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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라코위츠, 제이알/ 서구를 떠도는, 국경에 떠도는 유령들

고충환



마이클 라코위츠, 제이알/ 서구를 떠도는, 국경에 떠도는 유령들 

고충환 | 미술평론가


기원전 575년 느부갓네살 2세 치세 하에 건설된, 이슈타르의 문을 지나 바빌론시가지로 이어지는 거리를 아즈 이부르 샤푸라고 불렀다.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매의 눈으로 적을 감시한다는 뜻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에도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선가는 전쟁과 이산, 약탈 문화재와 난민 문제, 종교 갈등과 인종 편견 그리고 아시아인 혐오범죄와 같은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은 사실은 보이지 않는 적은 존재하기 마련이라는 당위적 의미로 읽힌다. 

그래서일까. 이 말은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이미 이라크 국립 박물관이 약탈당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이라크계 미국인 작가 마이클 라코위츠의 작업을 견인하는 전제가 되었다. 2003년이면 비교적 현대의 일인데, 아마도 식민제국주의 시절에 문화재 약탈은 공공연한 현실이었을 것이고, 모르긴 해도 담당 부대 혹은 부서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의 조부모는 유대계 이라크인으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이라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 롱아일랜드에 정착했다. 비록 그 자신 한 번도 이라크에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런 가족사를 이해한다면 약탈 문화재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는 자연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이라크인과 유대인과 미국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자의식으로부터 유래한 다국적 정체성 그러므로 크레올성(혼성) 정체성으로 나타난,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약탈 문화재를 재현한다. 주지하다시피 서구 열강은 입체의 경우 벽돌 하나하나를 분해해 옮긴 후 그대로 쌓아 올려 복원했고, 평면 부조의 경우 벽면을 통째로 뜯어서 옮기는 식으로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래서 작가가 재현해놓고 있는 평면 부조 벽화작업에는 뜯겨 나가고 없는, 빈 부분으로 남겨진 부분이 그대로 있어서 문화재 약탈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전통 기법인 파피에 마세 그러므로 아마도 종이 죽을 쌓아 올려 석판 부조를 재구축한 연후에, 표면을 일상적인 오브제로 장식했다. 

작가와 작가의 조부모가 거주하는 커뮤니티에서 채집된 영문과 이라크어가 혼성된 신문과 잡지, 과장 봉지와 포장재 등 생활 오브제를 이용해 마감했는데,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키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고대 문명과 팝, 약탈 문화재와 키치, 역사적 현실과 일상적 현실, 폭력적 현실과 유희적 현실, 거대 담론과 미시적 서사처럼 얼핏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조화가 다국적 정체성 혹은 크레올성 정체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느낌이다. 혼성 혹은 사이 혹은 경계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UN의 대이라크 제재가 해제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라크산 대추야자가 레바논산 제품으로 둔갑해 유통되고 있는 현실에 착안한, 그리고 미군 모습의 액션 피규어 코디(2005년 이라크의 한 무장단체가 미군 병사를 생포했다고 주장하면서 공개한 사진이 사실은 코디 인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명해진)가 시카고 대학교 동양학 연구소에 진열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봉헌 조각상과 대면하는 영상작업을 통해 이런 정체성 테마를 변주한다. 정체성이 분기되는 지점으로 각 약탈 된 문화재와 이산을 겪는 대추야자(이산을 겪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고 코디가 설정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대추야자를 소재로 한 영상작업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Return 그러므로 마침내 돌아온, 마침내 되찾은, 마침내 돌려받은, 정도를 의미한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그렇게 돌려받지 못한, 약탈 문화재를 재현한 자신의 작업을 서구를 떠도는 유령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유령(들)이 있다. 다양한 피부색과 외모, 체격의 사람들/ 난 그 모든 이들을 떠올린다/ 그곳에 도달한 사람들을/ 저 멀리 떨어진 뭍에 도착한 사람들을/ 해변, 또는 다리나 길로 올라와/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냈다/ 마침내 집에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난 그곳에 가지 못했던 모든 이들과/ 영원히 가지 못할 사람들의 유령이다(엘리스. 쇼트 필름. JR). 

영화에서 나(로버트 드니로)는 저기에 가기 위해 여기에 머문다. 여기에는 나 외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많다. 의사는 가망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돌아가고 없는 밤에도 여기에 머문다. 숨어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나처럼 숨어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났다. 엘리스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엘리스는 없다. 엘리스가 마침내 바다 건너편에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저곳에 도달했는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저기를 쳐다보면서 여기에 머물고 있다. 나는 유령이다. 

거리의 예술가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뱅크시, 게릴라 걸스, 그리고 제이알 같은. 행동주의 예술가라고 해도 좋다. 신제국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시대에도 효력을 발휘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회변혁을 꿈꾸는 혁명가의 후예라고 해도 좋다. 그중 사진을 매개로 한 제이알(사진 설치? 사진 퍼포먼스?)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보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이미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도 했다. 보는 방식을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존 버거를 떠올리게 하고, 다르게 보는 것을 통해 대상(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는 요셉 보이스의 사회 조각을 연상시킨다. 

제이알은 사진장비를 구비 한, 마치 사진관과도 같은 대형트럭을 몰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간다. 이주민 주거 지역에 사는 사람들, 국경을 넘는 사람들, 가자지구와 같은 분쟁지역에 사는 사람들, 감옥과 같은 격리된 수용시설에 사는 사람들, 제3세계 여성들처럼 억압받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에서 늙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소외와 억압, 분쟁과 갈등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초상 사진을 찍고, 즉석에서 확대 프린트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담벼락에 붙이고, 허물어진 건물 벽 위에 붙이고, 번잡한 거리에 붙이고, 깨진 유리창 위에 붙인다. 익명적인 사람들이 커뮤니티 사람들과 자신의 초상 사진을 공유하면서 자긍심을 나눌 수도, 존재감을 되찾을 수도 있다.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작업이다. 

이런 협력 프로젝트를 보다 적극적인 참여형 예술로 확장한 것이 <인사이드아웃>이고, 작가는 2011년부터 이후 계속 이 프로젝트를 진행 심화해오고 있다. 작가의 메인 프로젝트라고 보면 되겠다. 도시의 벽에 사진을 붙이는 자신의 방식을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돕는 것인데, 웹사이트 플랫폼을 통해 참가자들이 사진을 보내오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그 사진을 프린트해 참가자가 직접 부착할 수 있도록 다시 보내주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작게는 개인을, 크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익명적인 사람들이 직접 주체로서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렇게 마이클 라코위츠의 약탈 된 문화재(그러므로 지금은 부재 하는) 위로, 제이알의 국경을 넘지 못한 사람들 위로 유령들이 떠돌고 있다. 추억, 기억, 회상, 분노, 좌절, 절망, 포기, 소외, 억압, 실낱같은 희망과 부질없음, 그리고 때로 화해가 화해진 유령들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그러므로 이데아)을 상기한다는 플라톤의 관념(상기론)을 이어받은 것이다. 현대적인, 그리고 사회학적인 경우로 치자면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 그러므로 발가벗은 인간을 의미할 것이다(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그리고 여기에 실비 제르맹의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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