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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 세미나 / 김채영, 박경진, 신보영, 최민경

고충환



성신 세미나 / 김채영, 박경진, 신보영, 최민경


고충환 | 미술평론가


김채영,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었다 

작가는 버려진 것들, 폐기된 것들, 쓸모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가면 볼 수 있는 것들이고, 공사장이나 공터 그리고 재개발 현장에 가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도시 변방에 속한 것들이며, 삶의 변두리에 기숙하는 사물들이라고 해야 할까. 한쪽 다리를 잃은 의자, 공사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녹슨 쇠 파이프, 닳고 해진 가죽 사이로 내장 같은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 소파, 말라 죽은 식물과 함께 담배꽁초와 조개껍데기를 화초 대신 키우고 있는 화분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이 가세한다. 보도블록이나 담벼락 모서리에 박힌 듯 핀 이름 모를, 어쩌면 이름도 없는 잡초들이다. 작가는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그것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작가가 보기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었다. 작가의 논법을 빌리자면, 그것들은 본질에서 실존으로 옮아온 것이었다. 본질에서 실존으로? 그렇다면 여기서 본질은 뭐고, 실존은 또한 무언가. 사물에 빗대보면, 사물의 본질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능을 상실한 사물은 동시에 본질마저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기능을 상실한 사물이 본질을 잃고 실존을 얻는다. 실존이란 사물이 현재 처한 사정이며, 존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는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 본질을 잃고 실존을 얻는(그러므로 실존을 사는) 사물들에서 존재의 유비를 본다. 작가가 지나가는 말로 흘린 정치적 생태주의가 기왕에 존재론적인 그리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을 추후 심화하고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예견해봐도 좋을 것이다. 




박경진, 따뜻한 죽음 

따뜻한 죽음이라고 했다. 따뜻한 죽음? 따뜻한 죽음은 도대체 어떤 죽음일까. 아마도 작가의 고향일 강원도에는 유독 산불이 잦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어김없이 큰불이 있었던 것도 같다.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법도 했다. 아마도 따뜻한 죽음은 산불에 대한 기억 그러므로 트라우마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실제로 산불 현장을 그렸다고 했다. 산불이 나면 새까맣게 탄 채로 재가 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울창했던 솔숲이 불에 탈 때면 깊은 갈색을 띠며 붉게 죽어있었다고 했다. 솔숲은 죽을 때마저 갈색을 띠고 붉은색을 띠었다. 죽을 때조차 자기 색을 잃지 않았다. 그 색깔은 아마도 작가가 죽은 솔숲에서 실제로 본 색깔일 것이지만, 그중에는 작가가 마음속에서 불러낸 색깔도 있을 것이다. 죽은 솔숲에 색깔을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따뜻한 죽음이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산불마저 애틋한, 죽은 솔숲마저 살가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따뜻한 죽음을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설치할 것이라고 했다.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을,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산불 현장을 그렸다고 했다. 모필 사생이다. 산행하면서 달랑 모필 하나에 의지해 산을 그리고, 능선을 그리고, 땅을 그리고, 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고, 바람을 그리고, 공기를 그렸다. 봄을 그리고, 겨울을 그렸다. 시간을 그리고, 경험을 그렸다. 이 그림들이 작가의 그림의 바탕이 되었다. 이 그림들을 작가는 지도의 좌표라고 부르고, 이 그림들을 모아 공유지도를 만들었다. 아마도 내가 실제 사생을 통해서 공유한 것들, 그러므로 자연의 색감, 자연의 질감, 자연의 표정, 그리고 어쩌면 자연의 상처, 그러므로 자연과의 공감을 의미할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나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것들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신보영, 불안의 사용법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타일 벽체로 마감한, 아마도 양옥이지 싶은,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오래된 옛집에 군상들이 모였다. 이런저런 화분 사이로 호랑이도 있고, 크고 작은 개들이 있고, 닭도 있다. 해태가 보이고, 묘지를 지키는 석상(문인석?)도 보이고, 부처님도 보인다. 모르긴 해도 다른 형상도 더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왜 한자리에 있는가. 회합이라도 하는 것인가. 화분이나 다른 동물에 가려진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좌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장식 조각인가. 작가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취향과 물건을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작가의 그림을 보면,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들은 아마도 불안을 해소해주는 것들, 그러므로 안도와 위안을 주는 아이콘들일 것이다. 아니면, 원래 옛집을 꾸미던 장식품일 수 있고, 그러므로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사물일 수 있고, 다시 그러므로 작가가 기억에서 불러낸 단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불안한가. 여기에 왜 불안한지에 대해 힌트가 될 만한 그림이 있다. 아마도 길고양이를 그려놓고, 작가는 <허용된 거리>라고 불렀다. 만지고도 싶고,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이중성과 양가성이 불안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을 거리두기를 통해 해소하고 있었다. 취향을 수집하고 물건을 수집하는 것도 알고 보면 기억에 대한 감정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었다. 작가가 자신이 그려놓고 있는 그림을 부르는 다른 이름, 그러므로 <물러진 풍경>도 알고 보면 세상과의 거리두기의 결과였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러므로 세계감정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었다. 여하한 경우에도 불안은 예술을 위한 강력한 동기가 된다. 불안이 현실과 기억, 현실과 판타지를 엮어서 또 다른 비전을 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최민경, 다락방에 미친 여자가 산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라는 제목이 서사적이다. 다락방에 사는 미친 여자는 가족인가. 아니면, 작가의 분신 그러므로 작가의 숨겨진 또 다른 자아인가. 작가는 그(그 여자)를 뮤즈라고 부른다. 그에 대한 작가의 부름은 사랑인가, 아니면 자기애인가, 아니면 예술혼인가. 여기서 미쳤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작가의 그림은, 아니, 작가의 제목은 미처 쓰이지 않은(그리고 쓰일 수 없는)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그리고 말해질 수 없는) 말을 위해 있는 것 같다. 그림보다는 이야기를 위해, 말을 위해, 의미를 위해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가 붙인 제목은,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작가의 그림마저도 중의적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부분으로 치자면, 눈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눈을 그리고 옆으로 쓸어내려 흐릿하게 만든다거나, 눈에서 일종의 빛기둥 혹은 빛다발이 빔처럼 방사되고 있는 것이 그렇다. 상대를 향한 그리고 어쩌면 자기 내면을 향한 시선을 그러므로 어쩌면 심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런 시선 혹은 심리의 교환으로 작가의 그림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시선과 응시의 정치학인가. 시선은 내가 쳐다보는 것이고, 응시는 네가 쳐다보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너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네가 쳐다보는 것이다. 여기에 묘한 그림이 있다. <바라보고 마주하기>란 그림이다. 나는 망원경을 통해서 너를 본다. 그리고 너는 맞은 편에서 나를 본다. 나는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서 너를 보고, 너는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서 나를 본다. 기계를 통해서 서로의 눈을 본다. 눈동자를 코드로 상대를 인식하는 것인가. 인식도 기계로 하는 세상이니, 교감도 기계로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시선을, 시선과 응시의 교환 문제를 주제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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