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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다연/ 이상과 현실, 그 사이 어디쯤엔가에 있을

고충환



황다연/ 이상과 현실, 그 사이 어디쯤엔가에 있을 


고충환 | 미술평론가


청명한 하늘이 보이는, 하늘 위로 새털구름이 점점이 떠가는, 때로 저 홀로 지나가는 비행기가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속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 떠가는 요트가 풍경을 적요하게 만드는, 아마도 열대우림에서 왔을 잎이 큰 식물과 선인장과 야자수가 원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이 부신 백사장 위로 열대식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바람이 느껴지는, 개 한 마리가 등을 보인 채 앉아 바다를 쳐다보는, 아니면 산책이라도 하듯 모래 위에 어슬렁거리는, 하얗고 빨간 파라솔과 의자가 있는, 그 옆으로 그네가 보이고 전망대가 보이는, 가로등이 서 있는, 아마도 밤을 위한 것인 듯 등이 보이는, 손질된 잔디와 풀밭이 그리고 정원이 있는, 사색에 잠긴, 때로 머리가 없음에도 사색을 암시하는 고대 석상이 서 있는, 해변에 면해 있어서 수영하면서 해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풀장이 보이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트레이드마크인 잔물결이 이는 수면 위로 풍선이 떠 있는, 비록 그림 속 사람은 없지만 물 위에 떠 있는 풍선이 사람을 암시하는, 인디아 핑크빛으로 채색된 벽면 위에 드리워진 잎이 큰 식물의 그림자가 햇빛과의 대비를 두드러져 보이게 만드는, 그 뒤로 빌라 혹은 펜션의 창문이 보이고 모퉁이가 보이는, 이곳은 어디인가. 


작가는 이곳을 파라다이스라고 부르고, 일루전이라고 부르고, 꿈이라고 부르고, 휴가라고 부르고, 휴일이라고 부르고, 어딘가, 라고 불렀다. 작가가 그린 것(곳)은 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눈에도 알만한 현실적 모티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비현실을 그린 것이었다. 꿈을 그리고, 이상을 그리고, 환상을 그린 것이었다. 비루한 현실에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그린 것이었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저기 그곳을 그린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라고 했다. 아마도 그 뒤에 좋을 것, 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을 터인데, 과연 지금 여기와는 다른, 보들레르가 꿈꾼, 저기 그곳(그러므로 저기 그런 곳)이 있을까도 싶다. 

