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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래/ 우연한 의미와 겉도는 서사, 그러므로 어쩌면 알레고리

고충환

김미래/ 우연한 의미와 겉도는 서사, 그러므로 어쩌면 알레고리 

 김미래의 그림은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그리고 어쩌면 상황적이다. 그림 속에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이야기가 있는 그림의 경우에 주제는 그림의 의미 내용을 함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제를 작가의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 내용을 해석하기 위한 입문 과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먼저, <펑>(2014)이 있다. 뭔가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다(의성어). 뭔가가 펑 하고 터지는 모양을 흉내 낸 말이다(의태어). 작가는 폭발하는 이미지를 통해 터지는 소리와 모양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뭐가 터지고 폭발하는가. 억압된 욕망이 터지고, 억눌렸던 불안이 터지고, 분노가 폭발한다. 내일이 없는 세대, 미래를 저당 잡힌 세대가 억눌러왔던 욕망이 터지고, 불안이 터지고, 분노가 폭발한다. 억압의 게이지가 임계점을 넘어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자크 라캉은 상징계가 억압한 실재계가 호시탐탐 상징계의 전복을 노린다고 했다. 이처럼 억압된 실재계가 임계점 너머로 열린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렇게 열린 실재계를 불모의 사막에다 비유한다. 작가는 그렇게 내일이 없는 세대, 미래를 저당 잡힌 세대, 불모의 사막을 사는 세대의 암울한 세대감정 그리고 시대 감정을 펑 하고 폭발하는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암울한 세대감정(그리고 시대 감정)이라고 했다. 다음 주제 <검은 산>(2015)이 그 감정을 이어받는다. 그림에서 검은 산은 피라미드처럼 생겼다.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기어오르려고 애를 쓴다. 먼저 정상에 오르기 위해 기를 쓴다. 그러므로 피라미드는 경쟁 사회를 표상한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를 표상하고, 연민 없는 사회를 표상한다. 여기서 검은 산은 경쟁하는 사람들이, 연민 없는 사회가 스스로 쌓아 만든 탑이다. 마치 사람들의 욕망이 만든 바벨탑 그러므로 욕망의 탑이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처럼 검은 산은 결코 사람들에게 욕망에 대한 보상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검은 산은 진즉에 실패가 예정된 욕망 그러므로 무모한 욕망의 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라캉의 실재계 그러므로 슬라보예 지젝의 불모의 사막에 해당할, 그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해야 할 검은 산을 작가는 이처럼 폭력과 권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억압적이고 파국적인 공간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정의를 다음 주제 <거리의 무법자>(2016)가 받아 발전 심화시킨다. 여기서 거리의 무법자는 무법천지를 산다. 그리고 무법천지는 폭력과 권력과 억압이 난무하고 모든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 내린 현실의 상황 논리를 의미한다. 같은 의미의 주제의식이 각각 공간(검은 산)을 이용해서, 그리고 재차 그 공간을 사는 주체(거리의 무법자) 중심으로 적용되고 전개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어느 경우이든 그렇게 작가가 세계를 보는 세대감정 그리고 시대 감정은 암울하다. 도무지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다. 

