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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아, 흐르는 물과 함께 흐르는 자기

고충환


송경아, 흐르는 물과 함께 흐르는 자기 

고충환 미술평론가

물을 본다. 물을 보면서 빛과 바람을 같이 본다. 수면에 일렁이는 물결에서 바람을 보고, 물결 위에 부서지는 빛을 본다. 자잘한 알갱이들로 산란하면서 물과 희롱하는 빛을 보고, 물을 흔들어 물결을 만드는 바람을 본다. 물을 볼 때, 수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일, 수면, 그러므로 물의 표면, 어쩜 물의 피부에 빛과 바람을 불러들여 서로 희롱하는 자연현상에 유독 매료되었던 화가들이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다. 그들은 본질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그들을 유혹하고 사로잡을 수 있었다. 비록 물의 표면이지만, 표면에 물은 없다. 오직 물과 빛과 바람이 경계를 풀어 한 몸을 이루려는 욕망이 있을 뿐. 한순간도 멈추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흐르면서, 흔들리면서, 부서지다가 다시 모이면서 시시각각 몸을 바꾸는 변태가 있을 뿐. 화가들은 물의 극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바로 그 희롱에, 욕망에, 변태에 매료되었다. 오직 물만이 줄 수 있는 매료였고, 물이기에 줄 수 있는 감각적 유희였다. 

그리고 작가 송경아는 물을 보고 그린 자신의 그림을 <물, 빛, 바람을 보다> 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작가의 물 그림에는 어느 정도 인상파적인 것이 있다. 물과 빛과 바람이 서로 희롱하고, 욕망하고, 시시각각 몸을 바꾸는 변태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마치 물처럼 흐르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부서지다가 다시 모이는 것들, 그래서 어쩜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그러므로 덧없는 것들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흐르는 것들은 붙잡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흐르는 것들을 붙잡으려는 욕망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된 욕망이고, 덧없는 욕망이다. 바로 그 덧없는 욕망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다시, 물을 본다. 물은 투명하고 반영한다.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 그게 뭔가. 거울이다. 물거울이다. 물거울에는 하늘이 비치고, 구름이 비친다. 그리고 주변에 숲이나 나무라도 있을 때면 그것도 비친다. 그리고 내가 비친다. 여기에 최초로 물거울에 비친 자기를 본, 한 사람이 있었다. 나르시스다. 물거울에 비친 자기, 반영된 자기, 또 다른 자기, 그러므로 어쩜 분열된 자기를 사랑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다른 종족이 살고 있다고 했다. 거울을 보면, 저게 나지 싶은 선입견이 아니라면, 거울 속에 낯선 누군가가 나를 쳐다본다. 시선과 응시다. 내가 거울을 보면(시선), 거울도 나를 본다(응시). 
나르시스도 보르헤스도 거울을 매개로 분열된 자기를 보여준다. (물)거울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을 예시해준다. 감각적 반영과 관념적 반영이 그것이다. 외관상 (물)거울은 감각을 반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감각을 매개로 관념을 반영한다. 감각적인 나를 반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감각적인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자기, 그러므로 어쩜 분열된 자기를 불러낸다. 그러므로 모든 (물)거울은 자기반영성을 매개로 또 다른 자기를 호출하고 소환하는 도구다. 그렇게 물을 보고 있으면 내가 보이고, 물과 함께 흐르는 욕망이 보이고, 물처럼 흘렀을 시간이 보인다. 


그걸 작가는 <심연의 표상>이라고 불렀다. 전작의 주제이지만, 사실은 근작에도 통하는 주제고, 어쩜 물을 소재로 하면서부터 피할 수 없는 주제다. 그렇게 작가는 물을 매개로 감각을 반영하고 관념을 반영한다. 감각적 자기를 반영하고 관념적 자기를 반영한다. 현상적 자기를 넘어 분열적 자기를 반영하고, 현상하는 자기를 넘어 심연을 반영한다. 물아일체에서 물은 원래 사물을 일컫는 말이지만, 여기서 물을 물로 이해하면(사실은 물도 사물이다) 그 속뜻을 읽을 수가 있다. 그렇게 물을 보고 있으면 내가 물이 되고 물이 내가 된다. 물이 흐르면 나도 흐르고, 물이 부서지고 모이는 꼴에 따라서 나도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그렇게 흐르는 물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붙잡을 수가 없다. 물을 정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정의할 수가 없다. 

