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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덕,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고충환

이흥덕,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쫓기는 사람. 한 사내가 도망치고 있다. 가로막고 있는 붉은 벽돌 벽을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그의 도망은 무모해보이고, 성공을 예감하기가 쉽지 않다. 또 다른 그림에선 한 소녀가 달아나고 있다. 얼마나 급박했으면 인형마저 팽개친 채 들판을 가로질러 달아나고 있다. 탈주에 성공하기 위해선 들판을 벗어나야 할 것이지만,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들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덩달아 소녀의 달음박질도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그렇게 사내는 막힌 공간 속에서 달음박질하고, 소녀는 소녀대로 열린 공간 속을 줄행랑 치고 있다. 막힌 공간에도 열린 공간에도 출구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출구 없는 공간에 갇혀 죽으라고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그 줄행랑은 다람쥐 채 바퀴 돌듯 무한 반복될 것만 같다. 시시포스의 형벌인가? 감옥의 알레고린가? 작가는 세상을 감옥으로 보고, 삶을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비상구 표시는 사실은 출구 없음을 증언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열린 들판도 비상구 표시도 사실은 눈속임(지금으로 치자면 이미지정치학?)에 지나지 않는다. 
쫒기는 사람이 있으면 쫒는 자도 있는 법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쫒는 자는 한 손에 몽둥이를 든 또 다른 건장한 사내로, 으르렁거리는 개로, 때로 자신의 그림자로 변주된다. 그렇게 그림 속 사내는 또 다른 건장한 사내에게 쫒기고, 개에게 몰리고(그리고 때로 물리고), 자신의 그림자에마저 흠칫 놀란다. 여기서 쫒는 자와 쫒기는 자와의 관계를 권력관계로 읽으면 현실주의 미학을 표현한 것이 되고, 자의식 곧 자기가 자기분신과 대면하는 것으로 읽으면 존재론적 미학을 표현한 것이 된다. 여기서 현실주의 미학과 존재론적 미학은 외관상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몸으로 보아야 한다. 한 몸통의 외피와 내피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내재화된 경우, 그리고 그렇게 내재화된 현실인식이 재차 현실인식을 강화하는 상호 순환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그게 뭔가. 현실인식 그러므로 내재화된 현실인식이란 뭔가. 불안이다. 그렇담 출구 없는 공간 속에 갇혀 영원히 달음박질해야 하는 자의 현실인식은, 이 도저한 불안은, 이 암울한 비전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가. 여기서 다시, 현실주의 미학으로 치자면 시대감정 그러므로 리얼리티의 표출이고, 존재론적 미학으로 치자면 생활감정 그러므로 생철학(철학의 경지로 승화된 자의식)의 표현이다. 현실이 폭력적이라고 느낄 때 현실은 추상이 되고(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 현실이 낯설다고 느끼는 것에서 불안이 유래하고(프로이트의 캐니와 언캐니), 현실과의 괴리감이 소외를 불러온다(실존주의의 이방인의식 그러므로 자기소외). 
그렇게 작가는 현실이 폭력적이라고 느끼고, 낯설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거리감을 불안으로 내재화한다. 불안은 우선적으로 작가가 내재화한 것(주관)이지만 동시에 시대감정(객관)의 표출이기도 한 것이란 점에서, 불안을 매개로 시대감정을 호출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불안에는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불안으로 나타난 시대감정 혹은 세계감정을 매개로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 그러므로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한 것이란 점에서 심리학을 넘어 윤리학으로 확장 심화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을 불안의 에티카(윤리학)로 정의한 평자(김진하)의 입장에는 동의할 만하다. 어쩜 불안 자체를 이미 윤리학의 한 형태며 경우로 볼 수 있고, 윤리학적 태도의 징후며 증상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게 쫒기는 사람과, 그에게 내재화된 불안한 세계감정은 줄곧 이흥덕의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며 시대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때그때 상황논리에 따라서 매번 그림도, 서사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바뀌지만, 그렇게 바뀐 상황논리에 맞춰 쫒기는 사람도, 불안한 사람도 덩달아 변주(변신)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카페와 지하철. 작가의 작업은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작업의 내피가 존재론적 미학에, 그리고 작업의 외피가 현실주의 미학에 잇대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담 그 대상인 현실은, 그리고 그 현실을 읽는 현실인식은 어떤가. 현실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고, 현실인식은 그렇게 주어진 현실 그대로를 읽으면 되는 것인가. 그런데, 주어진 현실 그대로를 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현실과 현실인식은 다르다. 현실을 읽는 과정에서 현실은 어느 정도 그리고 어쩜 불가피하게 각색된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은 각색된 현실인식에 가려진다. 
