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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헌/ 빛바랜 흑백사진 속 사람들, 픽셀인들, 그리고 화성인들

고충환

강정헌/ 빛바랜 흑백사진 속 사람들, 픽셀인들, 그리고 화성인들 


강정헌은 판화를 베이스로 개념미술과 설치작업, 그리고 수년 전부터는 영상 작업으로까지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예컨대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것과 같은, 효율적인 영상 작업을 위해 자신을 포함하는 별도의 팀을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 평소 개별성과 독자성 그리고 장르적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이 모든 매체며 표현영역들이 하나의 작품 속에 유기적으로 어우러진다. 모더니즘이 장르적 특수성을 강조한다면, 후기 모더니즘에서 장르 간 경계와 차이의 벽은 눈에 띄게 느슨해진다. 탈장르 혹은 탈형식 현상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탈장르와 탈형식 현상이 보편화된 현실에, 그리고 여기에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가 창작 주체의 덕목으로 간주 되는 현실에 부합하는 작가상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기억을 소환하고 추억을 되불러오는. 중요한 것은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작가의 모든 작업의 저변에는 판화가 있고, 판화가 다른 작업을 견인하고 확장하는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판화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장르와 매체로 네트워킹되는, 그리고 그렇게 자기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판화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작가는 판화를 통해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온다. 되불러온다는 것, 그것은 되찾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찾아진 기억(그리고 추억)이 온전할 리가 없다. 과거와 현재만큼의 차이가 기억(그리고 추억)을 흐릿하게 만들고 애매하게 만든다. 여기에 기억은 과거를 각색하고,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기조차 한다. 바로 기억에 욕망이 매개되면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 자체 기억의 불완전성과 함께 역동성(어쩌면 기억의 창조성?)으로 볼 수가 있겠고, 기억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며 이유이기도 하다. 대개는 흑백 모노톤의 에칭 동판화로 이미지를 구현하고, 여기에 아쿼틴트 기법으로 흐릿한, 애매한, 아련한, 아득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기억을 그리고 추억을 되 불러온 것인 만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정서적 환기력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제작되고 연출된 작가의 판화에 대해서는 흡사 빛바랜 사진을 생각하면 되겠고, 빛바랜 흑백사진의 판화 버전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 그렇다면 작가는 판화를 통해 다만 기억과 추억을 되불러오기만 하는가. 작가의 판화는 동시대성을 담보하지는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 곧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며 지하철에 붐비는 사람들과 같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익명적인 군중을 다루거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작가 고유의 분위기가 여전하다. 특유의 흐릿한, 애매한, 아련한, 아득한 분위기와 함께 군중 속에서 오히려 더 고독한 사람들이며, 익명적인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작가가 현대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롭다. 그 감정에 흐릿한, 애매한, 아련한, 아득한, 아마도 기억의 생리로부터 유래했을 고유의 분위기가 더해진다. 다시, 작가가 자신의 작업 속에 호출한 현대인의 모습은 기억의 생리와 밀접하다. 기억은 현실을 흐릿하고 애매하고 아련하고 아득하게 만든다. 마치 노란 셀로판지를 통해 현실을 보듯, 현실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매개물로 변질시킨다. 그렇다면 디지털이 보편화된 시대에도 현대인은 여전히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로운가. 그도 여전히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 속 유령처럼 흐릿하고 애매하고 아련하고 아득한가. 그렇다. 어쩌면 고독을 끝장내줄지도 모를 각종 첨단의 디지털 장비로 무장한 그들이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소셜미디어가 내 손안에 있는데도, 그리고 그렇게 세상 끝에 있을 익명적인 주체와도 소통할 수 있는데도 오히려 그는 더 고독하다. 

