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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묘수, 우주를 떠도는 점과 내면에 응축된 얼룩에서 발광하는 빛

고충환




강묘수, 우주를 떠도는 점과 내면에 응축된 얼룩에서 발광하는 빛 

고충환 | 미술평론가


인간의 마음속에 우주로 불리는 빛이 존재한다. 나는 그 빛을 희망이며 삶의 지평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본인의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빛의 숭고다. 숭고를 통해 정중동에 내재한 고요 속의 평화를 표현하고자 한다. 빛의 무한함을 통해 끝이 보이지 않는 숭고의 빛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산책은 인생이라는 여행을 표상한다. 점은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는 시작점이자 끝나는 부분이 된다. 점은 사람들의 작은 셀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작가 노트

여기에 그림이 있다. 적색 계열의 그림이 있고, 흑색 계열의 그림이 있다. 때로 두 그림이 대비되면서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데, 대개는 흑색 계열의 그림이 아래에, 그리고 적색 계열의 그림이 위쪽에 배치된다. 얼핏 색면화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추상화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수평선이 아득한. 칠흑 같은 바다 위로 노을이 내려앉는. 노을이 어둠에 잠식된 대지를 감싸 안는. 내면화된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화면을 양분하면서 가로지르는 선 때문일 것이다. 사각의 프레임이 창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마음의 창으로 보는 메타포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추상화의 형식을 빌려 자기 내재적인 풍경 그러므로 내면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색면화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반투명이다. 전면균질회화나 불투명한 회화와는 다르게 불규칙적인, 우연적인, 비정형의 얼룩들이 겹쳐 보인다. 부분적으로 바탕천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기조차 한다. 빛의 질감, 빛의 색감, 빛의 질료, 빛의 기미가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이고, 여기에 반투명한 화면이 부응하고, 빛을 투과하는 화면이 부합한다. 작가는 바탕천에 미디엄과 같은 별도의 재료를 칠하지 않는다. 별도의 바탕 처리를 하지 않은 생 천에 밑그림도 없이 바로 그리는데, 먹(주로 흑색 계열의 화면에 적용되는)과 잉크(주로 적색 계열의 화면을 위한)로 그린다. 먹을 잉크의 한 종류로 본다면, 사실상 잉크로 그린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잉크는 (반) 투명한 재료이고, 면 천에 얹히기보다는(덮어서 가리기보다는) 스며든다. 그렇게 스며들면서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작가는 붓질과 함께, 물감을 흩뿌리는 드리핑 기법을 구사한다. 그렇게 수도 없이 물감(잉크)을 흩뿌리면서 화면에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들을 누적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아마도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릴 것이고,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릴 것이다. 자기를 지우면서(그러므로 망아) 그릴 것이고, 잠재적인 자기, 억압적인 자기(그러므로 진아)를 되찾으면서 그릴 것이다. 그렇게 비정형의 얼룩들이 누적된 화면 위로 작가의 감각이, 자기의 흔적이, 그러므로 자기가 낭자하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결국 잠재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과정이며, 억압적인 자기를 발굴하고 대면하는 경험일 것이다. 

그렇게 비정형의 얼룩이 누적된 화면이 시간이 멈춘 바다를 보는 것도 같고, 칠흑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같고, 이름 모를 운석의 표면 질감을 보는 것도 같고, 우주를 떠도는 고독을 보는 것도 같고, 밑도 끝도 없는 심연을 보는 것도 같고, 어둠 자체를 보는 것도 같다. 정적인 표면이 들끓는 이면을 감싸고 있는, 파토스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이 모든 내면적인, 그리고 관념적인 풍경 뒤로, 투명하고 깊은 바닥에서 빛의 기미가 감지된다. 잠재적인 감각, 억압된 자기가 물화 된 형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잊힌 자기가 자기를 실현하는 형식이라고 해도 좋고, 잃은 자기가 마침내 되찾아진 형식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흔적, 얼룩, 자국 그리고 어쩌면 상처처럼 그 존재 방식이 희박하면서 절실한 것들을 매개로 자기(그리고 자기의 흔적)와 오롯이 만나고 있었다. 

때로 작가는 그림 뒤에 조명을 장착해 빛의 기미를 강조했는데, 이때 화면에 숨겨진, 다만 암시적이고 암묵적이기만 했던 얼룩의 실체가 적나라해진다. 마치 엑스레이 필름을 통해 보듯 마음과 내면과 상처와 억압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이 투명하게 자기의 실체를 드러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발가벗은 자기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상처처럼 내면적인 것은 평소 잘 안 보이지만, 진심으로 보면 보인다는 의미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름 모를 성벽에 난 우연한 크랙과 비정형의 얼룩에서 풍경을 보고,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보고, 전쟁을 본다고 했다. 심지어 성당의 종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평소 자연과학자를 방불케 하는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해도 좋고, 신비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갓 얼룩에서 풍경을, 자연을, 우주를 보는 암시의 능력(아니면 예지력?)인 것이며(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 어느 면에선 작가 역시 그렇다. 다만 작가의 경우에 그 비전의 종류가 억압된 것과 같은 내면적인 것,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론적인 것이 다를 뿐. 

그렇게 작가는 화면 내부로부터, 그러므로 어쩌면 심연에서 길어 올린 빛의 기미와 함께, 비정형의 얼룩으로 축조된 화면을 매개로 자신의,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그러므로 존재의 내면 풍경을 열어 보이고 있었다. 그 빛의 질감이 숭고한 기운으로 감싸는데, 공교롭게도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바넷 뉴먼이나 마크 로스코와 같은 색면화파에서 발견한 숭고의 감정과도 통한다. 존재에 대한 감정이며 이해가 시공을 초월해 서로 통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비정형의 얼룩을 매개로 내면 풍경을 그렸고, 존재론적인 풍경을 그렸다. 사실 근작에서의 얼룩은 산책을 주제로 한 종전 그림에서의 점이 확대 적용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산책이란 주제 혹은 주제 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삶에 대한 메타포로서 채택된 것이다. 삶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길이고, 여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만나고, 관계를 만난다. 그 만남이 때로 풍경과 같은 형상에 정박하고, 때로 허공을 떠도는 점으로 머문다. 

무슨 말인가.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산책 시리즈 그림에는 마치 부유하는 것 같은, 풍경 위로 떠도는 점들의 군집을 엿볼 수 있다. 이 점들은 다 무엇인가. 말들의 입자들이다. 기억의 세포들이다. 의식의 흔적들이다. 망각 속에서 길어 올린 기억의 편린들이고, 잃어버린 말들의 형해들이다. 발화되지 못한 채 화석이 된 말이며, 입속에서 맴도는 말이며, 그리움으로 전이된 말이며, 속절없는 말들이다. 미처 말해지지 않은 말들이 하늘을, 허공을, 심연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하늘을 떠돌던 말들이 내면에 침잠하면서 근작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무의식의 지층으로 응축되었다고 해야 할까. 근작에서의 빛의 질감은 왠지 은근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정적이고 격렬한 느낌을 주는데, 격렬한 느낌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감싸는 느낌을 주는데, 아마도 내면에서 발원한 빛일 것이다. 그 빛의 질감이 밑도 끝도 없는 심연과도 같은, 투명한 깊이의 끝을 헤아릴 길 없는 막막한 우주 속을 떠도는 고독한 말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서 위로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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