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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용/ 재와 빛이 순환하는, 때로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좋을

고충환



김덕용/ 재와 빛이 순환하는, 때로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도 좋을 


고충환 | 미술평론가


나무는 숲의 바람 소리를 그리워하고, 자개는 바다의 윤슬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나무는 소성되어 한 줌의 재로 변하고, 자개는 산산이 부서져 빛이 된다. 그렇게 근원을 찾아가기 위한 회귀본능이 운율이 되어 흐르고, 생명의 빛으로 잉태되어 있다. 
- 작가 노트

엄마의 방, 엄마의 정원. 나뭇결이 여실한 목판 위에 작가는 엄마의 방을 그리고 정원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곱게 개어놓은 장롱 속 이불이 보이고, 장롱 거울에 비친 정원의 귀퉁이가 보이고, 새벽이면 가족의 안녕을 빌었을 장독대 위 정화수가 보인다. 기하학적 패턴의 창호 문을 열면 흐드러지게 핀 홍매가 보이고, 창문 밖으로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도 보인다. 아마도 옛집을 그렸을 것이다. 엄마를 그렸을 것이다. 엄마여서 좋은, 굳이 엄마가 아니어도 좋을 그리움을 그렸을 것이다. 엄마가 앉으면 치마폭이 넓게 펼쳐졌다. 작가는 엄마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 치마폭에 세상의 모든 존재를 싸안는 무한한 포용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가 유래한 우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가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그렸고, 어쩌면 존재의 원형적인 그리움을 그렸다. 

얼굴들. 목기 재질의 제기 위에 면 처리를 한 후, 목기 하나에 얼굴 하나를 그렸다. 유관순, 신채호,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알만한 인물과 함께,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지 싶은 얼굴들이 보인다. 그렇게 역사적인 인물과 보통 사람들, 죽은 사람들과 죽을 사람들(빈자리로 남겨진)의 얼굴이 한자리에 모였다. 작가는 그렇게 완성된 목기 그림 하나하나를 벽에 걸었다. 그렇게 얼굴들이 마음속 밤하늘에서 빛나고 있을 또 다른 별이 되었다. 그리운 얼굴들을 되 불러온 것이면서,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승화하는, 죽음(그러므로 어쩌면 삶)을 오마주하는 작가의 방식일 것이다. 

달항아리. 마치 어둠이 밀어 올린 듯, 어둠이 낳은 듯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은근하게 부유하는 달항아리를 그렸다. 아마도 있는 듯 없는 듯 부드럽게 스미면서 사무치는 빛의 질감이 달빛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고, 작가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달항아리는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태항아리). 그리고 신화에서 달은 여성(성)을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달항아리를 매개로 생명을 주관하는 자를 그려놓고 있었다. 엄마를 또 다른 버전으로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자개도 없는 맨살의 나무 위에 엄마의 방을, 얼굴들을, 그리고 달항아리를 그려놓고 있었다. 

풍경. 나뭇결이 여실한 맨살의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리던 작가의 그림에 자개가 도입되면서 작가의 그림은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하나의 그림 속에 두 개의 바다가 있다. 수면에서 아롱거리는 빛 알갱이들의 유희가, 윤슬(물비늘)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재료와 소재가 잘 맞다. 두 바다의 색감이며 질감이 미묘하게 다르다. 창을 통해 본 풍경과 거울에 비친 풍경을 대비시킨 경우로 볼 수도 있겠고, 시간의 차이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경우이든 현실적으로 존재 불가능한 풍경인 만큼 그 발상은 현실이 아닌 다른 데서 왔을 것이다.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편집으로 시공간을 확장하는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서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 속에 두 개의 바다를 들여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선물. 알록달록한 종이(아니면 비닐?)로 포장해놓은 크고 작은 상자들이 쌓여있고 널려 있다. 작가는 예술이, 예술적 재능이 선물이라고 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자신도 남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 그러므로 작가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치자면 온화한 성품과 따뜻한 마음씨, 그러므로 타자를 보는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 싶다. 잘 모르면서 어림잡아 본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선물 그림에서(그리고 어느 정도 작가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그런 마음씨와 시선이, 설레고 예쁜(아니면 여린?) 마음이 느껴진다. 

