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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현/ 유형은 없다. 녹색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나마저도

고충환



강미현/ 유형은 없다. 녹색도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나마저도



고충환 | 미술평론가

사진. 처음에 사진은 사실주의 회화를 모방하는 재현으로부터 시작했다. 회화주의 사진으로 회화의 아우라를 모방했고, 사진에게 재현을 넘겨준 회화는 회화대로 자기 변신을 모색하는 와중에 현대미술을 열었다. 사진이 회화가 자기 변신을 유도하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그리고 사진은 현실을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로 자리를 잡았다. 다큐멘터리와 르포르타주, 그리고 어쩌면 스트리트포토가 그것으로, 종군기자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매그넘 그룹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 비평가로도 유명한 수전 손택이 본, 베르겐 벤젤과 다하우의 유태인 수용소 학살 장면을 찍은 한 장의 흑백사진 역시 그런 현실을, 시대를, 진실을 증언하는 사진이었다. 손택은 자신의 삶이 그 사진을 보기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사진은 진실을 증언하는 사진으로부터 거짓말하는 사진으로 진화한다. 연출과 편집 기술이 도입되면서 찍는 사진으로부터 만드는 사진으로 갈아탄 것이다. 주어진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연출된 현실, 각색된 현실, 편집된 현실을 통해 또 다른 현실을 제안하기에 이른 것인데, 현실이 억압하고 있는 현실, 현실이 간과하고 있는 현실을 제안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를 열었다(참고로 존 버거는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현실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런 각색되고, 연출되고, 편집된 현실은 처음에 콜라주의 형태를 빌리다가, 이후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공공연한 현실이 되고 있다. 이제 누구든 스마트폰만 있으면 현실을 찍고 편집하고 가공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나아가 자기만의 가공된 현실, 가상현실을 제안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후 현대미술에서 사진은 조형 사진, 연출사진, 사진 설치, 사진 퍼포먼스의 형태로 다변화하면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보면, 뉴욕에 거주하는 동아시아 여성들을 소재로 문화충돌과 자의식을 다룬 <You are not speaking, but I’m listening>(2013-2015)이 연출사진에 해당한다. 그리고 사진 퍼포먼스는 퍼포먼스를 매개로 한 사진으로, 단순히 행위(미술)를 기록한 사진(아카이브)이라기보다는, 행위를 통해 어떤 경험(예컨대 협동과 유대, 치유와 위로, 그리고 자기 갱신과 같은)을 유도하는, 그 과정에서 사진이 매개되거나 부수되는 사진(작업)을 총칭한다. 사진과 행위가 일체화된 경우로 생각하면 되겠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작가와 관객이 1분간 눈으로 대화하는, 사실은 그저 상대방의 눈을 빤히 쳐다볼 뿐인, 그렇게 참여 관객들이 돌아가면서 작가와 대화하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The Artist is Present>가 유명하다. 

보통 역할극과 인터뷰, 그리고 관객참여형 작업으로 나타나며, 최근 수년 내 작가 강미현이 보여주고 있는 사진 작업이 그렇다. 특히 인터뷰를 매개로 사람들이 속말을 털어놓고 억압된 자기를 해소하는, 다국적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Talk to me>(2019-)가 그렇고, 녹색을 소재로 한 근작 <천 가지 색>이 여기에 해당한다. 크게 보면 사진을 매개로 자기와 타자, 타자와 타자, 자기와 자연, 그리고 나아가 종래에는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재정초하는, 그런, 존재론적인 작업이며 자기반성적인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녹색. 작가의 작업실은 양평 깊은 산속에 있다. 산속에 살다 보니 지천이 자연이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그의 귀를 사로잡았고, 지천인 녹색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숲으로 된 성벽이라고 해야 할까. 숲속을 산책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녹색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찾고 있는, 바로, 그, 녹색은 없었다. 녹색은 다 달랐고, 볼 때마다 달랐다. 

같은 녹색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시시각각 색깔이 변했다. 바람이 불면서 일렁일 때, 바람이 잦아들면서 숨죽인 듯 가만히 있을 때, 해가 뜨고 질 때, 어스름해질 때, 사위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힐 때, 파르스름한 기운으로 대기가 물들 때, 폭풍우가 몰아칠 때, 비가 그친 후 청명한 햇살이 비칠 때, 이슬을 머금었을 때, 첫서리가 내릴 때, 진눈깨비가 내릴 때, 건조하고 습할 때, 그리고 여기에 기분이 들뜰 때, 울적할 때, 괜히 심각해질 때, 말하자면 자연에서 내 쪽으로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고 건너올 때, 그러므로 자연이 보고 내가 볼 때 숲은, 나뭇잎은, 나뭇잎의 녹색은 다 달랐다. 녹색으로 부를 만한 바로, 그, 녹색도 없었고, 같은 녹색도 없었다. 

