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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련/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고충환

이호련/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며, 놀 줄 아는 동물이다. 이로부터 철학과 사상이, 문명과 문화가 유래했다. 이처럼 동물 일반과 구별해 인간의 특수성을 정의한 경우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경우로 치자면,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욕망은 인간의 타고난 자질이며, 천성이고 본능이다. 욕망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반제도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욕망은 자기를 실현하려 하고, 제도는 욕망을 억압하려 한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 욕망을 감시하는 것이 제도의 관성이다. 욕망을 컨트롤하는 것에 건전한 그리고 건강한 사회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담 욕망은 자기실현을 포기해야 하는가. 여기서 욕망은 제도를 속이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제도가 견딜만한 욕망, 제도가 수용할만한 욕망, 그래서 제도의 포용력을 증명하고 전시하는 욕망, 나아가 제도가 권장할만하고 제도에 기여한다는 착각을 주는 욕망으로 제도를 속여 자기를 실현한다. 욕망이 아닌 척하면서, 아님 공공연하게 유익한 욕망인 척 가장하면서 자기를 실현한다(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공적인 욕망은 없다. 모든 욕망은 사적 영역에 속한다. 다만 사사로운 욕망이 공적 영역으로 전염될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욕망에도 두 부류가 있다.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자기를 실현한(혹은 실현한 것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욕망과 억압된 욕망, 의식적인 욕망과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분열은 필연적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고, 그 욕망이 자기를 실현한 욕망과 억압된 욕망으로 분열되는 것에 따른 것이다. 그렇게 분열된 자기에 붙여진 이름이 각각 페르소나고 아이덴티티다. 네가 보고 싶은 나 그러므로 네가 욕망하는 나의 모습이 페르소나고, 네가 본 적도 알 수도 없는 나, 때로 나 자신에게조차도 그런 내가 아이덴티티다. 주지하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이다. 진정한 나일 수가 없다. 그렇담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무의식의 지층으로 추방된 나, 억압된 욕망이 키운 상처를 쓰다듬으며 호시탐탐 시간을 재는 나, 좌절된 욕망과 동일시되는 나, 그러므로 나의 나, 어쩜 나의 너, 곧 타자로서의 주체다. 
여기에 프로이트가, 라캉이,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조르주 바타이유가, 질 들뢰즈가, 슬라보이예 지첵이 욕망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저마다 그 경우에 차이가 있지만, 크게는 하나같이 억압된 욕망을 사회를 변혁시키는(혹은 제도적 인간을 개조하는, 그리고 어쩜 해방하는) 잠재적인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공공연하게는 자기에 반하는 논리마저 자신의 본성으로 지양하는 이성의 간계(헤겔)와, 현실을 삼키고 가상현실을 삼키고 이미지를 삼키고 모든 걸 삼키는 자본주의물신을 생각하면 마침내 그 도구가 자기를 실현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질 들뢰즈는 욕망의 탈주선이라고 했다. 욕망은 운명적으로 제도를 속이고, 제도의 감시와 지목으로부터 탈주를 꾀한다. 그래서 00척하기(제도를 속이기)고, 리좀(차이를 생성시키면서 반복하기)이고, 유목주의(탈주하기)다. 그렇게 욕망은 의식적인 그리고 무의식적인 몸(영토) 도처를 옮겨 다니는데, 눈에 정박한(영토화한) 욕망이 시선이다. 시선은 권력이다. 내가 너를 쳐다볼 때 너도 나를 쳐다본다. 그때의 너의 시선이 응시다. 그렇게 나는 시선으로 너를 보고, 너는 응시로 나를 본다. 문제는 내가 너를 볼 때 너는, 시선이 응시를 볼 때 응시는 얼어붙는다(너는 나에게 사로잡힌다). 나에게 너는, 시선에게 응시는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너를 온전하게 쳐다볼 수도 욕망할 수도 없다. 다시, 그래서 내가 너를 온전하게 쳐다보고 욕망할 수 있기 위해서 너는 기꺼이 사물이 되고, 대상이 되고, 객체가 되고, 탈인격과 탈주체로 무장 해제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네가 그런 것처럼 네가 볼 때 나도 그렇다. 쌍방 간에 욕망하는 주체, 보는 주체로서 군림하려는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고, 이로부터 사르트르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불통의 관계고 소원한 관계라는 실존주의적 인간관을 도출해낸다. 

이호련은 바로 이처럼 시선과 응시가 교차하는, 욕망과 욕망이 투쟁하는 심리적 현실을 그리고 현장을 그린다. 보고 싶은 욕망(시선의 욕망)은 주체로서 군림하려는 욕망이다. 여기에 자기를 보여주는 척하면서(유혹하면서) 주체를 탈취하려는 또 다른 욕망이 대응한다. 유혹하면서 주체를 탈취하는 것, 바로 응시가 시선을 맞이하는 방법이고 운명이다. 중첩돼 보이는, 흔들려 보이는,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흐릿해 보이는, 희뿌연 막을 통해 보는 것처럼 애매해 보이는 그림 속 정황은 바로 이처럼 보고 싶은 욕망을 방해하는, 유혹하는 척하면서 주체를 탈취하려는 너의 그러므로 응시의 책략을 그린 것이고, 어쩜 운명(응시의 운명)을 그린 것이다. 네가 나에게, 응시가 시선에게 불러일으킨 부끄러움을, 수치심을, 죄책감을 그린 것이다. 무장 해제되고 싶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너를 그린 것이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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