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판화, 회화의 확장과 시대정신의 표상_1970년대를 중심으로

고충환

판화, 회화의 확장과 시대정신의 표상_1970년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현대판화가 도입된 것은 50년대 말 몇몇 판화에 뜻을 둔 작가들에 의해서 가장 원시적인 방법의 도입으로부터 시작되며 그러한 출발은 다분히 주한 외국 대사관의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마련된 오리지널 판화전에 의해서 자극되어진 결과로 보고 있다(판화의 기초개념, 윤명로, 공간, 1975.5. p.29). 


 한국에서 현대판화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을까. 한국현대판화의 시점 논의와 관련해 윤명로의 언급은 결정적이고 함축적인 사실관계를 제공해준다. 그 사실관계를 확인해보기 전에 살필 것이 현대판화에 대한 개념이다. 현대판화란 무엇인가. 현대판화란 현대성을 담보하는 판화를 말한다. 세부적으론 현대적인 주제의식과 현대적인 감각을 반영하는 판화를 일컫는 것이지만, 보다 일반적인 경우로는 처음부터 예술작품을 의도하고 제작된 판화를 말한다1). 

 그렇다면 그전에 판화는 제작되지 않았는가. 한국에서 현대판화의 전사는 없는가. 물론 있다. 비록 목판화는 아니지만, 불교의 경전을 새긴 목판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신라 경덕왕 10년인 서기 750에서 751년경 제작 추정)은 현재 세계 최고의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목판화의 경우로는 불교의 경전을 그림으로 도해한 불교 변상도가 전해진다. 주로 고려 시대에 제작되었으며, 서기 1007년 개성의 총지사에서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 변상도가 국내 최고의 목판화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내용상 유교의 <효경>에 해당하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줄여서 부모은중경) 변상도2)가 유명하다. 유교의 경우로는 주로 조선 시대에 제작된 삼강오륜과 행실도 등 책에 삽입한 전적 판화가 전해진다. 

 이외에도 책의 표지를 장식한 능화판, 요새로 치자면 편지지의 밑그림으로 고유의 문양이나 내용을 판화로 새겨 넣은 시전지(예컨대 1905년 해강 김규진이 석판화 기법으로 난초를 그려 넣은 시전지와 같은),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제작된 신문 삽화(예컨대 1932년 이상춘이 목판화 기법으로 제작한 조선일보 삽화 그림 <질소비료 공장 1>과 같은), 지도와 문자도를 비롯한 상당한 민화 그림이 판화로 제작되는 등 종교적 교화와 교육, 민중계몽과 일상을 가릴 것 없이 판화가 폭넓게 제작된 경우를 확인해볼 수가 있다. 이 판화들은 편의상 생활판화3)로 범주화되며, 처음부터 생활 속의 실제 쓰임새와는 거리가 먼 예술판화와는 구별된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제작된 판화를 계몽판화로 일컫기도 한다. 



