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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고충환




허수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허수빈이 쇼호스트로 출연했다. 소개하는 상품들을 보면, 대개 빛을 매질(매개)로 한 상품들이 많다. 그동안의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지만, 평소 빛에 관심이 많고, 관련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도 있어서 신뢰가 가는 편이다. 어디서 어떻게 구매할 수 있는지, 판매 가격은 얼마인지, 상품의 재원은 어떻게 되는지,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지, 상품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바닥에 크리스털 표면 문양의 패턴이 빛살처럼 펼쳐지는 크리스털 투명램프는 바자샵을 통해 33,800원에 구매할 수 있고, 중국산이다. 가시광선, 크리스털, 프리즘, 그리고 무지개와 같은 관심 키워드와 함께, 크리스털 프리즘처럼 면을 잘 깎아 상품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원하는 대로 조명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는 원격 소형전등은 보그래이를 통해 118,890원에 구매할 수 있고, 중국산이다. 원격제어 응용조명이라는 관심 키워드와 함께, 내가 원하는 대로 조명을 조절할 수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누르면 색상이 변하는 LED 모자는 글로벌마켙을 통해 32,100원에 구매 가능하고, 배송비용 8,000원을 별도 부담해야 하며, 중국산이다. 유리섬유, 웨어러블과 같은 관심 키워드와 함께, 이렇게 누르면 색상이 변한다고, 제품을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는 화산지대에서 명상하는 것 같은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볼케이노 불멍 가습기를 비롯해, 3D 크리스털 볼, 마그네틱 공중부양 조명, 오로라 무드 등, 선쌰인 페인팅 라이트, 모래시계 무드 등과 같은 조명등과 개구리 해부모형 1개 등, 사실은 자신이 일일이 발품을 팔아 해외직구를 통해 구매한 인터넷 구매상품 11개에 대한 리뷰영상을 올렸다. 아마도 처음부터 리뷰영상을 계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 빛을 매질로 작업을 하다 보니, 그렇게 빛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둘 구매하게 된 것이 쌓였을 것이고, 이후 리뷰영상에 대한 구상이 뒤따랐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물품 리뷰영상을 매개로 작가로부터 쇼호스트로 변신한다. 작가는 누구인가. 작가인가, 쇼호스트인가. 작품을 파는 사람인가, 아니면 상품을 파는 사람인가. 작가에게 구매할 때 사람들이 사는 것은 작품인가, 아니면 상품인가. 작품은 작품인가, 아니면 상품인가. 아니면, 작품이면서 동시에 상품이기도 한 것인가. 여기서 작가는 창작 주체(작품이란 무엇인가), 비평 주체(작품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시장 주체(작품의 재화적 가치는 무엇이고, 그 재화적 가치는 어떤 경로로 어떻게 매겨지는가) 간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미술계 그러므로 미술 제도의 문제를 건드린다. 작가 혼자서는 생존하기 힘든,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에 작가도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는 네트워크(질 들뢰즈라면 기계라고 했을)의 작동방식을 묻는, 일종의 개념미술 혹은 행동주의 미술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이든 상품이든 사람들이 살 때, 그것은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의 가치(미술사적 가치 혹은 재화적 가치) 그러므로 아우라를 살 것이다. 작품의 가치는 단순한 금전적 가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 재화적 가치의 입장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작품 자체의 가치는 무엇이고, 얼마가 적정가격일까. 그렇게 작가는 작품 자체의 가치, 작품 제작에 실제로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묻는다. 작품 자체의 가치를 단순한 노동의 가치, 그러므로 단순한 양적 가치로만 환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질적 가치는 어떻게 매겨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작가는 하루치 노동을 투여해 오만원권 한 장을 직접 그리고 만들었다. 신사임당이 보이는 면 크기 그대로 그리고 만들었다. 그리고 일당 오만 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하루치 노동을 투여해 오만원권 넉 장을 직접 그리고 만들었다. 그리고 일당 이십만 원이라고 불렀다. 납을 녹여 돋보기와 전문연장까지 동원해 마치 금세공이라도 하듯 조각하는 방식으로 하루치 노동을 투여해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직접 만들고, 일당 100원이라고도 불렀다. 하루치 노동은 표준 노동시간으로 지정된 8시간을 적용했다. 똑같이 8시간 걸려 그린 오만원권 넉 장이 오만원권 한 장보다 조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일당은 4배다. 정작 그림은 더 조악한데, 그 가치는 더 높다. 일당 100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제 투여된 노동은 같은데 그 가치가 다르다. 

