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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원/ 시간 조각,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고충환

이점원/ 시간 조각,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모든 것에는 생명이 깃들어있다. 소박한 것에도 생명이 존재한다...이제 흐트러짐을 향해 걷는다(작가의 말). 


작가 이점원은 1983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얼추 40년 전 일이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40여 회에 달하는 개인전을 이어오고 있다. 일 년에 일회 이상씩 개인전을 연 셈이다. 그룹전이나 기획전이 아닌, 개인전만으로 이룬 횟수란 점이 놀랍다. 제작 기간이 느릴뿐더러, 잘 팔리지도 않는 조각 전시로 이른 횟수란 점이 더 놀랍다. 개인전을 자주 한 것이 무슨 대수냐고도 하겠지만, 평소 조각에 대한 작가의 열정을 대변해주는 객관적인 수치로 보아 무방하겠다. 
작가의 열정이라고 했다. 작가는 조각이 재밌다고 했고, 예술이 놀이라고 했다. 아마도 작가에게 조각은 산고의 순간에서마저 놀이고 유희였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조각은 삶과 작업, 생활과 예술의 경계마저 넘어서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각이 오롯이 재미고 놀이일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일상처럼, 생활처럼 조각을 하는 것이야말로 작가로 하여금 조각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일상으로부터 나오고, 생활에 연유한다. 바로 이런 일상성이 작가의 조각이 갖는 미덕이고, 그 일상성으로부터 유래한 오브제(생활 오브제) 조각이 특징이다.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작가가 조각을 처음 시작한 1980년대, 작가의 조각은 일상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유별나게 작가가 그랬다기보다는, 당시 지배적인 시대적 경향성과 호흡을 같이 한 경우로 보인다. 이를테면 설화, 신화, 잉태, 기원, 시원, 서원, 생, 생명, 환생과 같은 거대담론을 매개로 존재의 원형을 역추적하는 한편, 이로부터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경향성 말이다(알다시피 일상성 담론은 미시적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거대담론과 구별된다). 
당시 작가의 작업을 보면, 한눈에도 기념비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토템폴 형상의 구조가 수직성을 강조한 것이 그렇고(토템폴에서 수직 구조는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심성이 강한 구도와 좌우대칭을 강조한 것이 그렇다. 세부적으로는 마치 생명의 원형이랄 수 있는 씨앗이 최초로 발아하는 극적 순간을 추상화한 단위 형상을 모나드 삼아 반복 병렬한 것이, 흡사 생명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생명의 기원에 대한, 존재의 원형 혹은 원형적 존재에 대한 주제 의식이 발현된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정작 작가 자신은 이 일련의 작업에 대해 태극을 변주한 경우로 보는데, 나중 작업 중 고택에서 뜯어낸 마룻바닥을 가공해 만든 일련의 기 시리즈 작업과도 그 의미가 통한다고 본다. 태극도 기도 크게는 우주의, 작게는 존재의, 더 작게는 생명(그러므로 씨앗)의 생성원리(우주가 존재 그러므로 생명을 낳고 거두어들이는, 그렇게 생명이 무한순환하는 원리)를 관념적으로 도상화한 경우란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망 조각. 그리고 이후 작가는 구부러진 가녀린 금속 선을 용접하는 방법으로, 더러 사각형도 있지만 대개는 원형의 속이 빈 망 조각을 만든다. 전통적인 문법으로 치자면 선조가 확장 적용된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과성이 특징이다. 겉과 속의 경계를 넘나드는가 하면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것이, 어쩌면 한지가 발려진 창호 문이나 대나무 혹은 갈대를 엮어 만든 발을 통해 외계를 한 차례 걸러서 보는 전통적인 생활문화(그러므로 어쩌면 생활감정)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망 조각은 매스 곧 양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주지하다시피 매스는 전통적인 조각의 가장 강력한 본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각이란 점에서, 조각 이후, 어쩌면 탈 혹은 비 조각을 예비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이로써 조각의 문법을 확장 심화하고 있는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형태를 보면 사각형도 있지만, 대개는 원형이 많은데, 여기서 원형은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원형으로 나타난 형태를 의미하고, 의미로 치자면 존재의 원형을 표상한다. 그리고 여기에 원형은 아마도 모든 형태의 형태, 모든 형태의 근원적 형상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각형 역시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망 조각은 벽면에 그림자를 만드는데, 여기서 그림자와 조각이 실물(감)을 놓고 서로 다투는 일이 또 다른 담론(이를테면 가상이론과 같은.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가상이론은 미술사 초기에 재현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하다)을 파생시킨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욕망에 대하여. 작가는 죽은 나뭇가지를 조각해 천장에 매달았다. 조각이라고는 하지만, 가급적 손길을 최소화해 소재 본래의 원형 그대로를 살렸다. 그렇게 매달린 나무 조각이 흡사 하늘을 나는 새 같다. 그런데, 나뭇가지의 형태가 좀 이상하다. 부엉이가 방귀를 뀌어 가지의 모양이 변형되었다고 해서 부엉이 방귀로 불리기도 하고,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나무가 금방 썩는다고 해서 소나무 암이라고도 부르는 혹을 몸통으로 삼고 있는 새 같다. 그 새를 작가는 욕망을 삼킨 새라고 부른다. 형태가 불러일으키는 연상작용(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일 테지만, 이로써 작가는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을 풍자한 것이다. 혹이라고 했다. 암이라고 했다. 혹인줄도 모르고, 암인지도 모른 채 일단 삼키고 보는 현대인의 무지와 무분별한 욕망을 풍자한 것이다. 흔히 욕망이 눈을 멀게 한다는 말 그대로다. 
이처럼 욕망을 삼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엔 욕망을 비워내는 사람들도 있다. 온몸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의 군상이 그런데(중중무진 시리즈), 작가는 그 군상을 참회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의 웅크린 모습이 흡사 자라나 거북 등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평소 작가의 불교적 관념이 반영된 작업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에서는 욕망을 만고의 원인이라고 본다.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여기에 욕망 자체는 허구고 허상이다(색즉시공공즉시색). 그런가하면 프로이트는 인간이 인간인 것은 다름 아닌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이처럼 인간은 욕망을 뱉을 수도(부정) 삼킬 수도(긍정) 없다는 점에 삶의 부조리가 있고 존재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으로 하늘을 나는 새가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작업 중엔 하늘을 나는 사람들도 있다. 나뭇가지를 조각해 그 표면에 채색을 입힌 것인데, 마찬가지로 목 조각에 색깔을 올린 전통적인 꼭두인형을 연상시킨다. 사람들 저마다 하늘을 나는 사람들에 자기를 대입시켜보는 재미가 있고, 여기에 하늘을 나는 사람 중엔 작가도 있어서 작가의 유머 내지는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하늘을 나는 사람들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상징일 것이다. 꿈일 것이다. 이상일 것이다. 욕망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욕망에, 이번엔 기꺼운 욕망, 자발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시간 조각,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그리고 작가는 생활 속에서 이미 사용했던 오브제를 재사용하는 조각을 시간 조각이라고 부른다. 생활 속에서 채집된 것들이란 점에서 생활 오브제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오브제가 녹슨 시간을, 쌓인 세월을 흔적으로서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흔적은 친근함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정서적 환기력마저 자신의 본성으로서 간직하게 된다. 
미술사에서 보면, 오브제가 현대미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초현실주의에서부터이다. 초현실주의는 오브제가 생활 속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친근함을 낯설음으로 바꿔놓는 낯설게 하기 전략을 통해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전략이라고는 했지만,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일상에 잠재된 예술적 잠재력이며 가능성을 발견하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찾아낸 오브제, 친근함을 벗고 낯설음을 덧입은 오브제, 일상에서의 자기 변신에 성공한 오브제를 발견된 오브제라고 부른다. 
작가의 작업에서도 역시 이런 발견된 오브제, 그러므로 생활 오브제,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시간 조각이 중요한, 그리고 결정적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생활 현장으로부터 취해온 각종 생활 오브제의 최초 원형 그대로를 살리면서 여기에 최소한의 손길(어쩌면 해석)만을 더해 변형시킨다거나, 상호 간 이질적인 재료와 재료, 오브제와 오브제를 결합해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의외의 형상을 열어놓는다. 그 형상이 친근한 것은 평소 익히 알만한 오브제란 점에서 그렇고, 그럼에도 예기치 못한 조합, 의외의 조합이 낯선(그러므로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렇게 작가는 목재로 만든 소반이나 함지박에 소복한 꽃잎 형상을 조형했는데, 꽃잎은 때로 나무 숟가락이나 나무 주걱, 그리고 더러는 놋숟가락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하나로 모인 꽃잎이 불어오는 바람에 막 흩날리기 직전의 극적 순간을 포착한 것인데, 바람이 새긴 꽃이란 제목에서처럼 가시적인 꽃을 통해 정작 비가시적인 바람의 실체를 표현한 작품이다. 또 다른 작품을 보면, 버려진 농기구와 콤바인 트랙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기계 부품들, 부삽이나 가위 같은 녹슨 철물을 이용해 전통적인 12지신상을 표현하고, 가족과 동네 사람들(샘골 사람들) 같은 인간군상을 재현했다. 오브제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표정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중첩(이입?) 시켜 마치 단체 사진처럼 연출한 것이 설핏 웃음을 자아낸다. 
이외에도 다듬이와 다듬잇방망이, 고택에서 수거한 나무 문짝과 대들보, 촛대, 물레, 지게, 여물통, 의자, 가마니 바디, 홍두께, 소뚜레, 나무뿌리, 심지어 폐컴퓨터를 조합하고 변형시켜 천태만상의 사람풍경을 연출해 보인다. 그렇게 재생된(그러므로 어쩌면 환생한) 일련의 오브제 작업에서 작가는 일종의 풍경 조각의 가능성과 함께, 의외의 조합을 통해 예기치 못한 비전을 열어 보인다. 그렇게 열린 비전이 세상살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풍자와 해학이 앞서고, 이로써 세상을 향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과 연민이 느껴진다. 