한국현대판화의 산실, 한국판화협회와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윤명로는 50년대 말 몇몇 판화에 뜻을 둔 작가들에 의해서 가장 원시적인 방법4)의 도입으로부터 현대판화가 시작됐다고 했는데, 이 시기 주목되는 작가가 이항성이다. 이항성은 1956년 광화문 근처에서 미술교육출판사를 경영하면서 계간지 <신미술>을 발행했으며, 이봉상과 함께 최초로 석판인쇄에 의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제작하기도 했다. 주로 교정기를 이용한 오프셋 인쇄기법을 응용해 석판화를 제작했다. 석판화란 원래 석회석에 기름기가 있는 묘화 재료를 사용해 찍어내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판화 기법이지만, 그는 석회석 대신 아연판을 이용해 판화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연판과 알루미늄판이 석판의 대용으로 널리 사용돼 왔지만, 이후 아연판은 공해 문제와 비싼 가격 때문에, 여기에 일정량의 에디션을 찍어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 사용이 점차 기피 되었는데 반해, 알루미늄판은 현재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항성은 1958년 아연판으로 제작한 석판화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이러한 기법으로 자신의 판화 외에도 이상욱, 김정자, 유강렬 등의 작품도 찍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경우로 보기는 어렵지만,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판화 공방의 최초 사례로 봐도 되겠다. 그의 석판화는 전통적인 먹그림과 붓글씨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편이며, 해먹의 번짐 효과를 극대화해 석판화 고유의 특징을 살린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석판화로 제작한 <다정불심 多情佛心>으로 미국 신시내티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현대컬러리토그래피전>에 입상했으며, 이러한 사실에 힘입어 <한국판화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중앙공보관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판화협회전>에는 이항성을 비롯한, 유강렬, 이상욱, 김정자, 최영림5), 정규6), 임직순, 장리석, 변종하, 차혁, 박성삼, 박수근, 최덕휴, 전상범, 이규호 등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는데, 한국현대판화의 1세대 작가들로 볼 수가 있겠다. 흥미로운 점은 이항성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우드컷으로 판화를 제작하고 있는데, 본격적인 판화제작이 어려운 당시의 열악한 여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랜 목판화의 전통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공감이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이후 창립회원 외에 김봉태, 김종학, 윤명로, 서승원, 송번수, 한용진, 김훈, 강환섭, 김상유, 배륭, 한묵 같은 작가들이 합류했다. 작가들 가운데 특히 김봉태의 경우가 주목되는데, 석판화로 제작한 <작품 1963-9>가 그렇다. 작품이 제작된 1960년대 초반 당시 국내화단은 소위 뜨거운 추상으로 형용 되는 앵포르멜 운동이 지배적이었는데, 작가는 마대와 비닐 등 일상소재 위에 잉킹을 하고 판화로 찍어낸 콜라그래프 판화와 그 위에 서체를 더한 석판화를 제작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일상에서 차용한 소재의 표면 질감 그대로를 되살려낸 물질성이 역시 내면적인 파토스를 물질성에 투사해 표현한 앵포르멜의 회화적 경향성(예컨대 타피에스7)에서 보는 것과 같은)과도 통한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주한 미공보원을 통해 흘러나온 실크스크린 재료와 기법이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충동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배륭과 강환섭 같은 작가들이 실크스크린 판화를 본격적으로 수학해, 이후 실크스크린 판화의 붐을 조성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시중에는 상업적 목적으로 시설된 실크스크린 공방이 몇 군데 자리하고 있어서 발주에 의한 제작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덧붙이자면 배륭의 실크스크린 판화에서는 현란한 색면 대비 효과와 함께, 문자의 도입으로 인해 팝아트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윤명로는 한국현대판화의 시작이 주한 외국 대사관의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마련된 오리지널 판화전에 의해 자극 받은 결과로 보고 있는데, 1958년 <국제판화전>(국립박물관), 1958년과 1960년 <서독 현대판화전>(덕수궁미술관), 각 1959년, 1966년, 1968년에 연이어 열린 <최근의 미국 판화전>(주한 미국 공보관) 같은 전시들이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주로 일본과 일부 유럽 유학파들을 통해 현대판화가 시도되었다면(예컨대 각 1934년과 1940년 최영림의 일본판화협회전 입선이나, 1933년과 1936년 배운성의 제2회 바르샤바 세계 목판화전과 베를린 방소비 만국 목판화전 수상과 같은), 한국 현대미술이 미군의 군홧발에 묻어 왔다는 박서보의 회고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제 그 사정은 달라졌다. 미군을 통해 흘러나온 <라이프지>와, 일제를 통해 유입된 <미술수첩>이 앵포르멜과 타피에스 그리고 실크스크린 판화와 같은 현대미술을 위한 살아있는 교과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판화협회는 정기적인 협회전과 함께, 1968년에 처음 개최된 이후 1975년까지 존속한 신인 공모전을 통해서 송번수, 이승일, 김진석, 김태호, 백금남, 이인화 같은 차세대 판화작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8년에는 <한국판화협회>를 탈퇴한 일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창립된다. 신세계화랑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전>에는 강환섭, 김민자, 김상유, 김정자, 김종학, 김훈, 배륭, 서승원, 유강렬, 윤명로, 이상욱, 전성우, 최영림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을 포함한, 한국현대판화의 2세대 작가들의 등장으로 볼 수 있겠다. 작가들 가운데 배륭이 포드 재단의 초청으로, 윤명로가 록펠러 재단의 초청으로 외유 후 귀국해 전성우와 함께 1970년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의 산파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의 창립에 자극을 받은 이항성이 같은 해(1968년) <한국현대판화 10년전>을 기획했다는 점이다. 당시 전시에는 전시를 기획한 이항성을 비롯해 김영주, 정규, 유강렬, 최영림, 배륭, 김정자, 강환섭, 이상욱, 윤명로, 김상유, 김종학 같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작가의 명단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판화협회> 작가와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작가들을 아우르는, 사실상 당대의 현대판화작가들을 망라한 전시였다.