작가는 굳이, 물을, 본다고 했다. 물을 보고 있는 누군가를 전제한, 그 부재 하는 누군가에게 방점이 찍힌 주제고 말이고 표현이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물거울 속에 비록 작가는 없지만, 사실은 생략된 주어의 형태로 이미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현상을 보면서(혹은 보여주면서) 사실은 자기를 보고 있는(혹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비록 물을 매개로 한 자연현상을 그린 것이지만, 이를 통해 사실은 물을 통해 본 자기, 물에 반영된 자기, 물에 이입된 자기, 물에 일체된 자기, 물과 함께 흐르는 자기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작가의 그림은 물을 소재로 한 일종의 자화상의 또 다른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작가는 물을 그린다. 물을 그리면서 물에 반영되는 것들, 이를테면 물 위에 산란하는 빛을 그리고, 하늘과 구름을 그리고, 주변에 나무며 숲이 있을 때면 그것도 그린다. 그러나 여기서 물이 반영하는 것들, 이를테면 빛도, 하늘도, 구름도, 나무도, 숲도 하나같이 정황적 사실일 뿐, 엄밀하게 빛인지, 하늘인지, 구름인지, 나무인지, 숲인지 알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물이 흐르기 때문이고, 항상적으로 이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 그 이행에 따라서 그 위에 던져진 반영상도 시시각각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정황적으로 내가 알만한 소재들이지만, 그 정황, 그 선입견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그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시시각각 이행 중인 것들을 좇는 감각에 붙잡힌 것들이란 점에서, 감각적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작가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허문다. 추상과 구상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선입견을 흔들어놓으면서 재정의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그 재정의를 촉발하는 또 다른 장치가 있다. 바로 가장자리가 없다. 작가의 물 그림에는 특이한 것이, 경계가 없고 가장자리가 없다. 다만 풀사이즈로 잡아낸 물이 있고, 화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물이 있을 뿐. 그렇게 가장자리가 지워진, 관계의 풍경에서 잘려져 나온 물 그림이 심연처럼 가없고, 아득하고, 막막하다. 구상(혹은 구상성)이 뭔가. 구상(혹은 구상성)은 언제 어떻게 지각되는가. 바로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자기와는 다른 무엇, 곧 타자와의 관계와 비교에 의해서이다. 이를테면 빛과,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숲과의 비교에 의해서 물은 비로소 물로 지각된다. 물결에 의해서 바람을 지각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엔 비록 빛이, 하늘이, 구름이, 나무가, 숲이 들어와 있음에도 사실은 전혀 그림의 구상성(그러므로 사물의 실재성)을 담보해주지 못한다. 

앞서 정황적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다만 한갓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작가가 물에 매료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황적 사실(혹은 실재)로만 존재할 뿐, 정작 바로 그것임을 담보해주지는 않는 어떤 지점, 그러면서 또 다른 비전(아마도 추상과 구상이 몸을 섞는 비전? 감각이 관념으로 확장되는 비전?)을 열어 보이는 어떤 지점이 작가를 유혹했을 것이다. 그렇게 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 성질이며 현상(아마도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허물면서 재구성하고 재정의하게 만드는)이 작가를 매료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물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사물을, 사물의 구상성을 소환하면서 해체하는)을 강화하는 또 다른 장치가 있다. 빛의 간섭현상에 의한 모아레 효과가 그것이다. 천 중에는 유독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천이 있는데, 오간자 천(일명 노방 천)이 그렇다. 작가는 캔버스에 물 그림을 그리고, 오간자 천으로 캔버스 전면을 덧씌운다. 오간자 천으로 덧씌우고 다시 그 위에 덧그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는데, 어쩜 형상을 드러내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물이 수면 그러므로 자기 표면에 불러들인 소재들의 실재를 드러내면서 지우기를 반복한다. 드러내면서 지우기, 드러내면서 가리기, 소환하면서 해체하기, 긍정하면서 부정하기를 거듭한다. 바로 물의 이중성이며 양면성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과정이다. 

그렇게 그림이 큰 물결을 만들고, 중첩된 오간자 천이 작은 물결을 만든다. 그렇게 큰 물결과 작은 물결이 중첩되면서 물결무늬가 겹쳐 보이고, 마치 그림 속 수면이 일렁이는 것 같은 일루전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이 겹쳐 보이는 것 같은, 그림이 흔들려 보이는 것 같은, 그러므로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환영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바로, 물을 쳐다볼 때, 빨려드는 분위기다. 그렇게 작가는 물을 보면서, 사실은 물과 함께 흐르는, 흩어지고 모이는, 붙잡히면서 잡히지 않는 자기 자신(어쩜 자신의 타자 혹은 타자로서의 자기)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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