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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규, 자연을 상실한 시대의 자연

고충환



차영규, 자연을 상실한 시대의 자연 

고충환 | 미술평론가



헤겔은 예술이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감각적 질료를 빌려 어떤 이념을 표현한 것이라는 말이다. 감각을 도구로 이념을 조형하고 형상화한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이념을 다르게는 주제 또는 주제 의식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작가 차영규의 주제는 무엇인가.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 또는 인문학적 배경 그러므로 전제는 무엇인가.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한국성 혹은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질)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논의된 것이지만, 작가의 작업은 시종 이 주제 의식을 심화하고 변주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이고, 그 형식실험을 통해 자기 작업의 정체성을 확립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원형이란 무엇인가. 칼 융은 원형과 전형을 구별했다. 의식적인 기호, 사회적 합의로 공유하는 기호가 전형이라고 한다면, 원형은 전형보다 그 심도가 깊다. 어쩌면 전형은 원형에서 길어 올려진 것일 수 있다. 마치 의식의 이면에 무의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처럼. 그러므로 원형은 선험적인 기호, 미처 기호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기호, 무의식적인 기호들의 저장고일 수 있다. 신화와 전설과 민담과 같은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잠정적인 기호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유기적인 덩어리일 수 있다. 그 자체 원형질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런 원형적 이야기(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이야기들의 원형)를 품고 있는 질료적 형상 그러므로 원형질은 어떻게 조형할 수가 있는가. 이와 관련해 작가는 한지 조형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 한지 자체를 직접 조형하는 것을 통해 한지의 성정이, 한지 고유의 원형적인 성질이 발현되게 한 것이다. 

처음엔 작가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한지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한지 조형으로 옮겨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종 그 형식실험에 진력하고 있다. 한지 고유의 성질 그러므로 색감이며 질감이 중요한 만큼 아예 자신이 원하는 한지를 직접 만드는데, 먼저 한지의 원료인 닥 섬유를 빻고 물에 풀어 하늘하늘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분해된 섬유질을 건져 올려 적당히 굳힌 상태에서 원하는 형태며 조형을 만드는데, 탁본에서처럼 다른 사물의 형태며 표면 질감을 떠내기도 하고(때로 작가는 원하는 형태를 직접 만들어 떠내기도 한다), 점토 소성에서처럼 손으로 빗어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 한지라는 재료가 다를 뿐, 주형 조각이나 점토 소성 과정이 변형 적용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조각과 특히 저부조 형식의 조각과 닮아있다. 한지 위에 그림을 새겨넣듯 그린 것(요철이 있는 그림)이란 점에서는 바위 위에 그림을 새겨 그린 암각화와도 닮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올리고 그림을 덧그려 그림을 완성하는데, 천연염료와 함께 석채가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 토치의 불을 이용해 요철 부위를 검게 그을리는 것으로 그림을 대신하기도 한다. 특히 산맥의 도드라진 부분에, 바위와 암벽의 표면 질감에 효과적으로 보이는데, 그 자체 붓이 확장 적용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 그리기와 만들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그리고 여기에 조형을 공간에 설치하거나 매달기라도 할 때면 설치미술마저 아우르는, 자신만의 조형적이고 형식적인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한지 고유의 성질을 읽고, 자신이 원하는 조형으로 그 성질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 만큼 그 과정에서 한지의 성질에 대한 이해는 결정적이다. 여기서 주지하다시피 한지와 양지는 다르다. 한지의 성질이 부드럽고 유기적이고 비정형적이며 우연적이라고 한다면, 양지의 조직 혹은 구조는 상대적으로 정형적이고 안정적이며 균일한 것이 다르다. 여기에 한지는 은근하게 빛을 투과하는 성질이 안온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양지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한지 고유의 성질이 한국인의 성정에 어울리고, 한국적 미의식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가 한지 조형을 고집하는 이유며, 이를 통해 작가가 성취하려는 지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한지의 성질을 매개로 자신의 소소한 생활감정을 표출한 것이고, 그 육화된 형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질을 발현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조형)에는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있고, 하늘을 나는 새가 있다. 물속이나 하늘처럼 열린 공간을 제집으로 삼은, 물고기와 새의 자유자재한 처지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는 산세를 관망하는 염소가 있고, 달을 관조하는 사슴이 있다. 하나같이 이쪽에서 저편을 쳐다보고(염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그대로를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이상(현실 너머를 지향하는)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자신을 물고기와 새, 염소와 사슴과 동일시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것일 터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 작가의 자화상이며,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분신(작가의 욕망이, 이상이 투사된)이라고 해도 좋다. 

물고기와 새, 염소와 사슴이 있으려면 덩달아 그 배경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풍경도 있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폭포가 있고, 안개 낀 산 정상이 있다. 첩첩한 산세가 있고, 산세 뒤로 보이는 아스라한 절경이 있다. 산세로 둘러싸인, 마치 항공지도를 연상시키는 부감 시점이 아득한, 산세가 자기 속에 숨겨놓고 있는 것도 같은, 눈의 수정체를 닮은 고즈넉한 호수도 있고, 달빛이 은근한 풍경도 있다. 특이한 경우로, 파도를 조형한 입체도 있다. 아마도 파도 소리를 듣고 싶고,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폭포도 그렇지만, 시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를 암시하는 것인데, 여기서 작가는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가 하나로 통하는 공감각에 대한 인식을 예시해주고 있다. 폭포도, 안개도, 첩첩한 산세도, 고즈넉한 호수도, 은근한 달빛도, 그리고 여기에 파도 소리도 현실 그대로라기보다는 작가의 이상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은 은일 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조형)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비록 실재하는 것들이지만, 현실에서 건너온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작가의 이상에 맞게 편집되고 재구성된 것이다.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은, 자연에 동화된 삶을 살고 싶은 욕망과 이상을 반영한 것인데, 그러나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의 이상을 현실에서는 실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그림은 사실은 현실과 이상과의 차이를 그린 것이고 괴리(거리)를 그린 것이다. 이상향을 그린 것이고,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유토피아는 초 장소,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란 뜻이다.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장소란 의미다. 이상이라고 했지만, 꿈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이처럼 꿈꾸는 풍경이며, 이상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해 알고 있다. 전통적인 관념산수가 그렇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 전통의 맥을 계승하면서, 자연을 향한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관념을 자신만의 문법(방법론)으로 재해석하고 확대 재생산한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일상에서 느낀 소소한 생활감정을 작업으로 풀기도 한다. 얽히고설킨 얼개 같기도 하고 지층 같기도 한 구조 위에 알록달록한 채색을 올린 작업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린 관계며 인연을 표현하기도 하고, 흔적처럼 희미한 작업으로 소실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조각으로 치자면 투각에 해당할, 구멍이 숭숭 뚫린 작업을 통해서는 상처(물론, 상처가 아닌 다른 무엇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를 표현한 것이 그렇다. 계절마다 다른 감정(그러므로 계절 감정)을 다른 색상으로 물들인 시리즈 작업도 있고, 기운과 기운이 서로 부닥치는 것도 같고 물고 물리는 뫼비우스의 띠 같기도 한 역동적인 구조를 통해서는 윤회와 같은 관념적 현실을 표현한 작업도 있다. 

이 모든 작업에서 작가의 일상은 존재론적 현실에 연계되고, 자연에 연동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도구적 자연 개념이 보편화된 현실에서, 작가의 작업은 진정한 자연을 꿈꾼 것이란 점에서, 잃어버린 낙원의 회귀(혹은 복원)를 꿈꾼 것이란 점에서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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