 이 시기(1960-70년대) 판화작가로 <한국판화협회>에도 <한국현대판화가협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작가들 중 강국진과 이응노의 존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강국진은 1971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한국 최초의 판화 교실을 개원했다. 당시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 판화 프레스기를 직접 제작하고, 김상유와 이상욱을 초빙해 판화교육에 앞장섰다. 판화 공방도 그렇거니와 특히 판화교육에 관한 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 국내미술대학에 판화과가 개설되기도 전의 일이고, 판화시장이 형성되기도 전이어서 당연히 공방체제도 정착되지 않았던 불모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벤호, 라는 상호 명의 수제 프레스기가 드문 수요에 부응해 주문 제작되던 것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그렇게 옛날에 작가들은 프레스기도, 니들 같은 도구도 직접 만들어 썼다.

 판화교육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각 홍익대와 서울대에서 판화교육이 시작된 것이 1963년이라고 한다. 김정자가 오클라호마에서 판화를 배워와서 처음으로 실크스크린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국내미술대학에 판화과가 정식으로 개설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인데, 프랑스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귀국한 이후 고도공방의 공방장으로도 재직한 바 있는 이상록과 곽남신, 그리고 일본에서 판화를 전공한 구자현 같은, 유학파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교육 현장에 투입되면서이다.

 그렇게 1983년 국내 최초로 성신여대 대학원에 판화과가 신설된다. 그리고 1988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및 서양화과 대학원 판화전공,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판화전공이 각각 개설된다. 그리고 한성대학교, 경기대학교, 동아대학교(이상 대학원 과정), 조선대학교(학부과정), 이화여대(대학원과 학부과정) 등에 판화과 또는 판화전공이 잇달아 설립된다. 이외에도 국내의 거의 모든 미술대학에서 여러 형식으로 판화 수업을 진행해오고는 있지만, 독립된 학과가 개설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더욱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던 사설 공방과 그 공방들에서 운영해오던 아카데미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현재에는 이와 같은 대학현장에서의 전문적인 판화작가 양성 교육이 더 절실한 실정이다.