그러므로 여기가 아닌, 저기 그곳은 아마도 머릿속에나 있는 곳일 터이다. 머릿속에 있는 곳? 여기서 파라다이스가 호출된다. 주지하다시피 파라다이스는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의식으로만 있는 장소, 실제로는 없는 장소, 비장소, 초장소를 의미한다. 원래 파라다이스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철인국가) 이래로 보다 나은 세상의 도래를 꿈꾼 이상주의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 꿈이 물거품으로 확인되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잔재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파라다이스는 디스토피아를 그림자 속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파라다이스와 디스토피아, 그러므로 이상과 (비루한) 현실 사이에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파라다이스와는 반대로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장소이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아니면 애써 지우고 싶은 장소라고 했다.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이는, 그렇게 임계점을 넘보는 장소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군대, 학교, 기숙사, 감옥, 정신병원을 그 예로 들고 있고, 의외로 작가도 그림 속에 그려놓고 있는 휴양지도 여기에 포함한다. 아마도 휴양지가 비루한 현실, 억압적인 현실로부터 탈주해온 것(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런 만큼 휴양지에서의 휴양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그리고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불안과 안도 하에서의 휴양인 것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그림 속 현실의 지정학적 장소가 마련된 셈이다. 아니면 정초 되었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말하자면 현실과 이상 사이를 그려놓고 있었고, 디스토피아와 파라다이스 사이를 그려놓고 있었다. 휴양지를 그려놓고 있었고, 헤테로토피아를 그려놓고 있었다. 휴양지지만,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그리고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불안과 안도가 복선으로 깔린 휴양지, 그러므로 잠정적인 휴양지, 다시, 그러므로 여하튼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만큼은 파라다이스를 그려놓고 있었다. 
다시, 파라다이스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파라다이스는 이상을 그린 것이다. 이상은 여하튼 비루한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그리고 탈주를 감행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므로, 말하자면 현실을 유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므로 현실을 미화하고, 각색하고, 극화하고, 연출한다. 미화되고, 각색되고, 극화되고, 연출된 현실을 매개로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유혹하는 것이다. 실제 휴양지에서의 휴양보다는 TV를 통해 본, 자연 다큐멘터리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통해 본, 여행 광고 엽서와 책자를 통해 본 선전 문구와 이미지가 더 유혹적인 것은 그래서이다. 그리고 그 유혹은 이미지의 시대에, 저마다 손안에 스마트폰, 그러므로 세계를 휴대하는 시대에 공공연한 현실이 되고 있고, 그 자체 시대를 반영하고 읽는 문화적 풍속도 혹은 코드가 되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적어도 은연중, 이런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비판하는(?) 그림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을 유혹하는 그림, 현실을 미화하고, 각색하고, 극화하고, 연출한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휴양과 관련한 꿈의 모티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그림, 꿈꾸는 오브제들을 그려놓은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림 속에서 사물들은 얼핏 일상적이고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작 서로 낯선 것, 이질적인 것, 동떨어진 것, 무관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어떻게 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수술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이라는 로트레아몽의 시에서 착상된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가 소환된다. 서로 상관없는 사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외의 의미, 제3의 의미, 말하자면 초현실적 현실을 파생한다는 논리다. 작가의 그림으로 치자면, 휴양지에 뜬금없이 고대 석상들이 호출된 것이 그렇고, 마치 대화 혹은 회합이라도 하듯 석상들이 마주한 것이 그렇고, 사색에 잠긴 석상들이 그렇고, 심지어 머리도 없는 석상이 사색을 상기하는 것이 그렇고,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백사장을 거니는 석상이 그렇다. 요트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하는 석상이 그렇고, 작은 섬이 그렇다. 선인장 숲에 출현한, 선인장보다 작은 기린이 그렇고, 물에서 자라는 선인장이 그렇다. 일상에서는 서로 낯설어하는 사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그림, 그러므로 편집된 현실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일상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꿈의 현실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사물의 전치는 후기구조주의의 탈맥락과 재맥락의 논리와도 통한다. 의미 자체만으로는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의미는 텅 비어있다. 그렇다면 의미는 언제 어떻게 결정되는가. 맥락이 의미를 낳고,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 의미가 의미로 되는 것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이며, 그러므로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원래 일상이라는 맥락에 속해져 있던 사물들을 꿈이라는, 이상이라는, 휴양이라는 다른 맥락 속에 옮겨 놓으면, 그러므로 사물들의 지정학적 위치를 옮겨 놓으면(전위하면) 사물들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전치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맥락을 설계하고 의미를 재편하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리콜레르, 그리고 브리콜라주와 관련된다. 서로 무관계한 것들을 그러모아 제3의 그럴듯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방법(브리콜레르), 그리고 그 결과물(브리콜라주)과 관련이 깊다. 그 창작 방법과 논리는 정보사회의 바다를 서핑하면서 저마다 필요한 이미지를 캡쳐하고, 그 소스를 이용해 자기만의 세계지도를 맵핑하는(재구성하는), 인터넷과 디지털 시대 이후 공공연한 현실이 되고 있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인터넷을 포함한 일상 속 이미지들을 불러 모아 꿈의 이미지, 환상적인 이미지, 이상적인 이미지로 재편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비루한 일상으로부터 일탈하고 싶고 탈주하고 싶은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그려놓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이미지, 사람들이 꿈꾸는 이미지로 현실을 재구성(그러므로 어쩌면 재부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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