그렇담 진정한 현실은 요원한 일인가. 그걸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며, 현상학적 에포케다. 평소대로라면 현실은 이데올로기의 더께에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현실에 직면하기 위해선 그 더께를 걷어내야 한다. 그래서 친근한 현실, 안 봐도 비디오인 현실(사실은 이데올로기의 눈가리개에 해당하는)을 낯설게 하는 것이다. 현상학적 에포케도 마찬가지. 관성으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판 처음 보듯이 현실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비로소 진정한 현실이 보이고, 처음 상태 그대로의 현상이 손에 잡힌다. 힘든 일이지만, 그리고 어쩜 요원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현실을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요새 식으로 치자면 이미지의 정치학이 그렇다. 장 보들리야르는 이미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체한 시대에 우리 모두 살고 있다고도 했지만(보들리야르는 이념을 그 자체로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 곧 시뮬라크르로 본다), 현대인은 현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현실에 대한 이미지면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믿어 의심치 않는 현실이란, 사실을 알고 보면 현실의 이미지, 현실의 시뮬라크르, 현실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최초 주어진 그대로의 객관적인 현실도 보편타당한 현실인식도 없다.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현실의 조각들이 있을 뿐. 이런 산만한 현실의 편린들로부터 추상해낸 것이 전형이고, 그 전형이 전개되는 장소가 객관적 현실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현실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매개로 추상해낸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전형을 창조라고 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다시, 전형을 창조하기 위해선, 객관적 현실의 지평을 전개해 보이기 위해선 무분별한 현실 그대로가 아닌, 현실을 극화해야 한다. 극화된 현실을 통해 비로소 산만한 현실이 더 잘 보이고, 무분별한 현실이 분별되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흥덕 작가의 서사적 장치가 있다. 바로 극장이며 무대다. 흔히 삶을 극장에다가 비유한다. 인생극장이다. 이흥덕 작가의 그림은 삶이라는 연극이 실연되는 무대를 보는 것 같고, 한 시대의 풍속도가 상연되는 극장 같다. 작가는 각각 카페를 그리고 지하철을 그 무대로 설정한다. 작가에게 카페 그리고 지하철은 한 시대의 풍속도가 오롯이 그 실체를 얻는 삶의 축도다. 특히 지하철이 그렇다. 흔히 지하철을 지옥철이라고 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열악한 교통현실을 빗댄 말이지만, 왠지 그 말은 삶이 곧 지옥이고, 지하철이 그 지옥의 축도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게 그림 속엔 개에게 쫒기는 사내,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는 소녀, 눈치 보는 사람, 곁눈질하는 사람, 쫒고 쫒기는, 물고 물리는 관계, 돼지역병으로 살 처분당하는 돼지들, 목발 짚은 사람, 눈뜬장님, 세월호와 4대강, 죽음의 사신과 영혼을 거래하는 해골, 마징가젯트와 아톰, 섹스심볼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마릴린 몬로, 사지가 절단된 부랑인들, 고무바지를 입고 배로 기는 거지, 노숙자, 술주정꾼, 신문 너머로 옆자리에 앉아 졸고 있는 여자의 허벅지를 힐끗거리는 사내, 마사지 걸에게 엉덩이를 내맡긴 채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는 남자, 성기마냥 빨갛고 긴 코를 킁킁거리는 남자, 헐떡이는 남자와 껄떡거리는 사내, 귓속말하는 사람, 예수와 부처, 무당과 12지와 같은 세상 모든 서사가 있고, 사건이 있고, 등장인물이 있다. 
형이상학이 있고 형이하학이 있다. 종교가 있고 욕망이 있다. 자본이 있고 잉여(잉여인간?)가 있다. 표면을 소비하는 대중문화가 있고 끈적거리는 에로스가 있다. 몰염치가 있고 용서가 있다. 그것들이 무차별하게 등가치를 이룬 카오스적 현실이 있다. 세상 모든 사건과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폭발할 것 같은 공간공포(다시, 빌헬름 보링거)가 있고, 차이를 넘어 공존하는 동시상영이 있다. 그림 속엔 이 서사, 이 사건, 이 등장인물들을 스캔하는 눈이 있으니, 바로 작가 자신이다. 작가자신을 시대의 목격자로서, 사건의 증언자로서 그림 속에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 자체 삶의 축도로 볼만한 일종의 상황극을 연출해 보이는 연출가로서의 책무도 수행해 보인다. 여기서 작가는 그림 속 현실에 화가 자신을 일종의 대리인으로서 참여시키는 회화적 전통을 차용하고 각색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다만 풍자할 뿐,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대중의 몫으로 남긴다. 여기서 풍자는 객관적 현실을 위해 사회적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미학적 장치로 보면 되겠다. 

이번 전시는 제2회 한국작가상 수상기념전 형식으로 열렸다. 그동안 작가가 보여준 성과에 비해, 그리고 작업이 갖는 위상에 비해 각종 수상제도로부터 소외된 작가를 발굴 선정하는 것이 본 상의 취지다. 2016년 제1회 수상작가(유휴열)나 이번 2회 수상작가(이흥덕)는 이런 취지에 걸 맞는 선정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1985년 한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쫒기는 사람과 그가 내재화한 시대적 징후며 증상으로서의 불안, 삶의 축도된 한 형식으로서의 카페와 지하철 연작을 거치는 줄곧 형상미술 혹은 신형상미술로 대변되는 시대를 증언하는 알레고리를 그리는 일에 진력해왔던 주제의 일관성과 저간의 성과가 평가 받았을 것이다. 원래 알레고리는 전통회화에서의 전형적인 문법 중 하나였다. 천상의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의 알레고리,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가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리고 문학적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미술사로만 알려지고 있다가, 이후 현대미술의 문학적(엄밀하게는 개념적 그리고 의미론적) 경향성과 더불어 재조명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안을 시대적 징후며 증상으로서 제안하고 있는, 시대감정을 대변하는 정서적 아이콘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작가의 회화가 이런 알레고리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을 것이다. 어쩜 이미 열어놓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본인도 심사에 참여했지만, 이참에 한국작가상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향후 숨어있는(?) 근성 있는 작가가 선정될 수 있도록 지금의 제도를 더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본 수상제도가 지향해야 할 성격에 대해서도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작가상이라는 타이틀에 대해서도 제고해볼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이런 듬직한 수상제도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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