 덧붙여 국내 판화 공방 현황을 보면 1980년 김구림이 국내 최초로 전문 판화 공방을 연 이후, 1982년 김태호 공방, 1989년 서울 공방, 1990년 윤인근 공방과 고도 공방, 장석태 공방, 1991년에 P&P 공방과 가나 공방, 1992년에 P.S 공방, 1994년에 장태식 공방, 그리고 1995년에는 구그라픽스가 각각 개설된 것으로 나와 있다. 개인 작업실을 겸한 작가 공방도 있고, 주문제작을 위주로 하는 전문 판화 공방도 있었지만, 이 가운데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공방은 없다. 공방이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한 주문량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낱장이 아닌 에디션 전체가 거래되는 관행이 정착되어야 하고, 판화집 혹은 판화전집 제작이 보편화되어야 하고, 여기에 무엇보다도 원작이 따로 있는 회화 그대로를 판화로 옮기는 복제판화가 근절되어야 하지만 이 가운데 무엇 하나도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판화계 넓게는 미술계의 인프라와 관련해 접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고암 이응노는 1958년 도불해 파리에 정착한 후, 1989년 호암미술관 초대전시에 참석하지 못한 채 파리 현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동안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 옥고를 치른 것 외에 사실상 국내에 정착한 일이 없다. 작가는 투옥된 와중에도 종이, 천, 돌멩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해 만든 재료로 작품을 제작했고, 당시 제작된 작품을 따로 옥중미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후 백건우 윤정희 납치사건에 휘말리는 등 작가는 윤이상과 함께 왜곡된 정치적 현실의 희생양으로서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만큼,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망향의 한이 남달랐던 것 같고, 도불 이후의 형식 파괴의 와중에도 도불하기 전의 한국화에 대한 뿌리근성이 작업의 밑바닥에 면면히 흘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동서양을 아우르고 뛰어넘는 독자적인 형식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자료를 보면 1969년에 프랑스 누벨 이마쥬 출판사에서 고암의 옵셋 판화집을 제작했고, 1973년에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주최한 <현대판화전>에 초대 받았으며, 1977년에는 고암이 가르치던 동양미술학교 수강생들의 전시를 위해서 개설한 파리 고려화랑(부인 박인경 여사가 운영하는)에서 <이응노 판화전>이 열렸던 것으로 나와 있다. 현재 전해지는 판화와 관련 자료들, 파리 국립도서관 전시에 초대받은 것(전통적으로 유럽에서는 판화 관련 주요 전시들이 곧잘 미술관 대신 도서관에서 열렸다), 그리고 비록 옵셋이긴 하지만 개인 판화 모음집이 출간된 것 등으로 보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판화는 고암 작업세계의 뚜렷한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암 이응노의 판화는 다만 그 재료와 방법이 다를 뿐 여타의 작업과 그 경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한국화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 재현과 사의적 재현, 서체추상과 문자추상, 콜라주와 태피스트리, 평면과 입체, 그리고 말년에는 인간을 소재로 한 군상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시종 특정의 형식이나 내용에 구속받지 않고 종횡무진했던 화가의 편력이 그대로 판화에로 옮겨져 왔다고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주로 1970년대 제작된 구성 시리즈를 통해서는 도불 직후인 1960년대의 자유분방한 형식의 한지 콜라주를 본격적인 문자추상으로 발전시켰으며, 1980년대 제작된 군상 시리즈에서는 광주민주화항쟁과 같은 한국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응답을 내놓으면서도, 동시에 지역성을 초월한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해놓고 있다.



