 잃고,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가 된다. 그리고 수면에 이는 파문이 사물의 형태를 왜곡시킨다. 왜곡시킨다기보다는 그때그때 감각의, 관계의 상황 논리에 따라서 매번 다른 모습을 내보인다. 그렇게 감각을 인식 이전의 상태로 두면, 비결정적인 상태로 열어 놓으면, 다른 관계를 받아들이면 사물은, 세계는 비로소, 매번 다른 얼굴을 내어준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각을 감각 자체로 열어 놓는다는 점에서, 그 과정에서 수면에 일렁이는, 흐르는, 매번 다른 물결을 매개로 한 것이란 점에서 인상주의를 연상시킨다. 인상주의의 추상화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인식 그러므로 앎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현대인이 상실한 감각 자체, 지각 자체, 시각 자체를 복원하는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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