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사의 기술, 알레고리, 아이러니, 그리고 연결점 혹은 망

고충환

포커스리뷰. 박윤영전, 일민미술관, 2019.10.18.-2020.1.12.
            김우진전, 대안공간루프, 2019.12.19.-2020.1.19.

         서사의 기술, 알레고리, 아이러니, 그리고 연결점 혹은 망


박윤영은 전통의 소환과 재사용(족자와 병풍), 소위 퓨전 동양화(영어 문자도와 픽토그램, 그리고 최근에는 아랍어 글씨체), 문화번역과 문화충돌, 그리고 시나리오에 바탕을 둔 서사의 재구성 개념을 매개로 한국화를 넘어 국내 동시대 미술의 표현영역을 확장 시킨 선두그룹 작가 중 한 명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 <픽톤 호수>의 연쇄 살인마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기억된다. 당시 캐나다의 밴쿠버에 살았던 작가는 차로 이동 중 우연히 인근에 있는 픽톤 호수 근처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라디오를 통해 접하게 되고, 그 뉴스가 작업을 위한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각각 실재와 허구, 공적 서사와 개인적 서사가 날실과 씨실로 짜인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 시나리오대로 작품이며 전시를 재구성한다. 이를테면 전통 동양화의 문자도로부터 그 고유형식을 차용해 영어문장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아마도 살인마가 희생자를 향해 내뱉었을 영어문장에서 희생자를 선녀로 대체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품 속에서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그리고 실재와 허구는 경계를 넘어 하나로 혼재(혼성)된다. 
또 다른 인상 깊었던 작업으로 <몽유생리도>가 떠오른다. 하나같이 청순한 소녀 이미지와 함께 여성의 생리대를 선전하는 TV 광고를 보고, 실제 여성들이 느낄 현실 감정과의 거리감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꿈에서 본 비현실적인 풍경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로, 광고에서의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은유한 것이다. 여기서 풍자 혹은 비판이라 하지 않고 은유라고 한 것은, 그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서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강하고, 특히 은유를 통해 중의적으로 서사를 확장 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은유는 그 속에 이미 풍자를 포함하고 있고, 비판적 의미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풍자와 비판이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데 반해, 이보다는 더 암시적이고 중의적인 복선이 깔려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혼재나 복선의 정도가 간단할 때는 작품의 의미를 따라잡기가 쉽지만, 이후 작업에서 보듯 그 정도가 더 복잡해지면서 좀 더 읽어내기가 어려운 독해 방식을 요구해오기도 한다. 그동안 작가가 짜는 서사의 그물이 촘촘해진 연유도 있겠고, 서사의 원천인 현실이 복잡해진 이유도 있겠다. 이로써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정의는 작가에게도 유효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작가에게 예술은, 현실을 은유하는 책(텍스트)이다. 
그렇게 근작에서 작가가 짜는 서사의 그물망은 중층적이고 중의적이다. You, Live! 12개의 문고리. 살아 있으라! 뭔가 종말론적이고, 묵시록적이고, 예언적이지 않은가. 마치, 세상의 마지막 날에도 너는 지금처럼 살아 있을 수 있겠니, 라고 묻는 것 같다. 혹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하고 묻는 것도 같다. 12개의 문고리는 어떤가. 예수의 열두 제자가 당신을 위해 흘린 피 값을 청구하기 위해 되돌아온 것인가. 복수의 12단계? 파국의 12단계? 
라캉을 통해서 보자면, 세상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전쟁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 상징과 기호를 통해서 말하는 종족이 지배하는 세상이 상징계다. 그리고 상징과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 어쩜 상징과 기호보다 더 깊은 언어, 언어화 되지도 될 수도 없는 더듬거리는 언어로 겨우 말하는 부류가 사는 세계가 실재계다. 욕망이다. 억압된 욕망이다. 거세된 욕망이다. 상징계가 자기의 언어로 한 번도 호명한 적이 없는, 다만 00에 대한 부정, 00에 대한 결핍, 00에 대한 결여라고 부른 적이 있을 뿐인, 그래서 자기를 부를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세계다. 그것들이 되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프로이트가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이름을, 슬라보이예 지첵이 불모의 사막이라는 이름을 예비해 놓은 세계다. 태생적으로 억압되고 거세된 세계며, 운명적으로 불안한 세계다. 왜 이렇게 불안한가. 혹 불안이 주젠가. 