작가는, 모든 것에는 생명이 깃들어있다고 했다. 소박한 것에도 생명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제 흐트러짐을 향해 걷는다고도 했다. 여기서 생명은 자연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이란, 알다시피 스스로 그러한, 원래부터 그런,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고, 사람의 논리로 재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인간이 이미 타고난 본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은 사람을 넘어 지향해야 할, 다시 돌이켜 되찾아야 할 본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소박한 것에도 생명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지워, 무생물에도 생명이 있다는 의미로 읽고 싶다. 삼라만상치고 생명 아닌 것이 없다는 의미로 읽고 싶다. 그리고 이제 흐트러짐을 향해 걷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흐트러짐이란 아마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탈형식을, 유격을(어쩌면 김지하의 기우뚱한 균형과도 같은), 해체를, 생명 원리로서의 카오스 그러므로 혼돈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에 가장 가까운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그 자체 작가의 조각을 관통하는 실천 논리로 봐도 되겠고, 평소 작업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최근에 작가는 지역공동체와 함께 하는 예술에 가치를 두고 그 개념을 확장하는 실천방식을 농촌 미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도 이미 수년 전부터 스스로 놀자 학교로 명명한 경주전통문화체험학교를 통해 이런 농촌 미술을, 공동체미술을, 자연 미술 그러므로 어쩌면 생명 예술을 실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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