자개 산수. 크고 작은 빛 알갱이를 부려놓은 듯 자개 가루를 흩뿌려 고정하는 방법으로 산수풍경을 연출했다. 연작 작업으로, 색감과 질감에 미묘한 차이를 두어 사계절의 변화를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도 순환하는 계절, 순환하는 시간, 순환하는 자연, 순환하는 존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작가는 자개를 직접 일일이 빻아 가루로 만든 자개 가루를 쓰는데,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그 크기며 색감이 균일하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더 유기적이고 분방한, 그러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실제 화면을 보면 층이 얕은 저부조를 떠올릴 만큼 바탕화면에서 상당한 물성(마티에르)이 느껴지는데, 겨우내 불에 탄 재를 버무려 만든 재료를 바르고 굳힌 것이라고 했다. 재로 바탕화면을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 자개 가루를 덧입혀 마감한 것이다. 
여기서 재는 죽음을 상징하며, 자개 가루는 재생을 상징한다(참고로 안젤름 키퍼의 회화에 등장하는 재 역시 재생을 상징하며, 화전민으로서의 예술가의 환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재에서 자개 가루로, 어둠에서 빛으로 순환하는, 죽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순환하는, 밑도 끝도 없는 존재의 순환을 상징한다. 그리고 삶 속에 죽음이 죽음 속에 삶이 들어있는, 삶과 죽음의 상호 내포적인 관계를 상징한다(참고로 조르주 바타이유는 삶과 죽음의 본래적인 연속성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존재론적인 담론의 무게를 포함하면서도, 때로 풍경의 상처 같은, 풍경 위에 떠도는 이름 모를 존재의 영혼 같고 혼불 같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는 자개 입자가 감각적 쾌감을 준다. 

우주. 그리고 작가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은하수를, 유성을, 그러므로 우주를 그렸다. 우주를 그린 그림으로는 두 가지 다른 버전이 있는데, 그중 한 버전이 칠흑 같은 허공 속에 빛 알갱이를 부려놓은 듯 자개 가루를 흩뿌려놓은, 어쩌면 자개 산수에서 산의 형상을 빼고 그린 것도 같은, 비정형의 유기적인 느낌을 주는 작업이다. 태초에 우주가 막 생성되던 극적인 순간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를 삼키는 블랙홀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를 뱉어내는 화이트홀을 보는 것도 같고, 우주의 근원, 그러므로 존재의 본성이 카오스에서 비롯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도 같고, 우주에 던져진, 우주를 떠도는, 우주에서 길을 잃은 고독한 존재를 보는 것도 같은, 아득하고 막막한 느낌이다. 숭고한 감정을 자아내는, 숭고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그런, 심연(깊이의 끝, 그러므로 그 깊이를 미처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라는 의미를 가진)과도 같은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또 다른 버전의 그림으로, 세로로 길고 잘게 자른 자개 막대를 연이어 붙여 나가면서 고정한, 일종의 끊음질 기법을 적용해 만든 정교한 작업이 있다. 자잘한 자개 입자를 촘촘하게 붙여 나가면서 동심원을 그리게끔 구성했는데, 화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같고, 안에서 바깥쪽으로 퍼져나가는 것도 같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밑도 끝도 없이 이행하는 존재의 운동성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생과 사가 순환하는 존재의 원리며 자연의 섭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화면 아래쪽에 집이며 마을을 그려 넣어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순환하는 우주적 기운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화면 속 동심원 문양을, 패턴을 눈으로 좇다 보면 마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렇게 빨려 들어간 화면 속에서 길을 잃을 것도 같은, 화면 속 우주 속에 헤맬 것도 같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미술관 전시인 만큼 전작에서 최근작에 이르는 작가의 전 작업의 맥락을 읽을 수 있게 전시를 구성했다. 나뭇결이 여실한 맨살의 나무 위에 그린 그림에서부터, 작가의 작업에 자개가 도입되면서 나무 그림과 자개 그림이 공존하던 시기의 그림, 그리고 이후 자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근작에 이르기까지의 그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재료만 놓고 보면 나무에서 자개로 이행한 것인데, 작가는 서정에서 서사로 옮겨간 것이라고도 했다. 나무 재질의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이 서정성을 환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개 작업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생가 사가 순환하는 것과 같은, 특히 그 과정에서 재가 작업 속으로 들어오면서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양비론이 전면화하는 것과 같은, 그렇게 우주적 비전과 존재의 섭리가 강조되는 것과 같은, 거대 담론이 본격화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크게 보면 그렇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자개 작업이 서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이 서정인 만큼이나, 숭고한 감정도 서정이다. 우호적인 서정과 격렬한 서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서정과 서사 사이, 재와 빛 사이, 빛과 어둠 사이, 삶과 죽음 사이에 이행하면서 순환하는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 사이 어디쯤엔가에 존재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 그러므로 원형적인 그리움(어쩌면 그 자체 고독한 존재를 증명하는)을 풀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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