 한국현대판화의 국제화,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와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1970년에는 동아일보가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의 비엔날레인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를 창설했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1972년 2회 전시와 1981년 3회 전시 사이에 공백이 있었다. 명칭을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로 변경한 3회 전시에는 김구림의 작품이 설치작업의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전시에서 배제되었고, 5회 전시 때는 외국인 심사위원이 배제돼 대외적인 위상과 공신력에 의문이 제기되는 등 전시의 지속성 여부에 대한 회의와 폐지론이 거론되다가, 마침내 1992년에는 아예 전시 자체가 폐지되었다. 커미셔너를 두어 작가를 지명하는 형식이었는데, 전문성을 강화하는 점이 장점인 반면, 신진작가의 진입이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덕수궁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제1회 전시(1970년)에는 24개국 작가들의 총 197점이 출품되었다. 김봉태, 김정자, 김상유, 배륭, 서승원, 유강렬, 윤명로, 이상욱, 이우환, 전성우, 송번수, 이항성, 김인자 등 총 13명의 국내 작가들이 초대를 받았다. 김상유의 목판화 <출구 없는 방>이 대상을 수상했다. 김상유는 정상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판화를 습득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판화사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로 생각된다. 대상을 수상한 작품 <출구 없는 방>은 마치 관속에 사람이 누워있는 것 같은, 흑백의 모노 톤의 화면에 담아낸 함축적이고 강렬한 죽음의 이미지가 암울했던 당시 시대적 정황에 대한 인식을 고지하는 한편,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평가받았을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마치 전통적인 문양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일종의 모자이크화를 보는 듯한 에칭 동판화를 내놓고 있는데, 이로부터는 소박하고 고답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덕수궁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제2회 전시(1972년)에는 30개국 작가들의 총 463점이 출품되었다. 1회 전시보다 참여 국가도 늘고, 특히 출품작 수가 2배 이상 증가했다. 송번수의 스크린판화 <Pantomime-1>이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전사기법을 응용한 실크스크린 판화로 보인다. 일정한 공백 이후 명칭을 변경하면서 새로 열린 제3회 전시(1981년)에는 총 23개국 135명의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이중 국내 작가 23명이 초대전시 되었다. 한운성이 한국 측 대상을 수상했다. 1980년 동아미술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한운성의 판화에서는 시대에 대한 발언이 감지되는데, 찌그러진 코카콜라 캔을 소재로 한 판화 <거인>이 소비사회와 자본의 욕망에 사로잡힌 신제국주의를, 각각 천과 끈으로 동여맨 신호등을 소재로 한 판화와 매듭 시리즈가 제도화된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제4회 전시에서는 윤미란이, 제5회 전시에서는 김태호가, 제6회 전시에서는 강애란(보따리를 실물 그대로 라이프 캐스팅한 입체판화)이, 제7회 전시에서는 윤명로가 각각 대상을 수상했으며, 제8회 전시에서는 시상제도를 폐지했다가, 1992년에 지석철(작용과 반작용 시리즈)이 대상을 수상한 것을 마지막으로 아예 전시 자체가 폐지되었다. 작가들 가운데 윤명로가 60년대 초 실크스크린 판화로 제작한 <문신> 연작은 당시 앵포르멜 경향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석판화로 제작한 <얼레 짓>과 <익명의 땅> 시리즈는 해먹에 의한 석판화 특유의 미세 얼룩과 번짐 효과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석판화를 제작할 때 해먹과 함께 복사용 토너 가루를 사용해 작가만의 특유의 질감을 얻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1980년에는 월간 건축미술문화 잡지 <공간>의 창간자인 고 김수근에 의해 <공간국제판화전>이 창설된다. <공간국제판화전>은 <공간국제소형판화전>이 원래 명칭이었으며, 소형 판화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지향했다. 실제로 출품판화의 규격을 10x10cm로 제한함으로써 판화 고유의 섬세함과 세밀함을 중시했으며, 이후 이러한 제한규정이 본 전시의 목적 지향성과 관련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 향후 보다 자유분방한 현대판화를 폭넓게 수용할 요량으로 소형 판화의 규격 제한을 폐지했다. 이처럼 규격 제한 규정을 철회했지만, 아무래도 소형 판화 특유의 밀도감을 강조하는 것에서 이 전시만의 특수성이 찾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가 커미셔너를 두어 작가를 지명 선정하게 한 것에 비해, 자유 공모 형식을 취한 것이 다른 점이다.

 <공간국제판화전>이 배출한 주요 작가로는 제1회(1980년) 장영숙, 제2회(1982년) 김형대, 김태호, 제3회(1984년) 이영애, 제4회(1986년) 전경자, 손철호, 제5회(1988년) 이재호, 강승희, 제6회(1990년) 정상곤, 김연규, 제7회(1992년) 윤갑용, 이종근, 제8회(1994년) 박정호, 이상기, 제9회(1996년) 정헌조, 서희재, 제10회(1998년) 배선미, 그리고 <공간국제판화전>에서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로 공식명칭을 변경한 것을 계기로 소형 판화 제한 규정을 철회한 직후 대상을 수상한 구자현(2002년)이 있다.