커튼을 젖히고 들어서면 컴컴한 조명 아래 잘 안 읽히는 텍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것 같은 나팔소리와 무겁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 발끝으로부터 올라온다. 바닥에 깔린 투명 에폭시에 난반사되는 빛과 미로처럼 벽을 둘러치고 선 병풍들이, 그리고 마치 종교적 아이콘과 기계를 결합해놓은 것 같은 알 수 없는 오브제와 그림들이 가로막는다. 5살 된 남자아이(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드의 분신)와 고래 밍키(오래된 흑백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포획된 밍크고래의 화신)가 함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대규모 원전사고며, 영국의 리비아 침공 같은 동시대의 이런저런 사건들이며 전쟁을 겪는 이야기라고 했다(일종의 성장소설 같은 플롯?). 그리고 전시는 일상을 전쟁처럼 겪는 동시대 어린이들의 참상과 아동노동 착취 현장을 추체험해볼 수 있는 관객참여형 연극으로, 시인의 에세이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그렇게 확장되면서 스펙터클과 신비주의가 결합 된, 불안을, 불안정을 증폭시킨다. 
예술은 서사의 기술이다. 여기서 서사는 이야기고 언어다. 박윤영이 이야기로서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면, 김우진은 이야기의 원소에 해당할 언어(그리고 어쩜 언어 용법)에 주목한다. 언어의 성질과 변질, 그리고 어쩜 운명에 주목한다. 언어는 살아 있다. 생물처럼 살기도 죽기도 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삶은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그렇지는 않다. 겉보기에 자연스러운 현상 같지만, 그리고 소여 된 현실 곧 주어진 현실 같지만, 사실은 관습과 제도, 권력과 헤게모니의 문제에 속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보면, 그 전형적인 경우를 사투리와 표준어에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제주도 토박이 할머니가 손녀를 상대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들려준다. 그러면 표준어로 교육을 받은 손녀는 어쩜 당연한 일이지만, 알아듣지도 받아 적지도 못한다. 처음엔 하나같이 특정 지역에 한정된 방언들이었을 테지만, 그 중 절대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 혹은 이보다는 지배계층이 사용하는 언어가 표준어로 인정되면서 나머지 방언들은 점차 소멸의 길을 걷게 되고,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언어는 사어가 된다. 심지어 제주도 해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 이를테면 이어도사나 같은 노동요 역시 처음엔 당연히 제주 방언으로 전수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모두 표준어로 개작돼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의 죽음은 단순히 사용하던 말이 바뀌는 것에 머무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세계 내 존재라는 말도 했다. 존재는 이미 어떤 언어로 특정된 세계 속으로 던져지고, 그런 만큼 언어가 존재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언어가 바뀌면 존재 자체가 바뀐다. 여기에 언어는 사고의 도구다. 그러므로 도구가 바뀌면 사고 자체가 바뀐다. 저작 <말과 사물>에서 말과 권력의 관계에 천착한 미셀 푸코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표준어, 영어(사실상 세계시민을 위한 자격요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리고 나아가 언어를 사고의 도구로 사용하고 형성된 일체의 관념, 이를테면 세계관과 가치관, 제도와 관습, 상식과 합리, 그리고 지식체계가 모두 사실을 알고 보면 권력과 헤게모니, 그리고 패러다임과 관련한 치열한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관습으로 치자면, 근대화 과정에서의 전형적인 풍경에 해당하는 국민체조(그리고 어쩜 교련과 총검술)가 시대적 가치 그러므로 당대적 이데올로기가 바뀌면서 과거 전체주의 사회의 유물로 사라진 것도 같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관습과 같은 제도적 풍경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당대의 지배적인 언어체계와 가치관이 반영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그러므로 변질을 겪든 죽든 언어와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예로 부르주아의 상식(doxa), 부르주아 고유의 언어 용법, 몸짓, 예의범절을 든다. 아마도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와 문화 계급론(문화에도 계급이 있다)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가 있겠다. 표준어는, 그리고 관습은 자연발생적인 사실 같지만, 사실은 계급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문화적인 사실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신화화된 사회적 관습을 탈신화화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 탈신화화의 과정이 박윤영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와 비교되는 것이 흥미롭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