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민경숙, 정물화를 재고하다

고충환


민경숙, 정물화를 재고하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장르로 치자면 민경숙의 회화는 정물화에 속한다. 영어로는 still life다. 이 말 속엔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정적인 생명, 움직임이 없는 생명, 정지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정지된 생명? 죽음이다. 우리 말로 정물화에 해당하는 영어 still life는 이처럼 그 말 속에 죽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서양미술사에서 정물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크 미술에서였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렇다. 바니타스 그러므로 인생무상이라는 전언을, 메멘토모리 그러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를 정물화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정물화에 등장하는 생명, 주로 자연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생명, 그러므로 자연, 그리고 어쩌면 아름다움마저도 운명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이처럼 정물화가 상기시키는 죽음의 그림자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물화 자체, 그러므로 생명 자체, 자연 자체, 아름다움 자체에 끌린 사람들도 있었다. 자연을 곁에 두고, 보고 즐기고 향유 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장르 페인팅이 그렇다. 이젤 페인팅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시장이 형성된 것과 그 시기며 맥을 같이 한다. 그 자체 정물화의 또 다른 쓰임새로 볼 수 있겠다. 이로써 정물화의 감각적 표면을 보는 사람과, 정물화가 상기시키는 이면의 의미를 읽는 부류로 구별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정물화의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정물화는 그 말 속에 정적인,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정물을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뒤집어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움직임이 없으므로 사물 대상의 됨됨이를 파고들기에 그만이라는 말이다. 표면의 감각적 변화를 좇아 자연으로 나간 인상파 화가들에 반대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한 세잔이 그리고 남긴 일련의 정물화가 그렇다. 심지어 풍경을 그릴 때조차, 나아가 사람마저도 세잔의 그림에서는 정물(화)처럼 보인다. 그렇게 세잔이 보기에 정물화는 형식실험을 위한 연구대상이었다. 

이처럼 정물화는 그 이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감각적 표면이 미적 쾌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사물 대상,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됨됨이를 파고들게 만든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겹치는 정물화의 세 층위로 봐도 되겠다.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민경숙이 그린 일련의 정물화 역시 이 세 층위가 중첩돼 있다. 때로 그의 정물화는 죽음을 상기시키고(역설적이지만, 플라스틱 조화만큼이나 생생한 생화가 그렇다), 더러 감각적 쾌감을 자아낸다(사과나 버찌가 먹고 싶고, 곁에 두고 보고 싶다). 그리고 사물 대상의,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감각적 현상에 대한 형식실험을 엿보게 한다. 주로 사물 대상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사과와 포도, 체리와 딸기 같은 과일을 그린다. 장미와 국화 그리고 서양란 같은 알만한 꽃을 그린다. 전작에서 보면 유리병과 인형, 장난감과 책, 그리고 색색의 잉크가 들어있는 잉크병과 같은 각종 생활 오브제도 그렸다. 하나같이 소재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오롯한 것이 소재주의로 볼 만한 회화적 경향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특정 소재를 잘 그린 그림, 특정 소재에 방점이 찍힌 그림, 특정 소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그림, 특정 소재를 브랜드화한 그림, 그러므로 소재주의 그림인가. 그게 단가. 그렇지는 않다. 소재주의는 분명 작가의 그림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건 다만 부분일 뿐, 구실일 뿐, 어쩌면 작가의 그림에 주목하도록 유도(유혹?)하는 입문 과정일 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다른 무언가가 그림에서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그 다른 무언가가 뭔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소재는 외관상 소재주의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특정 소재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만큼, 사실상 어떤 소재여도 무방할 만큼 어느 정도 혹은 상당할 정도로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적어도 소재에 관한 한, 혹은 소재를 재현하는 능력에 관한 한 작가에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모르긴 해도 차후에 작가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볼 요량으로 이 소재에서 저 소재로 옮겨갈 것이고, 그렇게 자기표현 영역을 확장하거나 심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확장과 심화는 단순히 소재를 재현하는 능력을 넘어선 것이 될 것이다. 넘어선? 그건 아무래도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떻게 보다는 왜, 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특이한 것은 하나같이 이 자연물과 오브제들을 그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투명한 비닐 소재에 담아낸 것이다. 작가는 제목을 하나같이 주머니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그림에서 보이는 정황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사물 대상을 싼 비닐 소재, 작가의 말대로라면 주머니를 노끈이나 매듭으로 묶는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작가의 그림을 선물이라고 명명하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보인다. 꽃집에서 내주는 꽃다발이나, 선물 가게에서 볼 법한 포장된 선물 그대로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에서 선물이 갖는 의미는 남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정물화의 세 층위 중, 자연을 곁에 두고 보고 즐기고 싶은 욕망과도, 그렇게 감각적 쾌감을 즐기고 향유하는 경우에도 부합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자연을 소재로 한 자신의 그림을 매개로 다름 아닌 그 욕망, 그 향유를 선물한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에는 선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끈이나 매듭이 없는 경우, 사물 대상을 담은 비닐봉지만 덩그렇게 제시된 경우, 그렇게 위쪽이 열린 채로 노출된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뭔가를 비닐봉지에 담아낸 정황 자체를 이미 선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선물에 담아낸 작가의 애틋한 마음과 함께, 어쩌면 이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는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봉지 바닥에는 물마저 담겨 있다. 더 싱싱해 보이게 의도한 것일까. 실제로도 때로 꽃다발 속에 미량의 물이 담겨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지엽적인 경우로 보인다. 

