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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우연과 필연, 인연과 연기

고충환

이경희/ 우연과 필연, 인연과 연기 


현대판화는 현대미술과 마찬가지로 그 크기에 제한이 없지만, 전통적으로 판화는 소형이었다. 작은 화면 속에 정밀하고 오묘한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판화 고유의 미덕이었고, 이런 미덕을 실현하고 있는 판화가 특히 메조틴트와 우드인그레이빙이었다. 작은 화면 속에 정밀한 세계를 창출해야 하는 만큼 고도의 집중력과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요구되고, 그런 만큼 작가층이 두텁지는 않은 편이다. 특히 우드인그레이빙은 기법을 구사하는 사람도 적거니와, 밀도감이나 완성도 면에서 이경희 작가에 필적하는 다른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게 작가는 우드인그레이빙 판화를 매개로 한 자기만의 세계를 창출하는 일에 매진해왔고, 상당한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작가는 답답함을 느꼈다. 손바닥만 한, 때로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자기 속에 잠자고 있을 또 다른 잠재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복제를 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우드인그레이빙 판화를 부분으로 조각내 편집하고 콜라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고, 여기에 마블링 기법에 의한 비정형의 얼룩이, 그리고 작가가 직접 그려 넣은 이미지가 가세한다. 그렇게 확장된 화면 속에 알만한 이미지와 아리송한 이미지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를테면 깨어진 시계, 허공에 부유하는 시계 판의 숫자들, 진주목걸이를 피처럼 흘리는 심장, 용의 비늘과 공작의 깃털, 스핑크스, 나비와 잠자리 날개, 꽃과 식물의 넝쿨, 썩은 나무둥치, 해골과 여인, 불을 뿜는 용, 향기를 그리움처럼 피워올리는 커피잔, 카트와 구두와 모자, 새와 가방, 격자무늬 바닥과 탁자 위에 놓인 주사위에 이르기까지 신화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농담과 선염법에 의한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퇴적된 암산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은 광활하고 아득한 풍경이 배경화면으로 펼쳐진다. 

그렇게 확장된 화면이 이전 작업에 연이어지면서도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드인그레이빙 기법과 마블링 기법, 그리고 여기에 프로타주 기법이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적인 화면으로 콜라주 된 풍경이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 기법을 떠올리게 만들고, 가변적이고 임의적인 이미지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정형의 얼룩과 패턴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위의 풍경을 보는 것 같고, 아마도 억압된 욕망과 무의식의 언어 그대로를 받아 적었을 작가의 내면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한편으로 확장은 화면에 머물지 않는다. 화면을 넘어 오브제 설치작업을 매개로 한 공간확장을 꾀한다. 이를테면 주름관 형태의 알루미늄 파이프, 알루미늄 막대, 마구 엉킨 색실과 하늘거리는 천 조각, 면티에서 떼어낸 장식문양, 색색의 전선 다발, 물놀이 공, 고무장갑, 붓, 앉은뱅이 사다리, 화분과 마른 식물 장식, 나뭇가지와 넝쿨, 전기 소켓, 마스크, 구슬 목걸이, 저고리와 드레스, 새 깃털, 마스크를 쓴 카니발용 가면, 그리고 철사 망과 같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가 있을까 싶은 오브제들이, 어쩌면 잡동사니로 봐도 될 오브제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의 형상을 만든다. 자기 내면과의 조우? 또 다른 자기와의 조우? 아마도 자기 속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자기와의 예기치 못한 만남이며, 우연한 맞닥뜨림으로 봐도 되겠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세계를 여는 일이라고 했다.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사건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만의 세계와 우주의 창출자다. 그리고 화면은 그 세계와 우주가 창출되는 바탕이고 장이다. 그 바탕이며 장 위에 작가는 인연과 연기의 세계를 부려놓는다. 존재하는 것치고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우연과 필연, 그리고 어쩌면 서로 모르는, 나와 너 사이에서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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