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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훈/ 유한한 존재의 비애, 별처럼 아롱거리는

고충환



임도훈/ 유한한 존재의 비애, 별처럼 아롱거리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임도훈은 스테인리스스틸 재질의 초소형 베어링 구슬 하나하나를 용접해 고정하는 방법으로 형태를 만들었다. 틈이 없이 촘촘하게 용접한 경우가 많지만, 더러 그물을 연상시키는, 상대적으로 헐거운 구조도 보인다. 고릴라, 사슴, 사자, 순록, 그리고 말과 같은 알만한 동물 형상이 보이고, 화초 같은 식물 형상이 보이고, 이런저런 사람 형상도 보인다. 사람 형상 중엔 부처(반가사유상)와 성모 마리아상도 있다. 성모 마리아는 가슴에 거울을 장착하고 있는데, 아마도 너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형상들이 하나같이 역동적이고,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노동집약적인, 그림으로 치자면 집요한 그리기 혹은 편집증적 그리기를 연상시키는, 그러면서도 감각을 잃지 않는 작업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속이 텅 비었으므로 텅 빈 조각, 매스를 결여한 조각으로 탈 혹은 비 조각을 실현하고 있는 점도, 그러므로 전통적인 조각의 문법을 확장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그런데, 그 형상이 좀 특이하다. 미처 만들다 만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완성된 형상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도 같다. 구축되는 것도 같고, 해체 중인 것도 같다. 왜 이런 이중적인 형상을 만들었을까. 이 이중적인 형상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내포돼 있는가. 일부러 완성을 유보하는 형상을 통해 사람들 저마다 머릿속에서 그 빈 부분을 채워 완성하도록 유도한, 관객참여형 작업인가. 아니면, 모든 형상은 결국 허물어지고, 해체되고, 부식되고, 사라진다는, 덧없는 형상 그러므로 덧없는 존재를 주지하는 작업인가. 아마도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아르카디아 인 에고 그러므로 심지어 낙원에서마저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전언을, 바니타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일수록 덧없다는 전언을, 화무십일홍 그러므로 십 일 동안 빨간 꽃은 없다는 전언을, 색즉시공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고 허고 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러니 색(욕망)에 사로잡힐 일이 아니라는 전언을, 아름답지만 유한한, 강력하지만 무상한 존재를 주지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죽음을 주지시키면서, 사실은 삶을 주지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죽음은 곧 삶이기도 할 것이므로. 그렇게 작가는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 담론을 건드린다. 적어도 외관상 거대 담론이 죽고 미시 서사가 팽배한 시대에 삶과 죽음의 문제를 거론한 것이어서 새삼스럽고, 그래서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작가는 초소형 베어링 구슬을 집적시켜 형상을 만들었다. 하나의 점처럼 작은 구슬이 모여 형상을 빗어내는 것인데, 작가 고유의 조형 문법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그 발상은 어디서 유래했고, 또한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조형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비롯했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크고 작은 면들이 모여 형상을 일군다. 그러므로 점은 조형을 위한 최소 단위원소, 원자, 모나드라고 해도 좋다. 점이 모여 형상을 세우고, 점이 흩어지면서 형상을 허문다. 그림으로 치자면 우연하고 무분별한 터치가 모여 형상을 일구고(인상주의), 터치가 흩어지면서 형상이 해체된다(해체주의와 추상). 인쇄매체의 경우 망점이 그렇고, 전자매체의 경우 픽셀이 그렇다. 

이처럼 조형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비롯했다. 형식적으로 볼 때 그렇고,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존재는, 세상은, 우주는 하나의 점 그러므로 입자(일자)로부터 유래했다. 입자와 입자의 상호작용(운동성)으로 인해 존재가 생성하고 소멸하고 순환한다. 그러므로 점처럼 작은 구슬을 집적시켜 형상을 빗는 작가의 조각은 이런 이미지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그리고 존재의 생성원리에 대한 동시대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작가의 조각은 이중적이라고 했다. 구축되는 것도 같고 해체 중인 것도 같은 형상이 그렇고,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삶을 주지시키는 것이 그렇다. 특히 상여를 소재로 한 작업이 그런데, 상여의 표면적인 의미는 죽음을 겨냥한 것이지만, 그 내포적인(그러므로 진정한) 의미는 정작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축제라고 보는 것이 그렇다(실제로도 작가는 상여를 소재로 한 작업을 별을 위한 축제라고 부른다). 

여기에 작가의 조각은 역설적이다. 이런 역설적인 조각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사물들, 이를테면 포크레인, 트럭, 경운기, 탱크, 헬리콥터, 수류탄, 군함, 권총, 소총, 그리고 기계를 소재로 한 작업이 그렇다. 크기도 그렇고 소재도 그렇거니와 영락없는 닮은꼴에도 불구하고 실물보다는 유년 시절 레고(놀이)를 연상시키고, 장난감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일련의 조형들을 생일선물이라고 부른다. 생일선물답게 권총 같은 그리고 탱크 같은 무기들이 리본으로 장식돼 있다. 여기에 수류탄을 꽃다발이라고 부르고, 엔진을 연상시키는 기계를 별의 심장이라고 부른다. 할 수만 있다면 무기 대신 꽃을, 기계 대신 별을 제안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소재로 한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장난감(생일선물)을 매개로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오는 한편, 무기(폭력)와 꽃(평화)을 대비시켜 문명사적인 현실에 대해 논평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작가는 엔진을 연상시키는 기계를 별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비유적 표현이겠지만, 기계를 별에 빗댄 것이란 점에서 기계적이고 낭만적인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별의 운행원리를 보면 기계를 떠올릴 법도 할 것이다(우주는 거대한 기계다). 실제로 초현실주의에서는 무기질은 물론이거니와 유기체마저 기계로 보는 기계주의적 세계관이 보편적 현실이었다. 작가의 경우에 그 현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를 밤하늘에 빛나는 별자리로 승화시키는(사람은 죽어서 별이 된다) 프로젝트, 그리고 폭력적인 현실이 앗아간 꿈을 회복하는 프로젝트와 관련된다. 

작가가 조각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재질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조형물을 위해 최적화된 재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욱이 점처럼 작은 구슬을 촘촘하게 엮어 형상을 빗는 작가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밤하늘에 빛나는, 꿈처럼 아롱거리는 별자리를 보는 것도 같다. 이런 성질에 착안해 작가는 별에 빗댄 일련의 조형들을 시도하는데, 별 줍는 할아버지, 별 쏘는 사람, 별을 위한 축제(상여), 별의 심장(엔진을 연상시키는 기계), 별의 탄생(사랑)을 테마로 한 작업이 그렇다. 

이 가운데 설치작업 형태의 별 줍는 할아버지에서 작가는 손수레를 끄는 할아버지 형상을 조형했는데, 손수레에는 집채같은 폐지 대신 꿈처럼 아롱거리는 별이 가득하다. 한가득 별을 실은 수레는 폐지와 다르게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고, 짐으로 실린 별빛과 함께 할아버지도 덩달아 꿈을 꾸는 것도 같다.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이 상실한 꿈을 되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고단한 일상에 작은 위로나마 건네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작가는 폐지를 줍는 것으로 연명하는 노인으로 나타난(혹은 대변되는) 사회적 현실을 논평하는 한편, 이를 치유하는 방법도 함께 제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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