그럼, 작가의 그림에서 물이 갖는 보다 실질적인 의미는 뭔가. 무의식이다. 무의식? 물은 흔히 무의식을 표상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의 한 부분으로서 무의식을 끌어들인 것일까.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가 구사하는 방법론에 해당하는 극사실주의는 철저하게 사물 대상의 감각적인 표면 현상에 천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과 무의식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은 잠재적인 한 가능성 정도로만 간주하고 싶다. 차후에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의미론적으로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한 계기로서 발전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이 아니라면, 뭔가. 반영과 반사, 굴절과 왜곡이다. 투명한 비닐봉지는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안쪽과 마찬가지로 외부 환경도 반영한다. 이처럼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면서 지우는 이율배반적인 성질, 의미론적으로 양가성이야말로 어쩌면 작가가 그림에 비닐봉지를 도입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싸거나 묶으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자잘한 굴곡이며 면들이 생겨나고, 그 면들마다 빛과 그림자, 음과 영에 반응하는 성질이 다 다르다. 철저하게 사물 대상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가히 현란하다고 할 만한, 이러한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일종의 감각적 유희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체가 작가를 매료시켰을 것이다. 바로 정물화의 세 층위 중 사물 대상의,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됨됨이를 파고드는 호기심도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물이 만든 반영과 반사, 굴절과 왜곡이 가세하면서 작가의 형식실험을 추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작가의 그림은 극사실주의 회화에 속한다. 극사실주의는 사실주의와의 관계로부터 파생되고, 그 관계로부터 의미심장한 미학적 관심사가 나온다. 이를테면 사실주의를 지극히 발전시키다 보면, 언젠가 사실을 넘어서는 경계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현실주의를 지극히 밀어붙이다 보면, 불현듯 현실을 초월하게 된다. 이로부터 극사실주의가,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유래한다. 바로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가 전도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을 의미하는 픽처레스크가 그렇다. 그림 같은 풍경에서 그림은 풍경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고, 허구(아니면 재현된 현실)가 현실(혹은 현실 자체)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 경우를 찾아보자면, 특히 꽃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꽃 그림은 생생한 나머지, 마치, 조화 같다. 생생한 채로, 정지된, 조화 같다. 절정에 이른 생화마저도 왠지 부패할 기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 재현된 생화가 마침내 생화를 넘어섰다고나 할까. 생화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조화는 어쩌면 유한한 생명을 간직한 채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은, 그렇게 유한을 무한으로 가장(그리고 연장)하고 싶은 불가능한 욕망을, 그러므로 어쩌면 죽음을 표상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정물화의 세 층위가 완성되거나, 최소한 제안 된다. 무의식이 그런 것처럼, 아직은 잠재적인 경우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작가의 그림을 변화시킬 의미론적 계기로 작동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