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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지/ 깊고 검은 구멍, 단단하고 축축한

고충환



고현지/ 깊고 검은 구멍, 단단하고 축축한 


고충환 | 미술평론가


고운, 정치한, 맑은, 고요한, 정적인, 알 수 없는, 애매모호 한. 작가 고현지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이다. 앞쪽에는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고, 뒤쪽은 의미다. 정적인 느낌인데,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림 속에 일어나는 사건을 보면 꼭 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데, 그런데도 왠지 정지화면을 보는 것처럼 고요한 느낌이다. 사실적이고 서사적인 그림인지라 하나하나의 의미는 알만한 그림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의미들이 연결되어 최종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런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있다. 그런데, 왜 구덩이를 파는지 알 수가 없다. 한 노인이 앞으로 뻗은 팔 안쪽에 얼굴을 묻고 모닥불 앞에 앉아있다. 그런데, 왜 노인이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지, 모닥불과 노인의 조합이 무슨 의미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한 여자가 빨래를 늘면서 아래쪽에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운 또 다른 여자를 쳐다본다. 빨래를 느는 여자는 누구이며, 모로 누운 여자는 또한 누구인지, 이 두 여자는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작가의 그림이 다 그렇다. 

이쯤 되면 이런 정적인 분위기며 중의적인 의미야말로 작가의 그림을 특징짓는 핵심이라고 해도 좋다. 알만한 소재들이지만, 그 의미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겉보기가 다가 아니며, 겉보기와는 다른 현실을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 표면적인 의미의 이면에 또 다른 의미가 복선처럼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잠복 된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의미와는 다르다(혹은 다를 수 있다). 모든 의미는 중첩돼 있다. 상징이고 알레고리다. 상징주의는 현실을 기호로 보고, 낭만주의는 현실을 죽음(그러므로 내세)의 기호로 간주한다. 상징은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 알레고리는 서사를 확장하기 위해 개발한 문학적 장치다. 입속에 맴도는 말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의미로 환원되는 순간 죽는 것들,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채로 의미하는 것들을 위해 생각해낸 장치다. 하나의 그림 속에 아기와 처녀와 노파가 등장하는 삶의 알레고리가, 추수(정산)를 위해 긴 낫을 든 해골이 등장하는 죽음의 알레고리가, 천상의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을 대비시킨 사랑의 알레고리가, 그리고 여기에 인생무상의 전언을 전해주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렇게 그림은 진즉에 그림이면서 이야기였다. 서사고 문학이었다. 어쩌면 작가는 그런, 서사적인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각색하고, 자기화하고 있다.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이다. 그 정의는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생산적이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여자가 손에 들고 있는 등불은, 그리고 나뭇가지를 치고 있는 혹은 구덩이를 파고 있는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는 헤드 랜턴은 길도 없는 길(삶의 유비)을 건너가게 해주는, 칠흑같이 까만 밤(또 다른, 삶의 유비)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을 상징하며, 삶의 지침을 상징한다. 그리고 촛불은 시간을 상징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필연(작가가 숙명이라고 부르는)을 상징한다. 모닥불은 활활 타오르다가 사그라진다. 이런 모닥불을 마주한 노인은 꽃 시절을 생각하면서 회한에 잠긴다. 그리고 물은 흐른다. 흐르는 것은 붙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삶도 흐른다. 또 다른, 존재의 필연이며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죽음이 있다. 빨래를 느는 여자가 힐끗 본,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워있어서 얼굴도 표정도 알 수 없는 또 다른 여자가 그렇다. 현재하는 죽음일 수도 있겠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죽음의 예감일 수도 있겠다. 그 앞에 놓인,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불이 죽음(죽음의 예의?)을 증언해준다. 그리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서 강은 중의적이다. 삶이라는 강(또 다른, 삶의 유비)을 건너는 중일 수도 있겠고, 죽을 때 건너가는 강(망각의 강)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향불이 피워올린 연기는 모닥불에서 나는 연기와 함께, 강가에 자욱한 물안개와 함께, 그리고 구름과 함께 시시각각 변신하는 것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붙잡을 수 없는 채로 존재하는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또 다른 삶의 유비를 열어 보인다.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와 같은 거대 담론 그러므로 존재론적인 얘기를 했으니, 이제 좀 더 현실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시장이 있다. 시장은 현실적인(그러므로 실존적인) 삶의 축소판이다. 삶이라는 극(그러므로 상황극)이 상연되는 극장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날 작가는 시장에 갔다. 시장에는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한 노인이 그중 닭 한 마리를 지목하자 가게주인은 망설임도 없이 닭의 목을 잘랐고, 그때까지 구구거리던 닭과 오리들이 일순 얼음이 되었다. 그리고 할 일을 한 주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기에게 젖을 물렸고, 아마도 가족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삶의 깨달음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적어도 작가는 여기서 삶의 현실을 본다. 삶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겉보기와 다르다. 이런 삶에 얽힌 이해관계를 작가는 보이지 않는 이면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는 죽음을, 숙명을, 그리고 여기에 치열한 삶의 현실을 삶의 이면 그러므로 삶의 그림자로 설정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구덩이를 파는 사람이 왜 구덩이를 파는지를 보자. 작가는 루이스 새커의 <holes 구멍>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소설에는 특수한 환경에 길들어 매일 무기력하게 구덩이를 파는 임무를 수행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고 했다. 옛날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이 구덩이를 파고 묻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삶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노동의 동물이다.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만약 그 노동이 무의미하다면 삶도 무의미해진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마르크스의 말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무의미한 노동에서 작가는 사회에 길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길들어 가는, 그 과정에서 어쩌면 저마다 자기를 상실해 가는 현실 상황에 대한 유비적 표현을 본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의미심장한 그림이 있다. 깊고 검은 돌무더기 터널 끝에 작은 빛 구멍이 보이고, 그 앞에 소녀가 저 홀로 서 있다. 아마도 빛이 보이는 곳에 닿기 위해선 깊고 검은 터널(또 다른, 삶의 유비)을 통과해 지나가야 할 것이다. 소녀는 빛 구멍을 쳐다보는 것도 같고, 애써 외면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짓누를 듯 거대한 바위 밑에 파인 단단하고 축축한 구덩이에 온몸을 웅크린 채 머리를 박고 있는 것도 같고, 바위 밑을 탐색하는 것도 같은 사람을 그린 그림도 있다. 아마도 작가의 자화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알 수 없는,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삶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 모두의 초상이기도 할 것이다. 중의적인, 알 수 없는, 삶 같기도 하고 죽음 같기도 한, 존재가 당면한 현실을,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작업을 함축적으로 예시해주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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