 작가들 중 장영숙은 컵 속에 담긴 물을 소재로 한 심플하고 관조적인 인타글리오 판화 <Water>로 제1회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판화에서 화면의 대부분은 여백에 할애된 채로 남겨지며, 화면은 최소한의 선과 면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절제된 화면이 실재와 비실재가 공존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을 열어놓는가 하면, 판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풍경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희박해서 마치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아스라한 심경을 갖게 한다. 이러한 명상적 분위기의 판화로 작가는 1985년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제5회 까다게스 국제소형판화전에서 수상을 하는 한편, 1991년에는 제21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하기도 했다. 제3회 대상 수상 작가인 이영애의 판화는 낙엽을 소재로 무상한 시간과 존재의 유한성을 자연에 이입한 서정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이런 주제의식의 판화로 작가는 1997년 제2회 비톨라 국제판화트리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벽을 소재로 한 강승희의 수상 작품은 정적과 여명에 싸인 도심의 변두리 풍경을 통해서 삭막한 현대인의 이면을 들추어내 보인다. 새벽녘의 한강 변을 소재로 한 어스름하고 파르스름한 대기의 분위기가 시적이고 서정적인 화면 속에 오롯이 되살아나고 있다. 형상을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으로 단순화시키고 화면의 상당 부분을 여백에 할애함으로써 새벽녘의 대기를 강조하는 작가의 방식은 대상을 즉물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작가의 내면에서 한차례 걸러진 일종의 내면화된 풍경을 예시해준다.

 또한 박정호의 판화는 주로 여체와 꽃 그리고 달이 떠 있는 텅 빈 밤의 정경을 결합시키는 방법으로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정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절대 침묵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고독한 생명의 상징이며, 그 상징의 편린들이 화면을 일종의 내면화된 우주의 메타포로 탈바꿈시켜놓고 있다. 흑과 백의 대비가 강한 공간 속에서 생명을 암시하는 여체와 대지 그리고 달의 신화적 의미가 결합 된 정적인 화면이 명상의 계기로 이끈다. 흔히 메조틴트8)는 흑과 백의 미학으로 불린다. 그 흑백의 미학이 자아내는 정적인 깊이감으로 특유의 감정 혹은 감각을 포착해 낸, 드문 성과라고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폐해도 없지 않지만, 크게 보아 국내 미술계의 체질 변화를 몰고 온 가장 강력한 경우로 치자면 비엔날레를 드는 것에 주저하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국내 미술계에 현대미술 비엔날레가 처음 시작된 것이 1995년의 일이다(광주비엔날레). 현대미술 비엔날레와 바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하튼 국내에 국제규모의 판화비엔날레가 이미 1970년(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에, 그리고 1980년(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에, 두 개씩이나 창설되었다는 사실은 예사롭게 볼 일은 아니다.

 한국현대판화가 막 시작되던 초기(1950-60년대)에 판화는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전위였음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알만한 회화 작가들 중에는 판화에도 정통한 작가들이 적지 않고, 그들이 현재 한국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중심세력이 되고 있다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국내에서 현대판화의 역사는 그다지 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일궈냈고, 그 성과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꽃 피운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비엔날레를 통해 국제미술의 동시대적 경향과 감각을 흡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제적인 진출을 통해 세계 현대미술 현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 모두 이즈음의 일이다.