그 없음 그러므로 어쩌면 무의 감정, 그 불모의 감정이 또 다른 단계의 서사, 또 다른 부류의 서사를 예비하고 있다. 바로 모든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 내린, 이라는 부분이 그 단서가 된다. 이로써 작가의 세대감정이 그리고 시대 감정이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작가는 오롯이 세대감정에 그리고 시대 감정에 충실했다. <펑>이 그렇고, <검은 산>이 그렇고, <거리의 무법자>가 그랬다. 그건 결국 모든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 내린 세대감정을 표현한 것이었고, 시대 감정이 표출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성적인 관점에서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내린 상황 논리를 진단했다면, 이제 아예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내린 사태 자체 속으로 진입한다. 그렇게 전혀 다른 종류의 서사가 짜이는 사태 속으로 들어가면서 작가의 작업은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돌무덤과 까마귀, 씨앗 괴물>(2020)이 그렇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과연 주제라고 할 수가 있는가. 주제로 치자면 알만한 의미와 일관된 서사에 주어진 이름이 아닌가. 주제도 그렇고 의미도 그렇고 그림 또한 그렇다. 이제 작가의 그림은 그동안 자기 반성적인 단계를 지나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고, 그렇게 달라진 국면은 향후 한동안 작가의 작업을 지배한다고 예상해봐도 좋을 것이다. 바로, 알만한 의미 대신 의미 바깥에 의미를 설정하는(모리스 블랑쇼) 단계로 접어들었고, 적어도 외관상 보기에 일관된 서사 대신 상호 간 이질적인 그리고 무관계한 서사의 조각들이 부유하면서 전혀 다른 차원과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의미의 그리고 서사의 관계망을 짜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의미는 다른 의미를 불러들이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고, 서사 또한 다른 서사를 파생시키는 조건으로서만 당위성을 갖는다. 그렇게 모든 의미는 그 자체로 정박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서사 또한 우연에 던져진다. 다시, 그렇게 시작도 끝도 없는, 의미와 서사의 편린들이 부유하다가 우연하게 접속되고 연이어지는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링크의 무한순환서사구조를 열어 보인다. 그 서사구조가 그림 속 의미를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임의적인 것으로 만들고, 가변적인 것으로 변질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방향성이나 속도감을 연상시키는 무분별한 선들이 지나가고(서늘한 어둠 아래 먼지가 별이 되고), 의심스러운 구덩이 아니면 무더기들이 보인다(Whoosh Whoosh). 관 뚜껑을 여는지 닫는지 알 수 없는(양가적인?) 사람이 등장하고, 흡사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중절모와 프록코트 차림의 남자들도 보인다(39개의 돌무덤과 108마리의 까마귀들). 그리고 다시, 방향성과 속도감을 연상시키는 무분별한 선들, 그리고 의심스러운 구덩이들(오래된 바나나 껍질처럼 너덜거리는). 그리고 나뭇가지 살인마와 눈에 나뭇가지가 박힌 옆집 여자, 돌무덤, 까마귀, 토끼 똥, 씨앗 괴물, 하릴없게도 짐짓 진지하게도 보이는 숲속에 서성이는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알만한 이 모든 것(여하튼 인식의 망) 밖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잠재적인 이야기, 암시적인 이야기,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다(예술은 서사 곧 이야기의 기술이다). 
이것들은 다 뭔가. 앞서 <돌무덤과 까마귀, 씨앗 괴물>이 주제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작가의 서사구조가 의미 그러므로 주제를 일시적인 것으로, 임의적인 것으로, 가변적인 것으로 만들고 변질시킨다고도 했다. 결국 주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알 수 없는 의미들과 부유하는 서사들이 우연하게 접속되고 연이어지면서 열어놓는, 다른 어떤 지점에 있었다. 그게 뭔가. 알레고리다. 바로, 알레고리가 주제다. 다시, 작가는 근작에서 이성적인 질서가 무너져내린 사태 자체 속으로 들어온 만큼 더 이상 사태를 비교해볼 수 있는 이성적인 관점도 없다. 보는 관점에서 겪는 차원으로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알 수 없는 의미들과 일탈적인 서사들로 짜인 미증유의 불안과 무분별한 욕망의 알레고리일 수 있다.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펑 하고 터지는 소리와 모양으로 나타난, 검은 산으로 암시되는, 무법천지와 거리의 무법자에 반영된 세대감정과 시대 감정을, 그 징후와 증상을 알레고리로 풀어낸 것일 수 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다. 이성적인 시대가 이성적인 예술을 반영하고, 비이성적인 시대가 비이성적인 예술의 거울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시대 감정은 비이성적인 것이었고, 그 시대 감정을 비이성적인 예술로 되 비춘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 그러므로 의미가 흐르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크 데리다는 하나의 의미, 궁극적인 의미, 최종적인 의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고도 했다. 말과 언어의 회의론자들인데, 작가가 그렇다.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 말과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이야기를 연필로 그리는데, 자신이 품고 있는 예민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샤프를 고집한다. 감정만큼이나 예민한, 그리고 어쩌면 의식보다 나약한(?) 샤프로 밑도 끝도 없는 그리기, 집요한 그리기, 그러므로 편집증적인 그리기에 몰입한다. 그 몰입에는 어쩌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측면(의식은 우연하게 흐른다)이 있고,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적인 국면(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인 것이 부지불식간에 표출된 것일 수 있다)이 있고, 자유연상적인 성질(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파생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편집증적인 그러므로 집요한 연필그림으로, 때로 독립출판(아티스트 북)의 형식으로, 그리고 더러 짓다 만 공사현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설치작업으로 말과 언어의 경계를 파고들고, 의미와 무(혹은 비)의미의 차이를 넘나든다. 그렇게 서사의 생리로 치자면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운 이야기, 시적 서사를 열어놓는다. 시의 전모는 결코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게 의미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채로, 그럼에도 여전히 의미로 남겨진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 그러므로 이야기는 시의 바로 그 빈 부분, 비어있으면서 찬 부분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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