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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 익명성과 개별성,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고충환

문민/ 익명성과 개별성,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현대인에게 가장 친근한 도형으로 치자면 사각형일 것이다. 주거환경도 사각형이고 생활 도구도 사각형이다. 사각형 아닌 걸 찾아보기가 어렵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각형이야말로 현대인의 삶의 질을 관통하는, 그의 삶의 행태에 대해 말해주는 전형적인 아이콘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도 자연주의자 훈데르트바서는 곡선을 자연의 선으로, 그리고 직선을 문명의 선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직선으로 축조된 사각형은 문명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문명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전형이랄 만 하다. 

이처럼 온통 사각형 속에 살다 보면 미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마저 사각형에 길들여질 것만 같다. 조각가 문민은 그렇게 사각형으로 의식화된 사람들의 초상을 사각형으로 축조된 인체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그리고 그들을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사각형에 길들여진 의식 그러므로 사각형으로 축조된 의식이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사각형은 단순한 도형 이상이다. 그건 틀을 상징한다. 그리고 틀은 사회와 제도가 개인을 제약하는 규범, 상식과 합리, 도덕과 윤리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의 계기들을 표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틀에 자신을 맞추는 삶을 산다. 

그러므로 사각형으로 축조된 작가의 인체 조각은 이런저런 틀에 자신을 맞추는 삶을 사는, 어쩌면 억압된 삶을 사는,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을 잃는 삶을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표상한다. 여기서 자신을 잃는 삶이란, 일반적인 표현으로 치자면 개성을 상실한 삶이다. 그리고 상실감은 현대인의 전형적인 징후이며 증상일 수 있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지표일 수 있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조각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적 규범(사각형 그러므로 틀로 표상된) 속에서 자신을 잃은 사람들이며, 개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조각이 아닌 회화를 시도한다. 본격적인 회화라기보다는 드로잉이나 에스키스에 가까운 것으로서, 표현영역에 대한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볼 때 매체가 달라지고 장르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정체성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 전작과의 연장선에 있고, 전작에서의 주제 의식(사각형으로 표상된 사회적 틀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삶을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확장하고 심화시키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특이한 것은 종이에 스템핑 기법이 적용되고 있는 점이다. 스템핑 기법? 옛날에 떡살 문양에서처럼 나무와 같은 단단한 지지체에다가 특정 문양을 조각한 연후에 종이에 대고 도장 찍듯이 그 이미지 그대로 찍어내는 것이다. 중간 매개 과정으로 판이 도입된다는 점에서 엄밀하게는 회화라기보다는 판화에 가깝고, 최소한 판법을 응용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경우에 보통 판화에서와 같은 에디션이 없는 모노 프린트(일품 회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회화의 성질을 견지하고 있기도 하다. 정리를 하자면, 매체 특수성으로 볼 때 종이에 스탬핑 기법을 적용한 작가의 근작은 에디션이 없는 모노 프린트로서, 판화와 회화 사이에 위치한 경우, 판화와 회화를 접목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사정이 그런 만큼 판이 필순데, 작가의 경우에 판은 단단한 나무 대신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성질의 실리콘이 도입된다. 작가의 전작을 보면 사각형으로 축조된 철물 조각(철과 스테인리스스틸을 포함하는)의 표면에 비정형의 얼룩과 같은 특유의 질감(현대인의 상처, 외상, 트라우마를 질감으로 표현한)을 볼 수가 있는데, 그 표면 질감 그대로 실리콘으로 떠낸 것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감의 실리콘 도장이 판으로 만들어지고 나면, 그 판을 종이에 대고 찍어낸 것이다. 여기서 실리콘 판의 부드러운 성질이 중요한데, 판을 종이에 대고 찍을 때 힘 조절을 통해 우연한 효과와 다양한 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일반적으로 판화는 프레스기로 찍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다르다). 아마도 사람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차이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각각 지문을 위한 판과 귀를 표현한 판이 만들어진다. 그렇다고는 하나, 작가의 작업에서 지문을, 그리고 귀를 식별해내기란 쉽지가 않다. 귀보다는 지문이 더 그런데, 실리콘 판 표면에 난 비정형의 질감으로 대신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지문이든 귀든 실질적인 모티브로서보다는, 이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메시지를 보면, 지문은 판에서의 표면 질감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차이를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귀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른데, 아마도 신체 중 가장 얇은 부분이 귀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의미론적으로 그런데, 보통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 남들이 하는 말에 쉽게 혹하는 사람, 그러므로 어쩌면 남들이 하는 말(때로 상식과 정의의 이름으로 제도가 개인에게 강요해오는 규범?)에 자기를 맞추는 삶을 사는 사람을 귀가 얇다고 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귀는 귀가 얇은 현대인의 삶의 질을 풍자한 것이면서, 동시에 때로 귀를 닫고 자기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문으로, 개성을 간직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권고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부드러운 질감의 실리콘 판을 이용해 사람들의 얼굴 형상을 찍어낸다. 얼굴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그림에서 얼굴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이목구비도 세부도 생략된 채 대체적인 윤곽이 다름 아닌 얼굴 형상임을 암시하는 식이다. 얼핏 보면 무분별한 잡석 덩어리처럼 보이는데, 조각가답게 드로잉 임에도 조각을 연상시키는 덩어리 감이며 양감이 여실하다.
 
그렇게 암시되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정체성을 표상한다. 그리고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이처럼 이중적인 정체성은 각각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열된 현대인의 초상이 반영된 것이다. 여기서 페르소나는 사회적 주체, 제도적 주체에 해당한다. 페르소나란 말 자체가 가면이란 의미에서 온 것이듯 가면 주체에 해당한다. 그렇게 현대인은 사회적 삶을 살기 위해 이런저런 가면을 써야 한다. 가면으로 자기를 숨기고 포장하는 것인데, 그렇게 가면 뒤에 숨은 또 다른 자기가 아이덴티티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나를 본 적도 알 수도 없다. 때로, 가면 뒤에 너무 오래 숨어 있으면 그렇게 또 다른 주체가 있었다는 사실마저 까마득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아이덴티티는 너에게도 낯설고, 때로 나 자신에게마저 생경해질 수 있다. 

작가는 각각 흑백 모노 톤의 절제되고 금욕적인 느낌의 얼굴 시리즈와 이런저런 컬러로 알록달록한 다채로운 표정의 얼굴 시리즈를 제안한다. 여기서 전자가 분열된 주체 중 페르소나에 해당하고, 후자가 아이덴티티에 해당한다. 실제로도 흑백 모노톤의 시리즈 작업이 그 표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인상으로 익명적인 가면을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익명성 뒤에 숨은 현대인의 초상을, 일종의 가면 초상을 표상할 것이다. 이에 반해 컬러로 표현된 얼굴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다채로운 표정으로 가면 뒤에 숨은 개성을 상징하고, 가면 주체(그 자체 익명적 주체와 동일시되는)에 의해 억압된 개별적 주체를 상징한다. 

이처럼 각각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열된 현대인의 이중 초상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아마도 익명성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숨기는 현대인의 삶의 질을 풍자하는 한편, 그 익명성의 가면을 깨고 나와 개성을,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회복해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주문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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