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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영/ 우리가 사는 도시는, 지금, 공사 중

고충환

이덕영/ 우리가 사는 도시는, 지금, 공사 중 


공사 현장은 마치 우리 사회가 공사장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고 느끼게 한다(작가 노트). 작가 이덕영은 공사 현장에 관심이 많다. 구획된 땅과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진 구덩이, 널브러진 철근들, 거푸집들, 얽히고설킨 전선 다발들, 크고 작은 파이프들, 사다리와 기중기들, 건축 중인 크고 작은 건조물들, 그리고 알만하거나 알 수 없는 오브제들로 어수선한 공사장이 역동적이고 어지럽다. 조금만 눈을 돌려 봐도 공사장은 쉽게 눈에 들어오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도시와 사회가 온통 공사 중인 것 같고 공사장 속 같다.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한국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도시는, 지금, 공사 중이다. 

한국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진단은 동시에 한국의 사회적 현실에 대해 느끼는 작가의 감정 곧 징후며 증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 징후와 증상의 이면에는 급조된 근대화의 과정과 재개발 현장 그리고 삽질 공화국의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국은 급조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동안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을 사상 최대의 지상과제로 삼아 내달려왔다. 그렇게 내달리면서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뒤에 버리고 갔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것들에는 사람도 있는데, 잉여 인간이 그들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그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자신들일 것이다. 머리가 없는 사람은 자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머리가 없는 목에는 튜브가 달려있는데, 아마도 제도가 주입하는 이념(작가는 정보라고 했지만,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을 흡수하는 통로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없다. 대신 제도적 주체며 사회적 주체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제도가 주입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삶은 주체적 삶이라기보다는 도구적 삶이다. 그 도구적 삶을 다했을 때, 효용 가치를 다했을 때 나는 사회로부터 버려진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에서 일말의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그 비장감을 뒤로 한 채, 작가는 그렇게 폐기된 사람들을 무슨 망가진 기계라도 되는 양 무미건조하게 그려놓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비장하게 다가온다. 그 무미건조한 비장감이 핑크 플로이드의 애니메이션 영화 <벽>에 나오는 인간개조공장처럼 차갑고 무감각하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는 머리 없는 사람들과 함께 거의 유일하다 싶은 동물이 등장하는데, 비둘기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는 도구적 가치를 상실한 사람들을 잉여 인간으로 지목하는데, 마찬가지로 비둘기를 유해동물로 지목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잉여 인간은 그 처지가 비둘기와 같고, 다시, 그러므로 작가는 비둘기를 통해 다름 아닌 잉여 인간을 반복하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문구에는 잉여 인간을 위한 동정심은 없다는 몰인정이 깔려있고, 비둘기 스스로 먹이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권장에는 가난은 하늘조차 구제할 수 없다는 비인간이 어른거린다. 실제로도 작가는 부재 하는 머리 대신 비둘기 머리를 한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는데, 아마도 비둘기와 잉여 인간의 이러한 동류의식이며 윤리적 연대감(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윤리적 타자)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의 그림에서 머리가 없는 인간은 상실을 의미한다. 결핍을 의미한다. 나는 나를 상실했고, 나라는 주체를 상실했다. 이 도저한 상실감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상실감은 내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강력한 지표다. 그 지표의 쌍 개념이 과잉이다. 과잉이 있으면 상실이 있고, 상실이 있는 곳에 과잉이 있다. 물신(과잉)이 곧 걸신(상실)이다. 상실과 과잉은 야누스의 두 얼굴과도 같다. 그렇게 과잉된 생산과 과잉된 정보, 과잉된 이념과 과잉된 욕망이 상실의 사회를 낳는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어수선한, 어지러운, 기계음이 귀를 찢는, 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장의 살풍경이, 그리고 마치 초연한 듯 그 살풍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구거리는 비둘기가 있는 풍경이 상실된 사회의 알레고리 같고, 포화상태의 상실감이 임계점에 이른 과잉된 현실의 우화 같다. 


그렇게 작가는 과잉을 통해 상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잉은 범람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별도 제작한 <범람상태>가 그렇다. 과잉을 통해 상실을 말했던 지금까지의 단편적인 작업들의 종합 편으로 봐도 되겠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는 사람들을 재단한다. 그렇게 머리가 없는 사람들의 목에 튜브를 박고, 그 튜브를 통해 이념을 주입 시키고 정보를 주입 시킨다. 어쩌면 정보 자체가 이미 이념이다. 아니면 정보의 얼굴을 한 이념? 그리고 그는 제도가 주입한 이념과 정보 그러므로 이념_정보를 자양분 삼아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로서의 삶을 묵묵히 수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과부하가 걸리면 그는 폐기 처분된다. 경제적 가치며 효용적 가치를 다했을 때 제도로부터 잉여 인간으로 지목되는 것과 같다. 그림에서 작가는 과부하 걸린 게이지의 침이 견디지 못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처럼 무감각하고 몰인정한 사회적 현실을 암시한다. 제도는 기계다(질 들뢰즈). 그리고 기계는 알다시피 감정이 없다. 

한편으로 제도가 주입하는 이념_정보는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건축한 모든 것, 이를테면 집, 도시, 사회, 세상과 환경, 그리고 심지어는 자연마저 어지러운 전선 다발과도 같은 튜브를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것이 마치 인터넷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사람이, 집이, 도시가, 사회가, 세상과 환경이, 그리고 마침내 자연이 제도가 주입한 이념_정보를 묵묵히 수행하는 기계적인 삶을 영위한다. 앞서 제도는 사람을 재단한다고 했다. 제도는 나아가 자연도 재단하는데, 가지치기와 모양내기가 그렇다. 자연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모양으로 재단되어야 하고, 효율적인 외장으로 도시의 그것과도 같은 기하학적 형태가 주어진다. 그렇게 효율적인 형태로 재구조화된 자연이 기하학적 도시와 어우러지고, 그렇게 재부팅된 도시환경 속을 기능적인 사람들이 기계처럼 살아간다. 

고도로 문명화된 첨단사회가 열어놓는(어쩌면 이미 열린) 유토피아? 아니면 감시사회와 전자정부 그리고 어쩌면 그림자 정부의 암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디스토피아? 아니면 유토피아의 얼굴을 한 디스토피아? 그리고 마침내 사람이, 집이, 도시가, 사회가, 세상과 환경이, 그리고 종래에는 자연마저 과부하가 걸리면 게이지가 폭발하면서 지구 종말의 날이 열리는가. 호시탐탐 상징계의 전복을 노리던 실재계의 귀환(자크 라캉)이 도래하는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슬라보예 지첵)을 맞이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그림 속 사람들이, 집이, 도시가, 사회가, 세상과 환경이, 그리고 자연이 얽히고설킨 전선 다발처럼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튜브에선 제도가 주입한 이념_정보가 흘러 다니는데 먹물 같고 암울한 비전 같다. 그리고 종래에는 암울한 비전 같은 먹물들이 차고 넘쳐 사람들 위로, 집 위로, 도시 위로, 사회 위로, 세상과 환경 위로, 그리고 자연 위로 범람한다. 그리고 암전. 페이드아웃. 아듀 지구. 아디오스 인간. 여기서 불현듯,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수선하고 싶다던, 그러므로 어쩌면 돌이키고 싶다던 발터 벤야민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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