 그 주요 현황을 보면, 1966년 김종학이 목판화 <역사>로 제5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가작상을 수상했다. 1968년에는 배륭, 서승원, 안동국이 제6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가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대상 국가가 확장되는데, 윤명로가 제6회 <파리비엔날레>에, 이성자, 배륭, 김형대, 서승원, 윤명로, 이상욱, 유강렬이 제1회 이탈리아 <깔피 목판화 트리엔날레>에, 강환섭, 김정자, 김종학, 배륭, 윤명로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회 <국제 동판화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1970년에는 김차섭, 하종현, 이우환이 제7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송번수가 제7회 <파리비엔날레>에, 김상유가 제11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1972년에는 김상유, 김창열, 곽덕준이 제8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가해, 곽덕준이 문부대신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이우환, 김구림, 정찬승이 제9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1975년에는 한묵이 제13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그리고 1976년에는 이강소가 제10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여했다. 1978년에는 서승원, 심문섭, 곽덕준, 진옥선, 이우환이 제11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여해, 진옥선이 외무대신상을, 이우환이 교토국립근대미술관장상을 각각 수상했다. 1979년에는 김태호, 이승일, 한운성, 오세영, 장화진, 최인수가 제6회 <영국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여해, 오세영이 옥스퍼드갤러리상을 수상했다.

 1979년에는 황규백이 컬러 메조틴트 판화로 <류블리아나 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가해 스코에미술관상을 수상했고, 1983년에는 곽덕준이 스크린판화 <사건적 관계 837>로 제1회 <중화민국 국제판화전>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섬세한 묘사와 몽환적인 분위기가 특징인 황규백의 판화는 당시 국내에 그 경향을 찾아보기 어려운 초현실주의적 비전을 열어놓고 있다. 반면,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곽덕준의 판화는 전도된 비상식적 관계를 통해 일상의 이면을 일깨우는, 낯설게 하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제적인 규모의 전시에 작가들이 참가하는 것이 전후에도 없지 않지만, 유독 1970년대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외관상으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크게 보아 1970년대가 한국현대판화 나아가 한국 현대미술(어쩌면 현대미술보다도 먼저 현대판화)의 국제화의 과정이 정착된 시기로 봐도 되겠다. 그 내용을 보면 판화 전문 비엔날레에 참여한 경우도 있고, 현대미술비엔날레에 판화로 참가한 경우도 있다. 참여작가로 치자면 판화만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도 있고, 판화를 겸하는 작가들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판화가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매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대상 국가(혹은 도시)가 다변화되었지만, <동경국제판화비엔날레>에 작가들의 참여 빈도수가 단연 높은 편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도 있지만, 이보다는 일본 모노하의 미학적 기초를 정립한 재일화가 이우환이나 곽덕준(그리고 어쩌면 곽인식)과 국내 작가들 간의 교유관계가 일정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판화를 매개로 한 교유관계는 이후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의 단색화가 상호영향 관계9)를 형성하는 것으로도 발전했을 것이다.

 이후 판화는 현대미술의 한 분과 혹은 표현양식으로서 현대미술과 그 행보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1980년대 들어서의 민중목판화운동을 계기로 또 다른 전기를 맞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가운데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소통의 기술이다. 그리고 소통의 기술에 관한 한 판화만 한 장르도 미디어도 없다. 그러므로 민중목판화운동이 예술의 현실참여를 표방10)하는 것인 만큼, 어쩌면 목판화운동의 부흥에는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여기에 인쇄물을 광의의 판화로 본다면(그 전에 예술판화와 소통을 매개하는 판화의 개념 구분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대중매체의 광범위하고 자유자재한 콜라주에 바탕을 둔 매체미술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렇게 민중목판화운동과 매체미술은 1980년대 현실주의미술을 견인하는 사실상의 두 축이었고, 여기에 판화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적어도 국내외적으로 볼 때 국제화의 시동을 걸었던, 그래서 어쩌면 한국현대판화의 최전성기에 해당할 1970년대의 눈으로 돌이켜보면,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서 판화는 처음부터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전위였고, 시대정신을 반영한 표상이었다.