이렇게나 다른데,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찾고 있는 바로, 그, 녹색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에 없다면 바로, 그, 녹색은 무엇인가. 관념이다. 관념으로 알고 있는 색이다. 그러므로 관념으로만 있는 색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개념과 실재는 다르다. 개념으로 알고 있는 세계와 실재는 다르다. 어쩌면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개념은, 그리고 관념은 지식이다. 지식은 실재를 추상화한다. 실재를 유형화하고 범주화한다. 그래야 애매한 실재가 분명해진다. 

루이 알튀세는 제도가 개인을 호명할 때, 개인은 비로소 주체로서 태어난다고 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같은. 그렇게 나는 제도에 의해 유형화되고 범주화된다. 지식에 의해 실체를 얻는다. 정 반대편에 김춘수의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하나의) 꽃이 되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추상적인, 무의미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호명은 단순한 지목이 아니라, 추상에 빠진 존재를 실재의 층위로 구출해내는 행위이다. 그렇게 알튀세의 호명과 김춘수의 호명이 다르다. 그저 녹색(보편성)이라고 부르고, 어떤 녹색(개별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녹색은 없다. 최소한 같은 녹색은 없다. 다만 녹색이라는 관념이 있고 개념이 있을 뿐. 유형이 있고 범주가 있을 뿐. 당연히 나 역시 관념 바깥에 있고 개념 바깥에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나는 유형화되지도 범주화되지도 않는다. 혹은 유형화와 범주화의 기획과는 상관없이, 나는, 있다. 그렇게 작가의 녹색 프로젝트는 정체성 문제와 연결된다. 섣부른 결론을 말하자면, 개념적인 녹색과 같은 녹색이 실제로는 없는 것처럼 나도 없다. 다만, 개념화할 수 없는, 그러므로 규정할 수 없는 녹색들이 있는 것처럼 나는, 있다. 


정체성. 그렇게 작가는 녹색을 사진으로 찍는다. 나뭇잎의 잎맥이 보이는, 나뭇잎의 얇고 두터운 살이 느껴지는, 나뭇잎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 섬세한 톱날 패턴이 손에 만져질 것 같은, 나뭇잎 위에 물방울이 맺힌, 나뭇잎 위에 드리워진 빛이 부드러운 음영을 만드는, 벌레 먹은 자국이 여실한, 저마다 다른 질감과 색감으로 오롯한 나뭇잎들을, 녹색들을 접사로 찍었다. 그리고 같은 크기의 사진들을 모자이크해 한자리에 걸었다. 

사진들은 벽면에서 떼어냈다 다시 걸 수 있게 했고, 사진 뒷면에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적혀 있다. 관객들은 저마다 임의의 사진 한 장을 선택하는 것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가 있는데, 임의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저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와 가장 닮은 사진을, 그러므로 녹색을 고를 것이다. 그렇게 관객들 저마다 다른 사진을 고를 것이다. 더러 같은 사진을 고른다 해도 무방하지만, 여하튼. 그리고 전시장 한쪽에 비치된 종이에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적고, 답안지를 사진 뒤에 붙인 뒤, 사진을 다시 본래 자리에 걸어둔다. 

그렇게 사람들 저마다 다른 녹색을 고르는 것처럼 같은 녹색은 없다. 같은 사람도 없다. 정체성이 그렇다. 정답이라고는 했지만, 임의로 사진을 고른 것처럼 정답 역시 임의의 정답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없다. 다시,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나는 있다. 나는 누구인가. 리어왕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걷어낸 자리에 진아가 있다고 했다. 예수는 미친 사람 속에 군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후기구조주의에서는 타자들의 욕망이 주체를 만든다고 했고,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 주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나는 없다. 다만, 나들이 있을 뿐. 

그러므로 천차만별의 녹색을 빌려 정체성을 묻는 작가의 프로젝트는 저마다 흐르는 나들, 이행하는 나들, 분기하는 나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시, 작가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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