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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주/ 버려진 것들, 그리고 빈 의자와 흰 그림자

고충환

문혜주/ 버려진 것들, 그리고 빈 의자와 흰 그림자 


작가는 버려진 것들에 관심이 많다. 패트병, 물병, 우유 팩, 화분, 항아리, 플라스틱 박스, 포도주병, 일회용 컵, 알루미늄 캔 등등. 일상의 주변머리에서 발견한 것들이고, 재개발현장에서 채집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처럼 버려진 것들에 끌리는 것일까. 관심은 애정이다. 작가는 버려진 것들에 끌리고 동질감을 느낀다. 비록 버려진 것들이지만, 한때 이런저런 사람들의 손길을 받았을, 누군가의 눈길이 맞닿았을, 그 혹은 그녀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을 물건들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혹은 그녀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기쁨과 슬픔, 분노와 한숨이 밴 영물들이다. 한갓 공산품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물신?)으로 변질 되는 것인데,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에 버려진 것들이라는 운명적인 사건이 또 다른 전제 조건이 된다. 결국 사물로 하여금 변질을 초래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중재되지 않으면 영물도 없고 물신도 없다. 

그렇게 작가는 버려진 사물들에서 사람을 본다. 버려진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사람들을 본다. 버려진 사람들? 영물이라고 했고, 물신이라고 했다. 물신 곧 페티시즘은 모든 것을 다만 물질적인 가치로만 환원하는 태도를 말한다. 기왕에 물질적인 것은 물론, 한갓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정신적인 것들, 감정적인 것들마저 물질로 환치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환치된 물질적 가치를 상실할 때 사물들은 버려진다. 사람도 마찬가지. 사람은 존재 자체가 이미 의미이며 가치이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사람 역시 물질적 가치 곧 경제적 가치며 상품적 가치를 상실할 때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다. 그렇게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속된 말로 잉여인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사람을 물질적 가치로 환원하는 사회, 경제적 가치며 상품적 가치로 환치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잉여인간들이다. 

그렇게 작가는 버려진 사물들에서 나를 보고 너를 보여준다. 버려진 사물들과 자신을 그리고 사람들을 동일시하는 것. 그 처지는 격자 형태의 철제 맨홀 구조물 사이로 삐죽 내민 이름 모를 들풀에서도 확인된다. 이름 모를 들풀에 이름조차도 없는 사람들의 처지가 오버랩 된다. 이름 대신 신분과 직책으로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호명되는 사람들의 처지가, 그러므로 사실상 이름을 상실한 사람들의 현실이 중첩된다. 그렇게 버려진 사물들에 투사된 작가의 관심은 상실적이다. 그리고 상실감은 그 혹은 그녀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강력한 징후이며 증상일 수 있다. 유년을 상실하고, 추억을 상실하고, 꿈을 상실한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의 사회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눈에 붙잡힌 버려진 사물들은 사실은 상실된 삶을 사는 현대인의 유비적인 초상일 수 있다. 작가가 굳이 버려진 사물들을 소재로 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제작 과정을 보면, 작가는 흙가래를 말아 올려 쌓으면서, 일일이 손으로 빗으면서 차용된 오브제 본래 그대로의 크기와 형태를 만든다. 일일이 손으로 빗어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조소에 가깝고, 더욱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유약 마감을 생략한 채 백토 그대로의 맨살을 드러낸 것이 조각(테라코타?)에 가깝다. 세라믹이지만 보통 세라믹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것이 도조로 범주화할 만한 작업이다. 여기서 일일이 손으로 빗으면서 형태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섬세한 손자국을 남기는 것이 중요한데, 작가 자신과 흙이 교감하는 생생한 과정을 체화한 것이며, 흙에 자기가 투사되고 이입 되는 사건을 증언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때 그 물건과 같이했을 부재 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체취를 되불러오는, 그러므로 한갓 사물을 영물로 탈바꿈시켜주는 일종의 주술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 그렇게 빗어 만든 형태의 표면에 구멍을 내어 그것들의 버려진 처지를, 불구성을, 가치 없음을 강조하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가치를 상실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덧입는다. 바로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쩌면 버려진 것, 불구한 것, 가치 없는 것에 오히려 진정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같이 백토 그대로의 똑같은 맨살을 드러낸 것이 이름 없는 주체들, 익명적인 주체들, 그럼에도 알고 보면 저마다 다른 개별주체들을 암시한다. 그렇게 작가의 세라믹 작업은 버려진 사물들을 소재로 한 일종의 사물 초상화를 매개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유년의 놀이를 소환한다. 종이에 손바닥을 대고 연필로 가장자리 선을 따라 그리면 손바닥 그대로의 본을 얻을 수가 있다. 무심코 한 놀이지만, 작가는 이 놀이에 존재확인행위이며 존재증명행위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한다. 무슨 그런 거창한 의미를, 이라고도 하겠지만, 사실은 말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어른의 시각에서 볼 때 그 놀이는 자기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초보적 수준의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문제는 한갓 놀이에 그런 존재론적 의미를 작가가 부여했다는 것이며, 그 놀이가 성인이 된 이후 작가의 작업에 인문학적 배경이 되고 있는 존재론적 관심사가 발아되는 계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작업은 일상에, 재개발현장에, 그리고 때로 자기 내면에 잠재된 존재론적 의미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증명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놀이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은 상대적으로 더 존재론적이고 자전적이다. 유년에 이어 자기 자신을 소환하는데, 빈 의자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 의자는 비어있을 때조차 사람을 상기시킨다. 아예 빈 의자 자체가 사람의 체형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체형에 대한 연구가 찾아낸 자연스러운 형태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의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이번에는 손바닥 대신 의자 그대로의 본을 얻는다(연필 드로잉). 그리고 그 본을 따라 각각 반투명 천에 바느질하는 과정을 통해서 의자의 실루엣 형상(섬유)을, 그리고 세라믹으로 된 입체 구조물 형상의 의자를 만든다(조각). 빈 의자로 대리되는 존재의 세 층위 혹은 세 가지 버전으로 볼 수도 있겠다(작가의 경우와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지만, 여기서 개념미술가 조셉 코주스의 <세 의자> 작업을 떠올리게도 된다). 그렇게 작가는 그리고 존재는 빈 의자로 대리된다. 

여기에 작가는 또 다른 대리 존재를 불러온다. 바로 그림자다. 그런데, 흰 그림자다. 유약 마감을 생략한 채 백토 그대로의 맨살을 드러낸 세라믹 작업과 운을 맞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흰 그림자는 검은 그림자보다 더 텅 비어 보이고, 더 공허해 보인다. 검은 그림자보다 더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의 모호한 경계(허구적 실체?)에 근접하고 부합하는 것도 같다. 아마도 작가로 하여금 검은 그림자 대신 흰 그림자를 착상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한지를 실 삼아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는 과정을 통해서 흰 그림자를 만드는데, 세라믹 작업에서 한 땀 한 땀 손자국을 통해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에 비교되는,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또 다른 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일상 속 오브제 중 특히 버려진 물건들에서 자기를 보고 타자를 본다. 그리고 빈 의자와 흰 그림자를 통해서 그 자기와 타자의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의 애매한 경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손바닥 그림 속에 손은 있는가, 그리고 흰 그림자 속에 존재는 있는가, 라는 존재론적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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