무슨 의미일까. 이 작업은 왜 했을까. 혹 이 작업에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넌센스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고지식한 환원주의라고 해도 될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그 이면에 비판이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하고, 다름 아닌 그 비판이 향하는 곳(것)이 작업이라고 해야 한다. 돈 잔치에 대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라는 신화(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 그러므로 인간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와 관련해 미술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작가와 자본과의 관계에 대해, 작품이 상품처럼, 그러므로 하나의 상품으로서 작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유통구조에 대해 논평하고 풍자하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했다. 창조적인 일에 복무하는 예술을 이처럼 도구화된 노동, 소외된 노동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예술가가 정초 된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창조적인 일이란 어떤 일이며, 또한 그 가치는 어떻게 매겨질 수 있는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가 경제 제일주의를 지향하며, 따라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을 잉여라는 이름을 붙여 추방한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예술을 잉여로 지목했다. 바로 여기서 예술은 반자본주의적인, 반제도적인, 그리고 어쩌면 반사회적인, 그리고 여기에 반인간적이기조차 한(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실천 논리와 당위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 실천 논리를 무정형에서 찾는다. 정형을 요구해오는 제도의 관성에 대해 무정형을 들이대는 것이 예술이다. 그리고 여기에 정체성을 요구해오는 제도의 관성에 대해 차이를 들이미는 질 들뢰즈의 예술이 같은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잉여에 해당하는, 무정형을 연상시키는, 차이의 실천 논리를 떠올리게 하는 작업이 있다. 제주도에 가면 화산석이 있는데, 현무암이다. 현지 사람들은 현무암을 가공해 벽돌 대용으로도 쓰는 모양이다. 그렇게 벽돌 모양의 돌덩어리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 작가는 땜질이라도 하듯 그 크고 작은 구멍을 순금으로 메웠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여하튼 금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작가는 중얼거렸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분명한 것은 작가가 단순한 금전적 가치를 보고 만든 작업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용한 것도, 무익한 것도 때론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의미, 그러므로 역설적인 의미일까. 아마도 일의 종류를 무용한 일과 유용한 일로 나누는, 가치의 부류를 무익한 가치(?)와 유익한 가치로 나누는 이중성과 양비론 바깥에 의미를 세워 재정의하는(그러므로 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에 의미를 세우는) 일이 다름 아닌 예술이 할 일이라고, 그러므로 예술의 존재 이유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작가는 빛에 관심이 많다. 먼저 형광물질을 혼합해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린 연후에, 이미지 글라스 필름을 장착한 자외선 로고 라이트를 비추면 예상치 못한 색의 변화와 함께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마치 캔버스의 이면에서 표면으로 밀어 올린 것 같은, 캔버스 자체에서 발광하면서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부드럽고 은근한 빛의 질감이 후기 단색(화)의, 그리고 특히 제임스 터렐의 내면적이고 명상적인 빛의 질감을 닮았다. 그리고 같은 원리와 재료를 적용해 그린 또 다른 그림에서는 그림 속에 숨어 있던, 셔터의 구멍 패턴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이 그림을 눈높이보다 위에 걸어 그림을 올려다보게 했는데, 굳게 닫힌 셔터 안에서 일하고 있을 밤을 잊은 누군가를 상기시킨다. 

그렇게 빛을 매질로 한 작가의 작업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서사적이고, 문학적이다. 작가의 것일 수도, 작가가 투사한 타자의 것일 수도, 그리고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는 빛, 그러므로 저마다 내면적인 빛의 질감으로 감성과 사연을 파고드는 작업이 빛을 그저 (비)물질로만 그리고 현상으로만 보는 다른 경우들과는 구별된다. 

그렇게 상품의 얼굴을 한 작품을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이 작가와 제도, 작가와 자본이 얽힌 관계에 주목하게 하는 한편, 이를 통해 노동(그러므로 어쩌면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문처럼 읽힌다. 그리고 빛을 매질로 한 평면 작업에서는 겉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잘 보면,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면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과의 관계(어쩌면 그 자체 근작에서의 주제일 수도 있는)가 상품과 자본을 매개로 한 작업으로, 그리고 빛을 매질로 한 작업으로 똑같이 적용되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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