먼지 한 톨처럼 우주 속을 떠도는 사람들. 디지털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어쩌면 당연하게도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는가. 픽셀이다. 디지털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인 픽셀 구조로 환원되고 축소된 인간 형상이라면 표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작가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표현할 수가 있었다. 픽셀 구조로 환원되고 축소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픽셀 구조로 환원되고 축소된 사람들의 초상을 판화로 만들고, 입체로도 만들고, 설치작업으로도 만들고, 영상 작업으로도 만든다. 
판화와 입체는 그렇다 치고 설치작업과 영상 작업을 통해서 재현된 경우를 보자.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천체망원경을 도입한다. 알다시피 천체망원경은 우주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별을 보기 위해서 있는 장비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이 망원경을 통해서 사람을 보게 만든다.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외로운 사람을 보게 만들고, 픽셀 구조로 환원되고 축소된 익명적인 사람을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외로운 사람 그리고 익명적인 사람을 작가는 <우주 속의 먼지 한 톨>이라고 부른다. 마치, 먼지 한 톨처럼, 막막한 우주 속을 저 홀로 떠도는 익명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작가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안한다. 지구와 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가 시간이다. 가까운 별은 시간적으로도 가깝고, 먼 별은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 가까운 별은 해상도도 높고(잘 보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일수록 해상도도 떨어진다(잘 안 보인다). 그렇다면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사람, 심지어 망원경을 통해서 보는데도 픽셀 구조로 환원되고 축소돼 보이는 사람, 익명적인 사람, 그래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먼 별에서 온 사람일까. 여기서 작가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픽셀 인간 그러므로 현대인을 아득히 먼 시간대에서 온 이방인으로, 고대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므로 작가가 호출한 픽셀 인간은 어쩌면 빛바랜 사진 속 유령과는 또 다른, 고대인의 유령이 된다(여기서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미래라는 역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빛바랜 사진 속 유령과도 같은, 현실을 겨우 상기시키는 사진 속의 의심스러운 흔적과도 같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현대인의 알레고리로 봐도 좋을 것이다. 

도시 속을 걷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번엔 픽셀 인간의 또 다른 버전에 해당하는 영상 작업을 보자. 작가는 전작에서 이미 영상 작업을 통해 픽셀 인간을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영상 작업으로 풀어낸 픽셀 인간은 여전하지만, 그 표현 방법이 전작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비디오 화면 속에 픽셀 사람들이 분주하다. 작가는 그렇게 분주한 화면 속 군중을 <걷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꽤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주제고 소재라서 그런지 낯설지는 않다. 어쩌면 평범한 소재가 친근하기조차 하다. 다만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픽셀 인간으로 표현된 것이 낯설게 하기와 함께 동시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나 할까. 
당연히 영상 자체로 구현된 이미지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반전이 있었다. 영상으로 구현된 이미지가 아니었다. 영상 자체는 실사 그대론데, 정작 픽셀 구조로 환원돼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영상과 시각 그러므로 관객 사이에 매개체가 있었다. 돋을새김 된 단위구조가 반복 병렬된 패턴을 만드는 투명한 유리판이 영상과 관객 사이를 매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객은 그 유리판을 통해 왜곡된 이미지를 보게 되고, 그렇게 화면 속 이미지가 픽셀 이미지로 환원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픽셀 이미지 자체는 디지털이미지다. 그런데, 정작 그 디지털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매체, 그리고 여기에 최초의 이미지를 마치 디지털 미디어에서처럼 변환해놓고 있기조차 하는 미디어는 아날로그 미디어다.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서 디지털이미지를 구현하고 변환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사용 방법에 대해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때에 따라선 디지털보다 새로운) 아날로그의 사용 방법에 대해서 제안해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지털이미지로 변환돼 보여서 그런지, 화면 속 움직이는 사람들이 덜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는 한다. 역시 걷는 도시인을 즐겨 그린 줄리안 오피의 그림과 영상 속 주인공들처럼 발랄한 느낌을 준다면 지나친 감정의 비약이라고 할까. 