1) 여기서 현대판화는 현대미술과 마찬가지로 관용적인 표현이다. 현대판화나 현대미술은 현대성 개념에 긴밀하게 연동된다. 그런 만큼 그 객관적인 정의를 얻기 위해서는 현대성 개념에 대한 별도의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2)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변상도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정조 연간에 단원 김홍도가 원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용주사 판본(1796년판)이 있다. 용주사 판 변상도는 경전과 마찬가지로 한글본과 한문본이 있으며, 판과 원화 둘 다 전래되고 있다. 이 판화는 역시 김홍도가 원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륜행실도(1797년판)와 더불어 회화에 있어서 겸재 정선의 화풍에 비교될 만한 진경산수 혹은 실경산수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3) 이외에도 책의 소장자를 밝히기 위해 책의 겉장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도 생활판화로 분류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활판화 역시 그 제작과정에 일정한 미의식이나 개성적 표현이 개입된다고 본다면, 생활판화와 예술판화의 구분에는 편의적인 면이 있다.
4) 여기서 말하는 원시적인 방법이란 인쇄술을 일컫는데, 엄밀하게 말해 인쇄와 판화는 공정상 차이가 없다. 다만 대량복제를 통한 상업적인 목적을 지향하는 경우와, 처음부터 예술작품을 의식하고 제작된 경우로 인쇄물과 판화를 구분해볼 수는 있다. 
5) 최영림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유학시절, 1956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판화로 대상을 수상한 무나가타시코에게 판화를 사사 받았으며, 피리 부는 소년과 나체의 여인을 소재로 한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 작가는 1934년과 40년 <일본창작판화가협회전>에 입선하기도 했다. 
6) 정규는 1956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목판화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7) 어쩌면 타피에스나 피에르 슐라주 같은 엥포르멜 계열의 작가들은 당시도 그렇지만 한동안 국내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호영향사와 관련해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의 단색화 간 영향 관계와는 또 다른 국면을 엿볼 수가 있다. 
8) 메조틴트는 가장 전통적인 판종 중 하나로서, 사실적이고 정밀한 묘사에 뛰어나 사진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초상화를 제작할 때 널리 쓰이던 방식이다. 현대판화에서는 명상적인 분위기나 정적이고 관조적인 깊이감을 연출할 때 주로 사용되는 판종이다. 노동집약적인 과정으로 인해 국내에 그 작가층이 그다지 두텁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다. 
9) 아마도 현상 자체가 저절로 드러나 보이도록 방기(혹은 연출)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급적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태도를 공유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 사상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10) 예술의 현실참여를 표방하는 것으로 치자면, 1980년대 민중미술보다 먼저 1920-30년대 카프운동이 있었다. 당시에도 판화가 프로파간다미술을 실천하고 선전하는 주요 매개체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판화사, 곽남신, 도서출판 재원, 2002. 

한국 고 근대 판화 중 유교와 관련된 판화에 대하여, 고충환, 

서울판화미술제 특별전 한국 고 근대 판화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995. 

한국의 근대판화, 황인, 

서울판화미술제 특별전 한국 고 근대 판화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995. 

한국현대판화 10년, 공간, 1969.8. 

현대판화교류전, 오광수, 공간, 1975.5.

판화의 기초개념, 윤명로, 공간, 1975.5. 
한국현대판화-어제와 오늘, 이경성, 호암미술관, 1993. 
한국 판화예술의 흐름, 이구열, 
한국현대판화 40년, 국립현대미술관, 1993. 
한국현대판화의 형성과 전개, 윤명로, 
한국현대판화 40년, 국립현대미술관, 1993. 
판화의 장르개념을 넘어 판법의 형식개념에로, 고충환, 
한국현대판화 1958-2008, 국립현대미술관, 2007-2008. 
한국현대판화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국제교류의 의미, 정상곤, 
한국현대판화 1958-2008, 국립현대미술관, 2007-2008. 
한국현대판화의 담론과 현장 1958-2008, 정상곤 엮음, 
국립현대미술관, 2007. 
한국현대판화사의 개괄적 이해, 그 흐름과 좌표들, 고충환, 
판화하다-한국현대판화 60년, 경기도미술관, 2018. 
고암의 형식실험실을 엿보다, 고충환, 이응노의 판화, 이응노미술관, 2011. 
강국진의 판화, 판화와 회화 사이, 경계, 형식실험의 장, 고충환, 
경기도미술관 세미나, 2018.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