화성을 탐사하는 사람들. 다시 판화 얘기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판화 그러므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결과보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예술로 생각하고 예술가로서 사는 삶 자체와 전체가 이미 예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정예술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화가 뭔지 알고 난 연후에라야 비로소 판화를 할 수 있다고, 그런 판화라야 최소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예술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과 함께, 근본주의자로서의 작가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주지하다시피 판화는 나무와 동판 같은 중간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 매개체에 이미지를 새겨 종이에다 대고 찍어낸다는 점에서 간접성이 특징이다. 종이에다 대고 직접 그림을 그리는 회화의 직접성과는 비교된다. 그런 만큼 판화에서 결정적인 것은 종이다. 그리고 종이 곧 판화지는 목화를 원료로 생산된다. 그래서 목화를 직접 재배해 얻은 섬유질을 이용해 판화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목화씨를 재배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과정, 그렇게 채취한 목화로부터 섬유질을 얻는 과정, 그리고 섬유질로 판화지를 만드는 과정을 낱낱이 실천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가 하면, 판화에서 종이만큼이나 결정적인 것이 프레스기다. 판화는 종이가 프레스기를 통과할 때의 압력으로 이미지를 얻는데, 순진해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도대체 그 작동원리가 궁금하다. 종이가 재료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면, 프레스기는 원리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래서 목재 프레스기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작가는 나무로 직접 프레스기의 세부 그대로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부품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흡사 해체와 재구성 사이에 있는 상태 그대로를 전시하면서 <화성탐사선>이라고 부른다. 
화성탐사선? 웬 화성탐사선? 실제로도 그 놓인 꼴이 달착륙선이나 화성탐사선을 연상시킨다.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일까. 무관하지는 않겠으나,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이유와 해명이 있다. 작가는 예술가를 아마도 화성인이라고 생각한다. 별종이라고 보는 것인데, 실제로도 어느 정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정작 작가는 마치 화성에 사는 삶처럼 열악한 현실에 방점을 찍고 있는데,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성을 탐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유별난 별세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치면, 작가의 생각이 현실성을 벗어난 무모한 상상력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진즉에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라고 중얼거렸던 보들레르의 혼잣말 속에 예술가의 전형이 들어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술가란 말하자면 언제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아마도 그렇게 꿈을 꾸는 사람들, 이상주의자로서의 예술가상을 화성을 탐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은연중 예술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입장을 발설한 경우로 보이고, 예술과 예술가의 알레고리를 설치작업으로 풀어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응노와 강정헌. 이번 전시는 이응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을 오늘의 미술을 통해 공감하고 교감해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기획되었다. 시공간을 넘어 이응노의 예술혼과 동시대 작가들이 만나는 접점을 형식 실험하는 한편, 이응노의 예술이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재생되는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살피는데 기획의 의도가 있다. 
그 하나가 미술관 전면에 영상을 프로젝션 매핑한 미디어파사드 <이응노, 하얀 밤 그리고 빛>이고, 또 다른 하나가 미술관 내에서 열리는 <유연한 변주>다. 미디어파사드 작업을 통해 작가는 예술을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로(하이데거는 하나의 세계를 여는 행위이며 순간으로 표현하기도 해),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로 해석했는데, 그 해석 그대로 이응노의 예술에 대한 관념과 실천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평소 작가의 예술가적 아이덴티티로 치자면 실내 전시가 더 잘 예시해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실제로도 관 내외 전시로 구분한 것이 그렇다), 실제 전시에서도 그렇게 연출했지만, 특히 작가의 <걷는 사람들>과 이응노의 <군상>과의 매칭이 기획 의도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앞서 봤듯이 작가가 현대인을 보는 시각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롭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람들은 군중 속에 있을 때 더 외로워 보인다. 어쩌면 자신의 외로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익명성 뒤에 숨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강정헌이 그린 군중의 프리즘을 통해 보면, 이응노가 그린 군상도 왠지 고독하고 쓸쓸하고 외롭게 보인다. 어쩌면 글쓴이의 주관적인 감정일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이응노의 예술혼이 강정헌의 작업 속에 계승되면서 살아 숨 쉬는 계기로 치자면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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